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월 사령관의 ‘베트남전쟁과 나’
해병대정신, 한국군 위상 명예높여

채명신 장군 회고록 속의
‘짜빈동 전투’ 신화
주월 사령관의 ‘베트남전쟁과 나’
해병대정신, 한국군 위상 명예높여
▲ 1967년 짜빈동 전투에서 주월한국군청룡부대가 작전을 수행중이다. <사진@국가기록원>

병대의 신화, ‘짜빈동(Tra Binh Dong) 전투’는 당시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蔡命新) 장군의 회고록, ‘베트남전쟁과 나’(2006.5, 팔복원)에 자세히 나온다. 해병대 영웅이야기와 보물선 나포작전 전과에 관해서도 기록했다.

해병대의 신화… 짜빈동 전투

당초 해병 청룡부대는 베트콩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정신으로 파월됐다. “검정색 파자마 같은 헐렁한 옷에 타이어를 잘라 만든 샌들을 신고 다니는 베트콩쯤이야 한 주먹으로 때려잡아도 힘이 남을 것 같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 판단이었다. 베트콩은 외세 침입에 저항하는 이념이 확고하고 정글전에 익숙하여 절대 깔볼 수 없는 조직이었다.

초기 청룡부대가 베트콩의 기습과 매복공격 피해를 입은 것이 이 때문이었다.
청룡부대 전술책임지역은 17도선 남방 280km 지점으로 월남군 1군단과 미 해병 상륙군지역 내에 위치했다. 청룡 제11중대는 여단본부로부터 6km 떨어진 짜빈동에 자체 방어체계를 갖춘 전술기지를 구축했다. 짜빈동 기지가 야간 공격을 받을 경우 외부의 증원부대나 재보급을 받기가 불가능한 지형이라 4주방어 체계를 갖췄다. 각종 탄약과 포탄 및 보급품 등도 48시간 이상 방어할 만큼 비축해 놓았다. 반면에 월맹군과 베트콩은 한국정부와 군 고위층이 청룡부대를 방문하기에 앞서 짜빈동의 청룡부대 전술기지를 궤멸시킬 계획이었다.

1967년 2월 14일 안개 속에 보슬비가 내리는 밤 10시경, 월맹군 2사단 예하 제1연대 2,000명과 베트콩 지방군 2개 대대가 인해전술로 접근해 오기 시작했다. 적 1개 소대 정찰대를 초병이 발견, 조명탄 조명 아래 강력 화망으로 격퇴할 수 있었다. 다음날 새벽 4시, 11중대 제3소대 지역으로 3개 대대규모가 침투하여 강력한 포 지원 아래 백병전을 벌이는 상황까지 악화됐다.

여단장 김연상 장군이 헬리콥터 편으로 병력을 지원하겠다고 했지만 중대장 정경진 대위가 거절했다. “지원부대 투입시간에 포 지원이 중지되면 적의 공격부대가 진지 내로 돌격해 올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제2 소대장 김성부 소위는 제3소대 진지 내 육박전을 보고 일부 병력을 지휘하여 적을 사살하고 부상병을 구출했다. 제1소대장 신원배 소위는 특공대를 인솔하여 중대 지휘소로 접근하는 적을 격퇴했다. 이어 정경진 중대장이 역습을 지휘하여 잔적을 모두 소탕하기에 이르렀다.

실로 기적에 가까운 신화였다. 중대병력으로 연대병력의 인해전술을 격퇴시킨 결과였다. 적 사살 246명 확인, 포격 등 사살 추정 60명, 포로 2명, 각종 무기·장비 등 다수 노획 전과를 기록했다. 반면에 아군도 전사 15명, 부상 33명의 피해를 입었다.

짜빈동 전투를 승리로 장식한 후 청룡 제11중대는 한·미 양국 대통령으로부터 부대표창을 받고 부대원들이 모두 1계급 특진됐다. 특히 제1소대장 신원배 소위는 군인 최고의 명예인 태극무공훈장과 미국 은성무공훈장을 받고 중대장 정경진 대위도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짜빈동 전투 후 미 해병 제3상륙 군단장 웰트 중장이 현장을 방문하여 청룡 제11중대장의 지휘능력은 우방군 전체의 귀감이 된다고 높이 찬양했다.

