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군 화살머리 고지에 유해 안장

프랑스 참전용사 ‘쟝 르우’
6·25 격전지에 잠들다
철원군 화살머리 고지에 유해 안장
▲ 프랑스군 참전기념비의 UN군 프랑스 대대 휘장(徽章) 모습. '프랑스군 참전기념비'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1974년)다. <사진@국가기록원>

난 11월 2일 오전 강원도 철원군 5사단 내 프랑스 참전비에서 열린 6.25 한국전쟁 프랑스 참전용사 고 쟝 르우(Jean le Hou)씨의 안장식이 거행되었다. 지난 1951년 12월 19살의 나이에 유엔군 프랑스 대대 소속으로 6.25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쟝 르우씨는 2007년 한국 재방한 행사당시에 참전했던 ‘화살머리’ 고지 전투 장소를 둘러보고 ‘죽으면 유해를 이곳에 묻어 달라’는 뜻을 밝혔다. 그는 작년 12월 30일 84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고 유엔 프랑스대대의 한국전쟁 참전협회는 보훈처, 국방부 등과 협의를 거쳐 그의 유해를 한국으로 봉환해 안장하기로 했다.

6.25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영면하는 유엔군 프랑스대대 참전용사로서는 쟝 르우씨가 7번째지만 부산 유엔 기념공원이 아닌 DMZ에 묻히는 프랑스대대 참전용사는 쟝 르우씨가 처음이다.

프랑스군의 한국전참전 결정, 작전활동

[김무일 (파리1대학 국제정치학박사·(前)한전KDN(주)상임감사·(前)주 프랑스국방무관)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이톡뉴스)] 프랑스 정부는 1950년 7월 22일 한국전 참전을 결정하고 지원병 모집에 들어가 장병 1개 대대를 그해 11월 29일 부산에 도착시켰다. 유엔군 프랑스 대대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때는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눈부신 저항을 한 후 ‘세기의 도박’이라고 일컬어지는 인천상륙작전에 이어 압록강을 향해 북진하다가 중공군에 막혀 다시 서울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후퇴하던 시기였다.

그 당시 유엔군은 한국 겨울의 극심한 추위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의해 붕괴 일보직전의 상황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1951년 1월 말 중공군은 유엔군의 공군에 의해 전력이 약화되고 통신망 확장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렇듯 유엔군 프랑스 대대는 6·25전쟁이 격전 양상을 보인 1951년 1월 전선에 투입된 이래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 27일까지 가장 힘들고 어려운 전투를 계속했다. 프랑스 대대는 참전기간 중 3차례나 부대를 교체하며 한국에서 작전활동을 벌였다.

▲ 프랑수와 미테랑 프랑스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프랑스군 참전기념비 헌화를 하러 가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미 2사단 배속, 화살머리고지 전투참가

1952년 9월 중순께 미 제2사단 23연대는 사단지역 내에 있던 미 제9연대와 교대했다. 이때 미 제23연대에 배속되어있던 프랑스대대는 사단 우측경계선 지역방어를 맡고 있었다. 적은 프랑스 대대가 지키고 있는 이 화살머리고지(Arrohead : 철원북방 서북쪽 15km), 즉 281고지에 대한 공격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T-Bone이 속한 강원도 철원지역으로, T-Bone지역에서 동쪽으로 불과 몇 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다. 화살머리고지는 구릉으로서 부대배치의 핵심을 이루는 요지였다. 당시 프랑스군은 이 고지 전방에 전초기지들을 설치하고, 역곡천 건너편 창끝 모양을 한 만곡부에 주력군을 배치했다. 그 뾰족한 부분은 남서쪽에 위치한 대대의 심장부를 향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치형태 때문에 ‘화살머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프랑스 3개 중대는 방어선을 편성했는데, 제1중대는 역곡천의 물 흐름 때문에 다른 2개 중대로부터 고립됐다. 지원을 목적으로 최전방 지역에 배치된 제1중대는 북서정면에 전방초소를 설치했다.
중공군의 포병이 연합군의 저지선에 포격을 가하는 것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중공군의 공격목표는 281고지, 즉 화살머리고지와 한국군 제9사단 1개 대대가 배치된 백마고지와 연결되는 접점을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중공군은 10월 3일에 2백발, 10월 5일에 3백발의 포탄을 발사하며 공격해왔다. 그 피해는 심각해서 미군 관측장교가 전사하고, 제1중대장 리옹(Liron)중위가 크게 부상당했다. 중공군의 10월 6일 공격은 더욱 가열되었다.

중공군의 공격은 동이 트면서 시작됐다. 중공군은 5시간 동안 화살머리고지에 1천발의 포탄을 쏟아 부었다. 교통호, 철조망, 구릉의 정상과 계곡선, 급조된 도로의 교차로, 텐트의 무전안테나, 보급 트럭, 전차, 박격포의 포열 등 모든 것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수많은 부상자와 전사자가 발생했다. 중공군의 포격에 10월 6일 저녁 프랑스군이 전방초소를 포기하자, 중공군은 동쪽에 위치한 제2중대를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중공군 인해전술의 파도는 주요진지를 위협했다. 때는 저녁 8시에 불과했다. 4개의 포병대가 프랑스 대대를 지원하기 위해 시간당 6천발의 포탄을 발사했다. 프랑스 대대 소속 경전차 소대도 이날 밤 76.2미리 포 1천 2백발을 발사했다. 프랑스 대대 지원중대 또한 후퇴하지 않고 81밀리 박격포 8백발과 75밀리 포 1백50발을 발사했다. 프랑스 대대 좌측에 있던 23연대 제1대대 역시 지원사격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화력지원에도 불구하고 적군의 1차 돌격이 끝난 것은 밤9시께였다. 많은 중공군이 코앞에 까지 닥쳤으며 조금씩 방어선이 뚫리기 시작했다.

