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미 프레이저 위원회 출석
박보희씨 4차례 증언으로 기세 꺾어

'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
그때 그 사람 생각난다
1978년, 미 프레이저 위원회 출석
박보희씨 4차례 증언으로 기세 꺾어
▲ 1978년 미 하원 국제관계소위원회에서 “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고 선언하는 박보희 위원장

론분열 갈등, 대결구도 속에 애국·호국정신이 절실하다. 젊은 세대 속에서 ‘이게 나라냐’는 조국에 대한 조소와 비하가 나온다니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북한 세습독재의 대남도발이 극성인데도 친북·종북에다 반미·반사드를 부르짖는 일부가 존재한다.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마저 시비를 걸고 태극기와 애국가마저 부정하는 세력이 있으니 도대체 무슨 나라가 이 모양인가.

괴로우나 즐거우나 애국심이 절실한 세월

[배병휴 회장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이톡뉴스)] 실로 애국심이 절실한 세월이다. 애국가 속의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대목이 너무나 간절하게 느껴온다. 아무리 자유 민주주의 체제이지만 조국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표시는 국민의 기본권이자 의무가 아닐까.
우리 조국 대한민국은 일제의 침략으로 망국(亡國)시절을 거쳐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독립을 쟁취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에는 김일성의 남침으로 죽다가 겨우 살아나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한 세계적 모범을 보여 줬다. 누구나 한국인이라면 마땅히 자부하고 자랑할 일이다. 그런데도 조국을 배반하며 친북·종북에다 반미·반사드 등으로 나라를 못살게 구는 행태를 사명(使命)이나 업(業)으로 삼는 패거리가 계속 준동한다는 말인가.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고 5.16과 같은 정치적 변혁도 겪었고 민주주의를 짓밟는 독재국가라는 비난도 받은 적이 있었다. 이 과정에 나라를 팔고 조국의 명예를 더럽힌 반역자나 배반자도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고 선언한 의지의 한국인 이야기를 다시 꺼내 보고 싶은 생각이다.
6.25 참전용사, 종교인, 언론인, 리틀엔젤스 창립인 등으로 널리 알려진 박보희(朴普熙) 회장 이야기다. 그의 이야기는 2000년 12월, ㈜홍익출판에 의해 ‘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전 3권)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코리아게이트’ 관련 반역자들 모습

1978년 미국 민주당 정권 전성기 때 하원 외교위 국제관계 소위에서 ‘박동선 게이트’, ‘코리아 게이트’를 다룰 때 일이다. 도날드 프레이저 위원장이 위세당당한 권위로 군림하며 한국정부의 대미공작 의혹을 파헤치기 위해 문선명 교주의 통일교가 KCIA의 검은 돈과 연계됐다는 혐의를 잡고 박보희씨를 증언대로 끌어냈던 것이다.
당시 프레이저의 한국정부 파괴 기도에 적극 협력한 2명의 반역자가 등장했다. 하나는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으로 그는 한 시절 ‘천하무적’의 권세를 누려놓고 미국으로 망명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멋대로 비난했다. 박 회장의 ‘나는 자랑스러운…’ 책에 따르면 그는 ‘자기 목숨을 건지기 위해 나라와 민족을 팔고 5.16 동지를 팔고 자기의 영혼까지도 팔아먹었다.

그는 프레이저가 자신을 독재정권의 마수에서 구원해 줄 구세주가 되어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또 한 사람의 배반자는 미국서 정치학 박사가 되고 영어가 능통하여 해외공보관장으로 임명된 김현재(가명)씨로 조국을 배반한 망명선언 후 프레이저에게 한국정부에 대한 사형을 구형하도록 증언한 꼴이다.
이럴 때 통일교 관련 박보희 회장이 증언석에 앉게 되자 신문, 방송 등 세계적 언론들이 금방 ‘프레이저 사자 밥’이 되고 말 것이라고 보도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박보희 증인은 프레이저의 ‘기고만장’ 앞에 전혀 위축됨이 없이 그의 일방적인 허위·날조 사실들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묵사발’로 만들고 말았으니 ‘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당당 승리였다.

▲ 1971.11 영국 왕실 어전공연을 마친 후 리틀엔젤스를 접견하는 엘리자베스 여왕
4차례 증언 통해 프레이저 ‘묵사발’

당시 박보희 회장이 무슨 마력으로 유아독존형 프레이저 위원장의 위세에 기절하지 않고 반론으로 완승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당당한 한국인의 자존심, 자부심의 선언이었을 것이다.
1978년 3월 22일, 박 회장의 제1차 증언날 국내외 거의 모든 언론이 ‘코리아 게이트’와 연루된 통일교 측의 굴복, 완패를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박보희 증인은 ‘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 ‘자랑스러운 통일교인’, ‘일생동안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선언했다. 이어 미국의 웨스트포인트와 유사한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생도 2기로 6.25에 참전하여 미군과 함께 공산군들과 싸워 이겼노라고 밝혔다.

