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억불 탈진에 다시 500억불 목표
86년 흑자원년, 88년 후진국 졸업

박정희 대통령과 수출입국③
수출밖에 길이 없다
100억불 탈진에 다시 500억불 목표
86년 흑자원년, 88년 후진국 졸업

[신국환 국회의원(전 상공부장관)] 수출 100억 달러 대장정은 획기적인 기록이었지만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다. 상공부를 중심으로 한 정부와 수출지원 기관들이 거의 탈진상태를 맞았다. 수출업계도 지치고 피로했다.
사회도 수출 100억 달러 찬사를 끝낸 다음 “달라진 것이 뭣이냐”며 허탈한 분위기였다. 민관합동으로 총력을 쏟아 붓고 난 다음 잠시 무기력증에 빠진 꼴이었다.

▲ 박정희 대통령이 무역진흥확대회의 참석 후 전시품을 관람하고 있다.(1979년) <사진@국가기록원>
100억 달러 직후의 무기력증

오일쇼크를 극복하기 위해 중동으로 진출한 건설업체들의 오일달러가 국내로 들어오면서 국내 건설경기가 폭발했다. 부동산 투기도 극성이었다.
인플레 압력과 물가상승으로 주요 생필품의 공급부족 현상이 빚어졌다. 78년 125억 달러 목표를 달성하자면 전반적인 공급능력 확대가 불가피했다.
학계와 언론계 등으로부터 수출의 외형확대에 따른 비판이 일기 시작했다. 수출 제1주의 정책에 실속이 없다는 비판을 그냥 두고는 수출 촉진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박 대통령은 다시 채찍을 가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토록 했다. 100억 달러 다음에는 500억 달러 목표가 있지 않느냐는 뜻이다.

1978년 1월 27일 확대회의를 통해 상공부가 중단 없는 수출전진의 이정표를 보고했다. KDI가 마련한 경제전망을 인용하여 우리경제가 앞으로도 연평균 10%의 고성장으로 86년도 GDP 1천623억 달러, 91년도 3천498달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국민 1인당 소득은 76년 757달러에서 86년 3천857달러, 91년 7천731달러로 전망했다.
수출은 77년 100억 달러 이후 81년 200억 달러, 86년 500억 달러, 91년 1,000억 달러 목표를 제시했다. 이때쯤 외화보유고는 13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86년도 500억 달러 목표에 흡족하여 이를 구체화 시키도록 지시했다. 수출 500억 달러가 중진국으로 올라서는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수출 열의 식으면 안된다’

상공부는 500억 달러로 달려가는 수출진흥종합대책을 다시 마련했다. 100억 달러 작전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수출산업 시설투자촉진, 수출전략상품 집중개발, 플랜트 및 연불수출확대, 원자재 국산화 및 해외개발수입 촉진, 기술개발과 기능인력 양성 확대, 수입선 다변화 등등. 모든 부문의 개발촉진과 규모 확대 등이 골자였다.
박 대통령은 매월 확대회의를 조용히 지켜보다가 78년 8월 회의 때 수출신장세의 둔화가 정부와 업계의 수출에 대한 열의가 식었기 때문이라고 따끔하게 지적했다.

당시 정부 내에 “무리한 목표를 달성할 필요가 있느냐”는 반론이 있었고 언론으로부터 수출액을 올려봐야 소용이 없으니 가득률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박 대통령은 이 같은 비판을 적시하면서도 500억 달러에 이르기까지 수출 제1주의는 중단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이 자리에서 외무부장관에게는 수출목표 달성이 부진한 해외 공관장에게는 즉시 독려장을 발송하라고 지시했다. 다시 한 번 총력수출 체제로 돌입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논란 끝에 500억 달러 계획

