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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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변에 선착한 당시의 감격을 떠올리는 이대용 장군>

[1950.10.26 하오2시]

압록강변의 3일 꿈

이대용 중대장, 한만 국경 최선봉 기록

태극기 휘날리며 통일 환희 감격 누려

1950년 10월 26일 하오 2시 15분.

북진하던 국군 7연대 선봉부대 중대장 이대용(李大鎔)대위는 압록강변에 선착하여 태극기를 휘날리며 통일이 다가왔다고 감격했다. 그때의 이대위가 나중에 주월 한국공사로 사이공이 함락될 때 혼자 남아 조국 대한민국의 명예를 지켜낸 이대용 장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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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변에 태극기를 꽂고 기뻐하는 모습. 오른쪽 사진은 압록강의 물을 수통에 담는 국군병사… 수통속의 물은 이
승만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1950.10)>

국경선의 밤의 ‘나그네 설움’

북진하던 국군부대 가운데 압록강변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꿈이었고 영광이었다. 강 건너 중국대륙을 쳐다보며 남북통일을 외칠 수 있었으니 6.25 남침을 격파하기 위해 참전한 용사들로서는 이보다 큰 보람이 있을 수 없었다. 이대위의 제1중대 장병들은 모처럼 압록강물에 목욕하고 빨래도 할 수 있었으니 오랜 전쟁의 때를 벗고 말끔해진 기분이었다.

경계병들을 제외한 나머지 병사들이 어느새 소련제 수류탄으로 압록강 담수어를 잡아왔다. 고깃국에 된장과 고추장 반찬까지 준비됐으니 오랜만에 잔칫상을 받았다. 중대장 연락병인 홍하사와 박하사가 압록강 뗏목다리 부근에서 낡은 축음기를 찾아왔다. 촛불을 밝히고 레코드판을 돌리니 ‘목포의 눈물’에서부터 ‘나그네의 설움’과 ‘애수의 소야곡’이 흘러나온다. 남인수, 이난영, 백년설, 고복수, 황금심, 박단아, 백란아 등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 노래가 전선의 밤을 울렸다.

온갖 설움과 환희가 한꺼번에 쏟아져 잠시 전쟁을 잊고 평화의 마을에 도착했노라고 착각할 지경이었다. 밤이 깊어지자 강 건너 중국 땅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대장 이대위는 지척에 중국 땅을 두고 있는 국경의 밤임을 깨달았다.

청천벽력… 7연대 중공군에 포위

이튿날 아침. 이대위는 강가로 나가 맨손체조로 피로한 몸을 풀고 맑은 강물에 세수를 하니 전쟁의 땟국이 말끔히 씻어졌다. 이제 평화가 왔으니 보초병을 제외하고는 모두 수영도 하고 휴식도 즐기도록 명령했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패주한 인민군들은 보이지 않았다. 저녁상에는 압록강 물고기 외에 초산읍에서 날라온 쇠고기까지 밥상에 오른 진수성찬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전쟁이 끝나고 통일이 온다고 생각하니 감격하고 또 감격할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불과 사흘이었다. 10월 28일 하오, 갑자기 초산읍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이 하달됐으니 놀라고 분통할 노릇이었다. 7연대가 몽땅 중공군에게 포위 됐으니 각자 게릴라전으로 탈출하라는 명령이니 이런 청천벽력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중공군 포로 한두명을 잡은 적이 있었지만 상급부대에서는 중공군의 참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더니 결국 당하고 만 것이 아닌가.

부대는 각자 흩어져 삶과 죽음의 행진으로 빠져들었다. 이대위의 제 1중대는 해발 1,994m의 승적산으로 파고들어 포위망을 뚫기 시작했다. 추위와 허기 속에 수시로 접전이 벌어지고 사상자가 발생했다. 무려 22차례나 중공군과 부딪쳐 돌파하거나 우회하며 끝내 우군진영으로 귀환하는데 성공했다.

