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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패망 5년 구금투쟁] 이대용 장군 별세6.25 전투중대장, 압록강변 선착
사이공정부, 내부로부터 망국풍조
  • 배병휴 [이코노미톡뉴스 회장]
  • 승인 2017.12.05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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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패망 5년 구금투쟁
이대용 장군 별세
6.25 전투중대장, 압록강변 선착
사이공정부, 내부로부터 망국풍조
▲ 주월 이대용 공사 수기집 발간 자축 연회만찬 자리(@1981년). <사진@국가기록원>

6.25 때 전투 중대장으로 참전했고 월남 패망기 때 마지막 주월 공사로 두 개의 사선(死線)을 넘고 넘어 국가에 충성해온 이대용(李大鎔) 장군이 11월 14일 노환으로 별세하여 국립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고 이 장군은 황해도 금천에서 태어나 육사 7기로 임관되어 92세의 파란만장 일생을 마감하기까지 자유수호국민회의, 구국원로자문회의 활동으로 애국했다.

마지막 주월공사, 치화형무소 5년 구금

[배병휴 회장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이톡뉴스)] 이 장군은 6.25 북진 작전에 6사단 7연대 소속 전투 중대장으로 압록강변에 가장 빨리 선착하여 수통에 강물을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올린 일화를 남겼다. 또 장군으로 진급한 뒤에는 월남 티우 대통령과 미국 군사교육 동기생이란 인연을 앞세워 주월 대사관 공사로 부임 활약했다.

그러다가 사이공이 함락할 당시 한국대사가 미리 도피한 후 이 공사에게도 미군 헬기편으로 탈출할 기회가 있었지만 이를 거부하고 끝까지 교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잔류했다가 악명 높은 치화형무소에 수감되고 말았다. 당시 이 공사는 유엔에 등록된 외교관으로 각종 면책특권이 보장됐지만 공산 월맹측이 이를 인정치 않아 5년간이나 구금됐다.
이 장군이 포로형무소에 갇혀 온갖 회유와 협박을 받고 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모든 외교력을 동원하여 백방으로 구출작전을 벌이다가 10.26 후 최규하 대통령 시절에야 석방, 귀국했다. 귀국 당시 이 장군은 본래의 체중 78kg이 42kg의 앙상한 골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뒤 한참 세월이 지나 하노이 형무소에서 이 장군을 압박, 회유했던 즈엉 징톡 간수가 주한 베트남 대사로 부임하여 이대용 전 공사와 만나 화해하는 명장면을 보여 주었다.

▲ 압록강변에 태극기를 꽂고 기뻐하는 모습. 오른쪽 사진은 압록강의 물을 수통에 담는 국군병사… 수통속의 물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1950.10)
1950.10.26. ‘압록강변의 3일 꿈’

경제풍월 2010년 7월호가 이대용 중대장이 6.25 북진 중 한만국경에 최선봉으로 도착한 1950년 10월 26일 하오 2시의 기록을 ‘압록강변의 3일 꿈’으로 보도했다. (관련기사 : 압록강병의 3일 꿈 : http://www.economytalk.kr/news/articleView.html?idxno=15505)

파죽지세로 북진하던 국군 6사단 7연대 주력 선봉 중대 이대용 대위가 압록강변에 선착, 태극기를 휘날렸다. 피로한 장병들에게 휴식을 명하자 경계병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목욕하고 빨래도 했다. 일부 병사들이 소련제 수류탄으로 압록강 담수어를 잡아와 된장, 고추장으로 매운탕을 끓였다. 중대장 연락병이 어디서 낡은 축음기를 구해와 촛불 아래서 레코드판을 돌리니 ‘목포의 눈물’에서 ‘나그네 설움’까지 남인수, 이난영, 백년설 등이 다 나왔다.
첫 국경의 밤을 보내고 이튿날 아침 강가로 나가 맨손체조 한 후 강물에 세수했다. 이날 아침 밥상엔 압록강 물고기 외에 초산읍에서 실어온 쇠고기까지 오른 진수성찬이었다.