상공부가 앞장서서 뛰어야만 했다. 최각규 상공부장관이 박충훈 무역협회장, 김봉재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장 등 경제단체장과 각 수출조합들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청와대 비서실에서도 별도로 수출유관기관들을 독려하며 수출 분위기를 높이고자 했다.
업계에서는 온갖 건의가 상공부로 집중됐다. 공급능력을 확대하자면 외화대부를 늘려야 설비투자를 촉진시킬 것이 아니냐고 아우성이었다. 재무부 출신인 최각규 장관이 재무부와 열심히 교섭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청와대가 나서서 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인 79년 1월 24일 첫 확대회의를 맞아 상공부가 500억 달러 수출진흥 계획을 보고했다. 이례적으로 최각규 장관이 직접 보고했다.
86년 수출 500억 달러를 달성하자면 수출산업시설을 현재 보다 3배나 증강시켜야 한다. 10대 전략산업을 중점 육성하는 것이 시급하다. 철강, 비철금속, 기계, 조선, 전자, 석유화학 등은 조기에 시설을 확장해야 하고 섬유는 세계 1위의 수출국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이 같은 요지의 최 장관 보고가 있은 다음 박 대통령은 선진국 시장에서의 과당경쟁을 지양토록 지시했다. 또 일부 경기과열을 우려하며 금융제도의 정책전환 필요성도 강조했다.

‘수출 때문에 물가 오른다’ 지탄

다시 수출총력에 불을 지피는데는 성공했지만 경제안정화 조치를 요구하는 건의가 끊이지 않았다. 증화학공업의 과잉투자를 우려하는 투자조정의 필요성도 제기되었다. 
79년 4월 확대회의에서 박 대통령이 다시 전면에 나서 독려했다. “일부 전문가들이 자꾸 수출 때문에 물가가 앙등한다고 주장하니 이것이 수출부진의 원인이 된다”고 지적했다.

박 대통령은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4월 13일에 이르러 끝내 경제 안정화 시책이 나오고 말았다. 투자사업조정위원회를 구성하여 발전설비 등 중복 과잉투자 부문을 조정키로 한 것이다. 이때 박 대통령은 농어촌 개발 투자마저 축소하려는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을 뿐 중화학 투자조정 방침은 막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경제안정화 시책이 뿌리를 내리기 전에 수출 총사령관이 비명에 가고 말았으니 박 대통령의 수출입국정책도 사실상 중단되는 비운을 맞았다.
1979년 10월 26일, 국변은 거대한 수출 추진력을 급속히 약화시켜 우리경제가 일시 마이너스 성장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경제단체 ‘자폭하고 싶은 심정’

그로부터 80년 7월까지는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이 중앙청 무역확대회의를 주재했지만 종전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정재석(丁渽錫) 상공부 장관이 경제단체장 간담회에서 나온 업계의 목소리를 잘 대변했다.
“무역업계의 대정부 건의에 대해 부처마다 냉담하다. 과도기를 맞아 긴축정책을 강행하니 기업이 시들어 가고 있다. 경제 4단체는 자폭하고 싶은 심정이다. 중소기업 휴폐업이 쏟아지고 있으니 정부가 산업계의 의견을 들어 경기 하강을 막아줘야 한다. 기업의 사기가 크게 떨어지고 근로 의욕도 감퇴하고 있다. 정부 관료와 기업 간에 불신풍조가 만연되어 정책건의가 반영되지 않는다. 기업윤리 확립을 지도하고 경제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국가발전의 의지와 합의가 와해되었다. 일본은 근대화 역사 100년이 넘어도 여전히 활기 넘치는데 우리는 15년 만에 식어가니 상공부가 앞장서서 이를 되살려야 한다. 경제현실과 안정화 시책의 상관관계를 잘 검토하여 안정이 다소 문제가 되더라도 수출경쟁력을 살려야 한다” 
이 같은 업계의 절박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당시 시국상황은 수출을 지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지 못했다. 그해 7월 정재석 장관이 퇴임하고 신병현(申秉鉉) 장관이 부임했다가 두 달 만에 경제부총리로 영전하고 후임으로 서석준(徐錫俊) 장관이 부임했지만 무역진흥확대회의는 중단되고 말았다.
상공부는 중화학공업 투자조정이라는 파동의 여파로 81년과 82년에는 수출진흥종합시책마저 작성할 겨를이 없었다. 수출 제1주의의 창시자가 사라진 넓은 공간 때문에 수출 무드는 급속히 냉각되고 조직력과 투지도 무너질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수출장애 즉각 철거 하시오