자정이 되기 전에 제1중대는 미군의 중무장한 1개 분대와 대대의 지휘관 및 행정병으로 편성된 1개 행군분대, 그리고 제2중대로부터 1개 분대를 지원받았다. 2대의 셔먼 경전차, 4.2인치 포 분대, 그리고 지원중대의 다른 1개분대가 뒤따라 왔다. 진지는 그때부터 드  세즈(de Seze)대대장에 의해 지휘되는 5백 명의 병력에 의해 유지됐다. 중공군은 또다시 두 차례나 제1중대와 제2중대 사이에 침투하려고 기습을 감행했다. 프랑스군, 한국군, 미군과 중공군은 한데 뒤섞여 폭발과 불꽃이 난무하는 속에서 목숨을 내던진 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새벽에 프랑스군 용사들은 그들의 방어선에서 나와 전우들의 시체를 찾고 부상자들을 구출했다.

그들은 또한 여러 명의 포로를 노획하였으며, 보급품과 무기들도 수거했다. 3천발의 박격포 사격이 비처럼 쏟아진 한국군 제2사단 지역을 제외하고 6일 밤부터 7일까지는 아주 조용했다. 이후 중공군의 공격은 한국군 제9사단 30연대가 지키고 있는 백마고지 정상에서 동쪽으로 조금씩 이동했다. 이 진지가 연합군에게 완전히 장악되기까지는 8일간의 치열한 전투가 필요했다. 프랑스 대대는 이번에도 수적으로 우세한 적군과 정면 대결해 게릴라 전투의 모범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10월 9일에 이르자 중공군의 패배가 확실해졌다. 중공군은 10월 10일 새벽에 프랑스군 진지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패배를 인정하는 신호였다. 초토화된 화살머리고지에서 프랑스병사들은 아군의 피해와 적 사상자를 확인했다. 진지의 북쪽 정사면과 공병대의 두 전초기지 사이에서 적 시체 6백구를 확인했다. 또 상당한 양의 물자와 야포, 기관총, 소총, 경기관총, 탄약 등을 노획했다. 

이렇듯 화살머리고지 전투는 프랑스 대대가 철원 서북방 281고지를 방어하며 중공군 제113사단 제338연대와 치른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10월 6일부터 9일까지 매일 야간에 치열한 공격 준비사격에 이어 대대·중대규모의 부대를 파상적으로 투입해 281고지를 공격했으나, 프랑스 대대는 지원화력의 엄호 하에 근접전투를 벌이며 진지를 고수했다. 같은 기간에 오른쪽에 인접한 백마고지에서도 한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과 격전을 벌였는데, 프랑스 대대는 많은 인명의 손실을 입으면서 이 고지를 끝까지 확보함으로써 중공군의 기세를 꺾을 수 있었으며, 백마고지 방어에도 크게 기여했다.

한편 전투가 끝난 후 대한민국 대통령은 프랑스군의 용감함을 높이치하 하며 부대표창장을 수여했으며, 며칠 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당선자도 한국 방문길에 프랑스 대대를 방문해 격려했다.

▲ 1959년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프랑스의 한국전쟁(6.25전쟁) 종군자 전국협회장과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전사 262명, 부상 1,008명등 피해

프랑스 대대는 참전 32개월 동안 모두 3개 대대 연인원 3,421명이 교대로 참전하였으며 전사 262명, 부상 1,008명, 실종 7명 등 1,289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하여 전체인원의 3분의 1이상이 희생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들은 백병전으로 원주를 탈환하는 전과를 올렸고, 지평리 전투와 단장의 능선, 피의 능선, 화살머리고지 등의 격전에서 용맹을 떨쳤다. 그 공로로 프랑스 국가표창 6회, 미국 대통령 표창3회,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 2회 등 많은 훈장과 수많은 개인표창 등을 수상함으로써 그들의 용맹함과 빛나는 전공을 방증(傍證)하였다.

프랑스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평화적인 협상’ 원칙을 중시했지만 한국전에는 유엔의 결의에 따라 적극 참전해 많은 인명피해를 입었다. 그들이 보여준 용감성과 자유수호 의지는 대한민국이 존립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으며, 나아가 자유세계를 결속시키는데 크게 공헌했다. 휴전 후 프랑스는 15명 규모의 연락장교단을 1965년까지 한국에 남겨주어 유엔의 평화활동을 지원하고. 제네바 정치회의 등 국제 정치무대에서 한국의 입장을 적극 지지함으로써 유엔군 프랑스 대대가 6·25한국 전쟁에서 흘린 피의 대가가 헛되지 않게 노력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 필자 김무일

프랑스는 참전당시 국내·외의 악조건과 일부 빗발치는 참전반대의 여론을 무릅쓰고  6·25한국 전쟁을 통해 한국과 우의를 두텁게 하였다. 한국은 프랑스 대대의 참전으로 프랑스의 강인한 국민성과 그들의 문화를 더욱 존중하고 프랑스를 새로이 인식하게 됨으로써 한국과 프랑스간의 새로운 협력시대의 장을 여는 계기를 얻게 되었다.

고 장 르우 씨 같이 죽어서라도 한국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는 수호천사가 되겠다고 옛 격전지로 되돌아와서 옛 전우들의 곁에 영면하는 분들과 모든 참전용사들의 고귀한 희생에 대하여 우리는 영원히 존경과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번영된 대한민국은 바로 이러한 모든 분들의 덕분으로 재건되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주인인 우리들은 참전용사들보다 더 높은 애국심과 투철한 국가관을 견지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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