곧 전쟁이 끝나고 통일이 온다는 기대에 젖었다. 그러나 고작 사흘이었다. 그해 10월 28일 하오 초산읍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고 보니 7연대가 몽땅 중공군에게 포위됐다. 이로부터 부대는 산산조각으로 흩어져 죽음의 행진에 나섰다. 이대용 대위의 제1중대는 해발 1,994m의 승적산으로 파고들어 죽기살기로 포위망 돌파 작전을 벌여 무려 22회나 접전 끝에 우군진영으로 귀환했다.
생존 병력이라야 고작 20여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7연대에서 가장 많은 병력을 이끌고 귀환한 기록이었다. 뒷날 이때의 실전기록이 ‘김정일과의 악연 1809일’로 출간됐다.

북진 중 간호원 12명, 가수 고복수 구출
▲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 고복수

이보다 앞서 이대용 중대가 평양 대동강을 건너 순천으로 진격할 때 인민군들이 서울에서 납치해 온 적십자사 병원 간호원과 간호학생 12명을 구출했다. 간호원들은 블라우스와 스커트에 가죽구두를 신고 적십자 가방을 메고 있었지만 빨래도, 목욕도 못해 악취를 풍기고 보리알만한 이가 밖으로 기어 나오는 몰골이었다.

이대용 중대장이 나서 “제네바협정 따라 포로로 취급해줄 테니 안심하라”고 했지만 간호원들은 부들부들 떨었다. 다시 이 대위가 간호원들은 포로가 아닌 ‘납북 민간인의 구출’이라고 규정하고 후방길이 뚫리는 대로 후송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들 가운데 간호원 선임자가 제1대대 부대대장 조현묵(趙顯默) 소령의 약혼녀임이 밝혀져 대대장 김용배 중령에게 보고한 후 조 소령에게 넘겨주니 전선에서 약혼 남녀가 부둥켜안고 울먹이는 장면이 연출됐다.

이 대위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시각에 “키가 크고 비쩍 마른 포로를 돼지우리 속에 숨어 있는 것을 잡아왔다”고 보고해 왔다. 알고 보니 헌 양말, 찢어진 농구화에 광대뼈가 나온 포로가 ‘가수 고복수’라고 했다. 이 대위가 “고복수냐”고 물으니 죽어가는 목소리로 ‘예’라고 대답했다. 다시 “저의 자식놈도 21연대 위생병으로 복무하고 있으니 살려만 주십시오”라고 애원했다.

이 대위가 “부인 황금심씨는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모른다고 했다. 모두가 전쟁이 뒤집어씌운 죄였다. ‘가도 가도 사막의 길’을 부른 고복수의 인생유전(人生流轉)이 그대로 맞았다. 이 대위가 고복수씨에게 군용양말을 주고 캐러멜 등 먹을 것을 주도록 지시하여 대대로 후송시켜 납북 민간인으로 구출, 처리했다.
한편 구출 간호원들은 10명을 후송하고 1중대 취사를 돕고 있던 정정훈, 박태숙 간호원은 부대에 잔류시켰다. 경기도 파주시 임진면 출생인 정정훈씨는 키 165cm에 보조개가 귀여웠다. 박태숙씨는 만주에서 태어나 8.15 후 귀국하여 간호원이 됐다. 
한참 뒤 이 대위가 2사단 32연대 3대대장으로 승진하여 3박4일 휴가를 얻어 서울 적십자병원을 찾아가니 정정훈, 박태숙씨가 근무하고 있으면서 ‘생명의 은인’으로 환대했다. 그 뒤 장군이 되어 주월 공사로 부임하기까지 이대용 장군 가족은 적십자병원을 이용했다. (2010.7 경제풍월)

사이공정부, 내부로부터 망국풍조

이대용 장군이 경제풍월 애독자로서 2012년 6월 ‘월남 사이공정부 패망기’를 기고해 왔다. ‘내부로부터 망국(亡國)풍조’가 요지였다.
이대용 공사가 주월 대사관에 부임한 후 사이공정부 패망으로 치화형무소에서 5년간 혹독한 감옥생활 기록은 ‘6.25와 베트남전 두 개의 사선을 넘다’라는 수기로 출판됐다. 이 장군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월남 패망을 통해 본 한국의 안보대책’을 강조해 왔다.