겨우 장병 20명이 살아남았지만 그나마 7연대에서 가장 많은 부대원을 이끌고 가장 먼저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이토록 압록강변에서의 사흘간 평화와 통일의 꿈은 잔인하고 처절하게 산산조각이 났던 것이다. 이장군의 ‘김정일과의 악연 1809일’ 속에 들어있는 실전수기에 실려있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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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최고의 인기가수 고복수>

적십자병원 간호원 12명 구출

이보다 앞서 파죽지세로 북진하던 이대용 부대가 평양 대동강을 건너 순천으로 진격할 때 인민군이 서울에서 납치해 온 서울 적십자사 병원 간호원과 간호학생 12명을 만났다.

인민군들이 도주하며 그냥 남겨두어 오도가도 못한 간호원들을 병사들이 잡아 온 것이다. 간호원들은 블라우스와 스커트에 가죽구두를 신고 적십자 가방을 매고 있었지만 목욕 못하고 빨래도 못해 악취가 풍겼다. 보리알만한 이가 블라우스 밖으로까지 기어 다니는 몰골이었다.

권총에다 칼빈소총으로 이중 무장한 이대위가 나서서 “내가 중대장이다. 제네바 협정의 포로취급 규정에 따라 보호해 주겠다”고 선언했지만 간호원들은 부들부들 떨었다. 전선에서 여자포로들을 잡으면 구 일본군 출신 장병들이 위안부처럼 나눠가지고 논다는 소문을 들었던 모양이다. 이대위는 엄격한 군기가 곧 전투력이라는 신념으로 여성포로들의 철저한 신변안전을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간호원들은 포로가 아닌 납북 민간인의 구출이라고 규정하고 평양과 순천간의 길이 뚫리는 대로 후방으로 후송하겠다고 약속했다. 중대 보급 하사관 박래영 중사에게 지시하여 간호원들에게 주먹밥과 고추장 등 부식을 나눠줬다. 간호원 선임자가 제1대대 부대대장인 조현묵(趙顯默) 소령의 약혼녀임이 밝혀졌으니 참으로 기연(奇緣)이다. 즉시 대대장 김용배 중령에게 보고한 후 약혼녀를 조소령에게 넘겨주니 전선에서 약혼 남녀가 부둥켜안고 울먹이는 장면을 지켜 볼 수 있었다.

이대위는 순천 도립병원 옆 공공시설에 간호원들의 숙소를 지정해 주고 병사들에게 내일의 공격명령을 하달한 뒤 잠시 낮잠을 자려는데 키 크고 비쩍마른 포로 한명을 데리고 왔다. 병사들이 “돼지우리 속에 숨어있는 포로를 잡아왔다”고 보고했다.

인민군 부역 가수 고복수의 인생유전

광대뼈가 나온 허기진 얼굴에 오랫동안 이발을 못한 헝크러진 머리에다 헌 양말과 구겨진 농구화가 보기 딱할 지경이었다. 뜻밖에도 포로가 고복수라고 하니 믿어지지 않았다.

이대위가 “인기가수 고복수가 맞느냐”고 물으니 죽어가는 목소리로 “예”라고 대답하니 기가 막혔다. 다시 고복수가 “저의 아들놈도 21연대 위생병으로 복무하고 있습니다”라며 “살려주십시오”라고 애원했다. 인민군들에게 끌려 다니며 부역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쩔 수 없이 인민군의 선전요원 활동을 했음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대위가 “부인 황금심씨는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그도 모른다고 했다. 전쟁이 모든 사람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있었던 것이다. ‘가도가도 사막의 길’을 노래 부른 고복수의 ‘인생유전’(人生流轉)이 그대로 맞았다.

이대위는 연락병 하사에게 군용양말 한 켤레와 캐러멜 등 먹을 것을 주도록 지시한 후 대대를 통해 후송했으니 고복수씨도 포로가 아닌 납북 민간인 구출로 처리됐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 사이 간호원 구출사실이 상부로 보고되어 연대 정보주임 김중위가 스리쿼터를 몰고와 10명을 후송해 가면서 1중대 취사를 돕고 있던 정정훈, 박태숙 간호원은 남겨 두었다.

