[왕진오 기자 @이코노미톡뉴스] 사적 제397호 '강진 전라병영성' 성 외부 해자지역에서 해자(垓字,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와 다수의 함정(陷穽) 유구가 확인됐다.

▲ '강진 전라병영성 남문지 함정유구 모습'.(사진=문화재청)

올해로 축성 600년을 맞이한 강진 전라병영성은 조선 태종 17년(1417년)에 당시 병마도절제사 마천목(馬天牧, 1358~1431) 장군이 쌓아 올렸다.

고종 32년(1895년) 갑오경장 전까지 전라도와 제주도의 53주 6진을 총괄한 육군 총 지휘부였던 곳으로, 본래 광산현(현재 광주광역시)에 설치되어 있던 것을 옮겨 설치한 것이다.

강진 전라병영성은 1999년 3월부터 2008년 7월까지 6차례에 걸쳐 성벽과 문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시행하여 4개의 문지와 8개의 치성, 성벽의 규모·축성방법을 확인했고, 이를 토대로 현재 성벽과 4대문에 대한 복원공사가 완료된 상태이다.

이후 2011년 8월부터 2017년 1월까지 7차례에 걸쳐 성 내부에 대한 시굴·발굴조사를 하여 객사(客舍, 고려·조선 시대 각 고을에 둔 관사)와 동헌(東軒, 고을의 수령이 집무를 집행하던 건물) 건물 터를 포함한 70여 동의 건물지와 담장지, 우물, 연못, 배수로 등의 유구를 확인했다.

이번 조사는 성 외부에 대한 첫 번째 발굴조사로, 2008년과 2015년에 시행한 시굴조사에서 확인된 해자의 양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성 바깥쪽의 동쪽과 남쪽 부근에 대해서 올해 4월부터 조사를 진행했다.

▲ '강진 전라병영성 남문지 해자와 함정유구'.(사진=문화재청)

이 과정에서 동쪽과 남쪽 성벽을 따라 해자의 호안석축(호수나 하천 등의 벽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쌓은 돌벽)이 확인됐고, 남쪽 성벽 해자 바깥에서 함정유구가 확인됐다.

해자는 성벽 바깥쪽으로부터 약 11~17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만들어졌는데, 해자 양쪽 벽은 돌 자재를 사용하여 호안석축을 쌓았다.

해자 내부에서는 나막신, 목익(木杙, 침입을 막고자 세운 나무 말뚝) 등의 목제유물과 조선 초부터 후기에 해당하는 자기·도기·기와 조각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어 해자가 조선 시대 전 기간에 걸쳐 방어시설로 역할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남문 옹성(甕城) 중앙부 바깥쪽의 해자 북쪽에서는 교량시설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기둥의 흔적과 석렬이 확인되어 성의 출입시설과 관련된 것으로 판단된다.

함정유구는 남문 일원의 해자 바깥쪽에서 현재 64기가 확인되고 있다. 현재 발굴조사가 남문 서쪽 지역만 진행되어 앞으로 남문 동쪽 지역에서도 확인될 가능성이 크다.

현재까지 확인된 함정유구들은 평면 형태가 지름 3.5~4.9m에 이르는 원형으로, 위에서 아래로 가면서 좁아지는 형태이다.

잔존 깊이는 최대 2.5m이고, 바닥에서는 끝을 쪼갠 대나무를 뾰족하게 다듬어서 촘촘하게 꽂아놓은 죽창(竹槍)의 흔적들이 확인됐다.

함정유구는 해자 바깥쪽으로부터 약 6~8m 정도의 거리를 두고 해자와 나란하게 2~4열로 확인되어 해자와 함께 성곽을 방어하는 중요 수단으로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 '해자에서 나온 나막신'.(사진=문화재청)

특히, 이번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함정유구는 다산 정약용이 저술한 '민보의(民堡議)'에 등장하는 함마갱(陷馬坑)이라는 성곽 방어시설과 관련된 것으로 판단되어 더욱 주목된다.

또한, 국내에서 성곽 방어시설로는 대규모로 발굴된 최초의 사례로서 학술 가치가 크며, 앞으로 성곽유적 발굴조사에 있어서 조사의 새로운 기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발굴조사 성과는 오는 17일 오후 1시부터 발굴현장 설명회를 통해 공개되며, 더 자세한 내용은 (재)한울문화재연구원으로 문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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