▲ 주월 한국군 청룡부대 장병의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해병대 영웅 지덕칠과 이인호

채명신 장군 회고록은 청룡부대 영웅에 관한 이야기도 자세히 소개했다.
해병대는 1965년 10월 9일, 중부 월남의 군항인 캄란만 상륙으로 시작되어 월남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베트콩 통치지역에 진지를 구축했다. 투이호아에서 해안을 따라 북상 160km 지점인 추라이 지역이었다. 이곳은 깊은 숲 곳곳에 촌락이 있고 촌락과 촌락 사이에 크고 작은 하천이 끼어 있어 자연장애물 역할을 했다.

청룡부대가 이곳 추라이에서 지역 평정작전인 비봉작전을 전개하자 월맹군 주력은 산악으로 숨어들고 소규모 게릴라 조직이 출몰하며 매복과 기습작전을 되풀이했다. 이 와중에 청룡 제1대대 2중대 3소대가 적 포위망에 갇혀 제1, 제2 분대장이 전사했다. 이에 위생하사관 지덕칠 하사가 자신도 적탄을 맞은 몸으로 제1분대장을 맡아 백병전을 지휘하여 적 10명을 사살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마지막에는 수류탄으로 자폭하고 말았다.
지덕칠 하사에게는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됐다.

또 동굴수색 작전을 지휘하던 이인호 대위는 적 동굴에서 날아오는 수류탄을 잡아 되던지고 두 번째 수류탄을 몸으로 막아 전우들을 살려내고 전사했다. 이 대위에게는 제2의 강재구 소령식 ‘살신성인’ 격으로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됐다. 또 고인의 아들도 해병대를 지원하여 중령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 중대장 정경진 대위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해병대의 보물선 나포작전 성공

1967년 7월 14일 해병대의 보물선 나포작전은 1개 연대규모 장비와 군수물자 노획 성공이었다. 당시 청룡부대는 미 해병 제3상륙군 사령부로부터 청룡 전술작전 책임구역인 바탄간 반도로부터 동남방 160km 해상에 군수물자를 만재한 적선이 접근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중국 해남도를 출항한 이 선박에는 각종 무기류와 탄약 및 보급물자가 실려 있는 것으로 추정됐다.

청룡 여단장 김연상 장군이 나포작전을 계획하고 정보참모 최칠호 중령에게 접안시각을 추정토록 지시한 결과 15일 새벽 2시경으로 판단됐다. 그로부터 선박이 접안지역으로 근접해 올 때까지 미 해병대와 계속 정보를 교환하다 포격을 가해 좌초시켰다.
한·미 해병대 포격으로 사키(Saky)강 어구에 좌초한 선박에 청룡 특공대가 승선, 노획작전을 벌였다. 각종 무기류와 군수품이 1개 연대규모에 달했다. 이 작전과정에 적 23명을 사살했다. 아군도 2명의 전사자 피해를 입었다.
이 보물선 노획물을 청룡부대 연병장에 전시하자 미 해병대와 월남군 지휘부가 참관하고 당시 티우 대통령이 방문하여 유공자들에게 훈장으로 포상했다.

▲ 짜빈동 전투 직후, 채명신한국군총사령관이 청룡3대대 11중대 짜빈동 전투유공자에 훈장을 수여하고 있다.(1968년). <사진@국가기록원>
참전역사 왜곡에 ‘피가 거꾸로 솟아…’
▲ 채명신 장군 집필 ‘ 베트남전쟁과 나’

채명신 장군은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으로 군사적인 성과와 국위를 선양했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2005년 11월 17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주관한 ‘베트남전 학술대회’에 참석했다가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가 치밀어 발표장소가 과연 대한민국 국방부가 맞느냐”며 ‘베트남전쟁과 나’ 회고록 집필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이날 학술대회에서 김진선, 한홍구 등의 주제발표는 “강대국(미국)이 약소국(베트남)을 침략한 전쟁에 한국군이 왜 말려들어야 하느냐”고 따져 물었다. 이에 대해 채 장군은 이는 “명백한 역사 왜곡이자 전 참전 전우들에 대한 모독”이라고 규정하고 이 회고록을 통해 “베트남전 참전은 부끄러움 없는 정당성과 당위성을 갖는다”고 말하며 이를 후대에 전하고 싶다는 심정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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