정정훈씨는 키 165cm에 보조개가 특징이었다. 경기도 파주시 임진면 출생으로 큰 오빠가 일본대학에 유학한 집안출신이었으니 명문가의 귀한 딸이었다. 박태숙씨는 만주에서 태어나 8.15후 귀국한 집안 딸로 재치가 뛰어나고 정의감이 넘치는 젊은 여성이었다. 두 간호원은 이대위의 엄중한 군기의 보호를 받으며 1중대원들과 함께 험악한 사선(死線)을 넘고 넘었다.

북진 중 김일성 승용차 노획

이대위 부대가 북진 중 청천강 도하지점에 이르니 인민군들이 남쪽에서 징발해 온 고급 승용차 22대가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주한 미국대사 모초의 관용차와 김일성의 전용차도 있었다.

김일성 승용차는 이 지역 출신인 제 2연대장 함병선 대령이 몰고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진상하고 무초대사 관용차는 6사단장 김종오 준장이 몰고가서 돌려주었다. 이 무렵의 이대위는 포로로 잡은 인민군 대위의 권총밴드에다 소련제 권총을 차고 소총까지 무장한 모습이었다. 이때 인민군 여자 의용대 40명을 잡고 보니 서울 풍문여중 3학년 박필수도 있었다. 적치하의 서울에서 인민군들이 얼마나 많은 시민들을 납치하고 부역에 동원했는가를 짐작하고도 남는 일이다.

이때부터 이대위 부대는 초산읍 6km지점에서 인민군과 격전을 치른 후 거침없이 북진하여 10월 26일 하오 압록강변에 가장 먼저 도착하여 평화로운 ‘국경선의 밤’을 보낼 수 있었지만 고작 3일 간의 꿈이었다는 이야기다.

9일간 중공군 포위망에서 22회 접전

중공군의 포위망 속에 갇힌 이대위 부대는 ‘독 안에 든 쥐’의 신세였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깊은 산악에서 중공군의 소탕작전을 이겨 낸다는 것은 가망이 없었다.

이대위 부대는 사상 처음 만난 중공군과 9일동안 13회의 교전을 벌였다. 그들을 우회하여 탈출한 작전도 9회였다. 도합 22회의 접전 끝에 1950년 11월 7일 기적처럼 살아서 우군부대로 귀환하고 보니 중대장병 21명과 정정훈, 박태숙 간호원 등 23명이 남아 있었다.

7연대 전체로는 부연대장과 대대장 2명이 희생되고 살아서 돌아온 중대장도 고작 9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중대장 가운데 5명은 민간인 복장으로 목숨만 살아왔으니 패잔병이나 다름없었다. 이같은 비참한 탈출 작전 때문에 이대위의 부대원 21명은 신임 6사단장 장도영 준장에게 특별 귀환 신고식을 갖고 특별 격려와 환영을 받을 수 있었다.

압록강변 국경의 밤에서부터 중공군 포위망 탈출까지 동참한 두 간호원은 김지용 상사 편에 서울까지 무사히 후송됐다. 이대위가 2사단 32연대 3대대장으로 승진하여 1952년 여름 3박 4일의 휴가를 얻어 서울 적십자 병원으로 정정훈, 박태숙 씨가 근무하는 금남(禁男)의 집을 방문하니 숙직의사와 간호사들이 ‘생명의 은인’이라며 환대했다. 이때부터 이중령 가족들은 적십자 병원 가족으로 분류되어 특별대우를 받았다. 이중령이 뒤에 월남공사로 부임하기까지 출산이나 건강검진 등 모두 적십자 병원을 이용했다.

황해도 금천에서 태어난 이장군은 올해로 여든 다섯의 노병이지만 이때 중공군 포위망에서 죽다가 살아온 투지가 뒷날 월맹 치화형무소의 생지옥 속에서도 5년간이나 살아남을 수 있었던 투혼으로 나타났을 것으로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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