대통령이 주재하는 수출진흥확대회의는 최고 수출정책회의로서 독창적 한국형 모델이었다.
1962년에서 65년까지 33회는 국무총리가 주재했지만 79년 10월까지 총 177회 가운데 144회를 박 대통령이 주재했다. 박 대통령 주재 회의도 청와대 회의가 67회이고 나머지는 중앙청에서 대규모 확대회의로 열렸다.
회의 명칭도 초기에는 수출진흥위원회 회의로 시작하여 수출진흥청와대 확대회의, 무역진흥 확대회의로 개칭되었다. 이 회의를 통해 수출지원제도가 마련되고 독려방침이 시달됐으며 수출을 저해하는 요소는 즉각 퇴출조치 되었다.

1972년 5월 회의에서 홀치기 수출조합 여상원 이사장이 일본 고유 의상 원자재인 견직물 홀치기 특허를 특정인이 독점하여 농촌에서 수출을 할 수 없게 됐다고 보고했다.
즉각 박 대통령은 “여기 법무부장관 없소”라고 찾더니 “당장 조사하여 수출에 지장이 없도록 하시오”라고 지시했다.
조사결과 특허 출원인이 허위증명서로 특허권을 획득한 사실이 드러나 곧 구속되고 특허공무원 2명도 징계 되었다. 이때부터 특허심사관의 자격요건이 강화되고 심사과정에 관련업계 의견을 청취하는 합의심사제도가 채택됐다.
이처럼 확대회의가 수출촉진에는 크게 기여했지만 회의를 준비하고 보고했던 상공부 실무진들은 연중 하루도 편히 쉴 수 없었다. 그러니까 수출유공업체들 뿐만 아니라 수출을 계획하고 독려한 주무부터 실무진들의 보이지 않는 공적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매월 회의 분기별로 줄였으면…

수출입국의 구심력이던 수출확대회의의 주역은 박 대통령이었지만 회의를 준비하여 정책과제를 보고하고 대통령의 지시를 이끌어 내어 일사불란한 민관 총력체제를 추진한 것은 상공부의 역할이었다.
상공부는 일 년 내내 품목별 업종별 수출동향 분석과 현장 독려와 격려로 쉬는 날이 없었다. 고위직과 실무직을 막론하고 연중 전국 순회와 해외출장으로 수출부진 요인을 발굴하고 애로사항을 청취했다. 상역차관보는 대통령 앞에 브리핑하기 위해 대형 거울 앞에서 며칠씩 예행연습을 하기도 했다.
장관과 차관은 목표달성이 어려운 분야의 수출단체나 협동조합 대표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여 분발을 촉구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하루 저녁에 세 팀을 따로 초청하여 순회 독려했다. 이때 첫 모임에서 마신 술을 화장실에 가서 토해 내고 다음 약속으로 옮겨 또 술잔을 권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들 고위들 보다 더욱 죽을 지경이던 것은 온갖 절차와 자료준비에 한 점의 착오도 용납되지 않던 실무진들의 밤샘이었다. 통행금지가 엄격했던 시절 자료 준비하다 사무실에서 밤을 새워야 할 때도 많았다. 그래서 매월 확대회의를 분기별 1회씩으로 줄였으면 좋겠다고 소원했다. 그렇지만 입 밖에 내지도 못했고 설령 이를 건의했더라도 상부에서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상공부 관리들은 위아래 구분 없이 확대회의에 지쳐 코피를 흘렸지만 회의가 끝난 후 오찬회의에서 대통령이 상공부 애로를 치하하는 소리를 듣고는 속으로 승리의 함성을 울렸다. 실무진들은 대통령이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등의 주장과 고집을 꺾고 상공부 편을 들어준 것에 감격하여 승리 기분을 누렸던 것이다.