모두가 예상할 수 없는 발언이었고 프레이저 위원장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버린 도발이나 다름없었다.
4월 11일, 제2차 증언은 더욱 치열했다. 박 회장이 “귀하는 마귀의 앞잡이 아니냐”고 공박함으로써 청문회장을 바짝 긴장 시켰다. 박 회장은 “하나님의 일(통일교)을 파괴하려는 자는 마귀 이외에 또 있겠느냐”고 공박하며 “무고한 사람들의 명예와 피값으로 또 다시 상원의원이 될 줄 아시느냐”고 따졌으니 장내 분위기를 알만하지 않는가.

이어서 4월 20일, 제3차 증언에서는 프레이저의 ‘문선명 목사 파괴’, ‘한미관계 파괴’ 작전 등이 북한의 공작활동과 연계된 ‘붉은 음모’가 아니냐고 폭로했다. 구체적으로 국무성 전 한국과장인 방한 활동가 “도날드 레이나드와 모종관계가 있지 않느냐”고 공박했다.
박 회장은 폴란드 공산당 정보장교로 미국에 망명한 쟈노스 코찬스키의 증언을 인용, 폭로했다. 그가 소련 KGB로부터 넘겨받은 자료에 따르면 프레이저 의원이 소련을 위해 일하는 ‘영향력 있는 에이전트’라는 사실을 폭로한 것이다. 
그 뒤 6월 20일의 마지막 제4차 증언에서는 아예 ‘나의 조국을 변호한다’고 선언한 후 “귀하의 ‘프레이저 주의’는 좌경판 ‘매카시즘’”이라고 직공했다. 박 회장은 “한국인들은 고생은 참아낼 수 있지만 굴욕은 결코 참아낼 수 없다”며 “귀하는 한국이 미국을 전복시킬 공작을 했다”고 낙인찍고 싶어 하지만 한·미 관계는 혈맹에다 미국은 ‘대한민국의 애인’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한국은 귀하의 파괴공작과 상관없이 번창일로를 걷고 있다”고 말하고 무자비한 수단으로 “정치적 야망을 달성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실제로 코리아 게이트 조사 이후 프레이저 의원은 미네소타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예상을 뒤엎고 낙선하여 8선의원의 정치적 운명을 종식시키고 말았다. 반면에 박보희 회장은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생환하여 계속 모국을 위한 봉사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 1994.1.27 박 위원장과 김일성
6.25 참전, 도미유학, 한국문화 전파 등

박보희 회장 회고록 성격의 ‘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에 그의 성장, 입대, 도미, 통일교, 프레이저 청문회 증언까지 실록이 기록되어 있다.
박보희는 1930년 충남 아산에서 출생, 천안농고를 나와 농군이 되려다가 초등학교 촉탁교사, 충남도 정교사로 교직을 천직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징집 소집영장이 나오자 육사 4년제 생도모집 공고에 응모했다가 1950년 6월 1일자로 육사에 입교하여 불과 25일 만에 6.25를 만났다.

당시 겨우 M1 소총 사격훈련을 거쳤을 뿐이지만 참전 첫날 86명이 전사하는 참변을 겪고 후퇴하여 부산 동래에 급히 개교한 육군종합학교의 8주 교육을 거쳐 육군소위로 임관했다. 당시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선이 위급할 때 박보희 소위 등 동기생들 다수가 육군 제9사단 창설요원으로 배치되어 ‘소모품 소대장’으로 전선에 배치됐다.
육군 9사단은 사단장 장도영 준장, 참모장 박정희 대령으로 창설되어 박 소위는 28연대 중대장으로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맞아 후퇴하는 도강작전 중에 수많은 병사들이 전사하는 참혹한 패전을 경험했다. 또 철의 삼각지대 백마고지 혈투에서 수많은 동료와 부하들이 전사하는 장면도 목격했다.

백마고지의 혈투에서 위관급 장교 가운데 생존자는 김운기 소위 한 명뿐으로 기억한다. 김 소위는 중대장으로 승진하여 백마고지를 14번 뺏기고 15번 탈환하는 신화를 기록했다고 한다.
당시 전쟁이 한창 중이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의 한국군 장교 현대화 교육 필요성에 공감하여 단기과정 미국 유학생을 파견했다. 박보희 중위는 연대장의 추천으로 영어 한마디 할 줄 모르면서 이 포트베닝 보병학교 단기교육생으로 선발됐다. 이때 인천부두에 ‘도미유학장교 환송’ 행사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하여 150명 전원과 일일이 악수하며 격려했다.

도미 유학 귀국 후에는 광주의 육군보병학교 교관을 거쳐 1955년 9월 두 번째 미 유학 후 미 군사고문단장 메츄스 장군의 전속 부관, 국방부 차관 보좌관,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 보좌관(1961~1964)을 거쳐 육군 중령으로 전역했다. 전역 후에는 통일교 관련 활동과 한미문화자유재단 총재, 리틀엔젤스 창설 회장, 워싱턴타임스 회장, 세계일보 사장 등 화려한 경력을 펼쳤다.
지난 2010년에는 유엔 6.25 참전 60주년 기념사업추진 위원장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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