한국과 월남은 다 같이 한문을 사용하고 이두(吏讀)문자를 만들어 사용한 점도 같다. 다만 한국은 한글을 창제했지만 월남은 자기 글을 만들지 못했다. 현 월남어는 프랑스어 알파벳으로 표기할 수 없는 발음은 글자 밑에 점을 찍어 문자화 했다.
과거제도를 만든 중국을 제외하면 과거로 관료를 선발한 문치국은 조선과 월남뿐이다. 또 중국대륙 주변국 가운데 민족이 소멸하지 않고 생존한 약소국은 한국과 월남뿐이다. 왕조의 수명은 조선 500년, 월남 110년이다.
양국은 중국의 지배권 안에 있다가 식민통치를 경험한 것도 같고 독립할 때 국토가 분단된 것도 같은 운명이었다. 북쪽의 공산정권, 남쪽의 자유민주주의도 같고 동족상잔의 전쟁경험, 식민잔재 청산논쟁, 정치세력 간 이합집산도 닮은꼴이다.

남월정부 패망후의 체험 교훈

이어 이 장군은 기고문에서 월남의 남북 분단역사, 남월의 제1공화국 탄생과 종말에 이어 미국 주도의 베트남전과 한국군 파병 과정, 파리평화협정과 내부의 정신적 무장해제를 비판적으로 기술했다. 이 장군은 파리평화협정 후 ‘평화 신기루’ 속에서 월남이 급속히 패망한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 후 적화통일 후 인권말살의 암흑시대를 교훈으로 기록했다.

1975년 5월 1일 밤 북월정권은 “인민학살을 일체 금지한다”고 방송한 후 남월 군인, 공무원, 정치인, 종교 지도자 등은 재교육을 위해 신고등록 하라고 공고했다. 신고자들은 필기구와 일용품을 갖고 운동장에 모였다가 트럭에 실려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다. 티우 대통령 타도에 앞장선 틱찌꽝 스님, 가톨릭 짠후탄 신부 등도 치화형무소 E동에 수감됐다. 데모에 앞장섰던 정치인과 대학생들도 속속 입감됐다.

수감생들은 하루 두 끼 공깃밥과 소금국으로 연명하며 어두운 감방에서 병들어 죽어갔다. 한국인 이상관(李相官)씨는 자전거 체인으로 얻어맞으며 비명을 질렀다. 수감자가 죽어 유가족에게 시신을 인계할 때도 항변 한 마디 못했다.
캄보디아 전 수상, 남월 전 수상, 전 부수상, 장관, 가톨릭 신부 후앙꾸고 등이 죽은 시체로 나갔다. 바다로 탈출한 106만명 가운데 11만명이 빠져 죽고 95만명이 외국 선박에 구조되어 망명했다.

▲ 이대용 장군의 ‘ 김정일과 악연 1809일’ 과 ‘ 6.25와 베트남전 두개의 사선을 넘다’

인권말살 12년이 지난 1986년 12월, 소련 고르바초프의 개방정책이 베트남 서기장을 경질시키고 ‘도이모이’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인권암흑기가 종식됐다. 
이대용 장군은 치화형무소를 거쳐 살아나온 소감으로 공산 측과의 평화협상이란 강할 때에만 유효하다는 결론이라고 강조했다. (경제풍월 2012.6월호) 

배병휴 [이코노미톡뉴스 회장]  econotalki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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