10·26 후 상공부와 업계 몰매

수출 총사령관이던 박 대통령은 144회의 확대회의를 주재하면서 개회에서 종료까지 한 번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불가피한 사정이 생겨도 대리 주재 시키는 법이 없이 회의 날짜를 변경하여 직접 주재했다. 그래서 상공부 관리들은 수출확대회의를 ‘박통회의’라는 은어로 불렀다.
박 대통령이 서거하자 상공부가 사면초가의 궁지로 몰렸다. 막강한 후견인이 사라지고 나니 관계부처는 물론 연구기관이나 유관기관 할 것 없이 상공부가 무리하게 500억 달러 계획을 밀어 붙이고 중화학 공업의 과잉 중복투자를 이끌어 냈다고 비난했다.

특정인을 거명하는 인신공격도 잦았다. 한창 건설 중인 공장이나 겨우 준공한 공장의 지원에 관해서는 모든 부처가 고개를 돌렸다. 상공부와 수출업계가 몰매를 맞았다. 상공부 장차관이 외부에서 임명되어 오자 상공부 관리들은 죄인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1980년 8월 국보위가 중화학공업 투자조정을 단행하자 종합기계공업, 발전설비, 자동차 등 대형 역점 사업이 쑥밭으로 변했다. 수출산업에 대한 투자는 극도로 위축되고 외채문제가 불거지면서 더 이상 수출은 입 밖에 끄집어내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박 대통령의 수출입국은 미완성으로 끝나려는 절박한 시각이었다.

다시 ‘수출밖에 길이 없다’

1981년 3월, 경제에 무식하다고 스스로 인정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확대회의를 주재하면서 “황무지에서 우리경제를 이만큼 일으켜 잘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은 기업인들의 노력이었다”면서 수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상공부는 “수출밖에 길이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지만 죄인 심정으로 말을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 대통령이 중화학공업 투자조정 와중에서도 수출의 필요성을 확인했던 것이다.

상공부는 80년도 수출종합대책으로 내실화를 앞세웠다. 수출상품의 부가가치를 제고하고 고가품 수출에 역점을 두며 수출산업체의 재무구조 개선도 추진키로 했다. 외형에 집착한 수출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여 내실위주의 수출을 촉진 시킨다는 정책을 반대할 명분이 없어졌다.
1986년의 3저 호황이 상공부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다. 수출이 다시 일어나고 있을 때 유가, 환율, 원자재 등 3대 요소가 수출호황을 가져다주어 무역수지가 흑자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상공부는 1986년 3월 첫 무역수지 흑자의 달을 ‘잊을 수 없는 달’로 기록했다. 한국무역협회는 그해 ‘무역수지 흑자원년의 탑’을 제작하여 전 대통령에게 증정했다. 꺼져가던 수출 불씨를 살려 준 고마움에 대한 업계의 감사의 뜻이었다.

▲ 辛國煥 국회의원(신국환 전 상공부장관)

이듬해인 87년 수출이 472억 달러를 넘어서고 88년 11월 14일 500억 달러를 돌파했다. 86년 아시안 게임과 88년 서울 올림픽이 성공하던 그해에 수출 500억 달러 달성으로 후진국을 졸업한 것이다.
박 대통령이 예언한 500억 달러의 분수령이 적중했다. 대한민국이 신흥공업국이자 중진국으로 분류된 시기였다.
2006년은 수출 3,000억 달러를 달성한 해이다. 산자부와 무역협회는 이를 기념하여 ‘수출 3천억 달러 달성 기념 국제 컨퍼런스’를 가졌다. 지금은 29년 전의 100억 달러, 18년 전의 500억 달러 의미를 실감하기 어려운 시절이다. 그렇지만 수출에 참여해온 70년대 사람들은 그때의 수출확대회의로부터 오늘의 3천억 달러 수출대국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확신한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91호(2007년 3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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