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진오 기자 @이코노미톡뉴스] "나는 한명이라도 내 작품을 진정으로 알아봐준다면 당당히 걸어놓을 각오로 그림을 그렸지 주위의 시선에 영향 받지 않았다."

▲ '서울 종로구 인사동 선화랑에 설치된 작품과 함께한 이정지 작가'.(사진=왕진오 기자)

전시장에 걸린 대형 작품에 올라앉은 먼지를 먼지떨이개로 털어내며 관람객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작가 이정지(77)가 작업에 대해 토로한 심정이다.

외길 단색조회화 작업을 해 온 국내 유일무이한 여성작가이다. 최근 포스트 단색 추상화가로 주목받고 있는 그를 40년 역사의 선화랑이 자부심을 갖고 집중 조명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수십 년간 흔들림 없이 모노크롬(Monochrome) 작업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묵시적이고 관념적인 화풍을 이어온 작가 이정지의 80년대 단색조회화(單色調繪畵)를 중심으로 꾸려진 전시가 3월 14일부터 종로구 인사동 선화랑(대표 원혜경) 전관에서 펼쳐진다.

▲ 이정지, '●-88'. 218.2×290.9cm, Oil on Canvas, 1988.(사진=선화랑)

이정지 작가는 "내 작업은 자신의 신체성, 규율을 엄격히 적용하고 변주를 통해 화업을 지속하는 것 같다. 70년대 이후 지금까지 작업에만 몰두한 것 같죠. 단색화 작가들이 인기를 얻는다는데, 언젠가는 제 작품도 세상이 알아봐 주겠죠"라고 설명했다.

작가는 오랜 기간 화면의 깊이와 행위의 표현에서 오는 시각적 세계와 그 초월적 세계에 몰두해왔다. 정신과 물질, 표면과 내면,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 생성과 붕괴 등 서로 다른 세계를 통합 조율해 나가는 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단색조의 화면은 롤러(roller)를 통해 캔버스 전체에 물감을 바르고, 그 표면을 몸이 가는대로 나이프로 긁고 문질러서 완성된다.

▲ 이정지, '○-89'. 72.7×90.9cm, Oil on Canvas, 1989.(사진=선화랑)

이 작가는 긁고, 쓰고, 지우고, 깔고를 반복해 시간의 궤적을 쌓아올린다, 이 궤적은 작가가 의식적으로 숨겨 놓은 시간의 흔적으로 드러난다.

이정지 작가는 "박서보, 하종현, 서승원 등 단색화 작가들의 인기가 고공행진을 하며, 그림이 없어 못파는 상황에서 포스트 단색화로 이어지는 시장 상황에서 내 작품에 눈길을 돌리는 것에 놀랐다"며 "하지만 내 그림은 그들과 다른 길을 가자는 마음을 먹고 시작한 것이다. '창작'의 길을 가보자는 고집 때문에 지금까지 나만의 작품을 이어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 작가는 "1990년대 디지털회화라고 불리는 서양식 화풍의 파도에 갑자기 쓸려가 흔적조차 사라진 단색화와 모노크롬이 30여년이 지난 이제야 한국적 그림이라고 떠들고 있는 것에 만감이 교차한다"고 토로했다.

▲ '서울 종로구 인사동 선화랑 2층에 설치된 이정지 작가의 작품'.(사진=왕진오 기자)

여느 남성작가들도 하기 힘든 대형 작품을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 작가는 "초등학교 5-6년 시절 담임선생이 교실에 걸린 칠판에 글씨를 써보라는 제안에 시작한 글쓰기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서체 작업과 대형 캔버스가 익숙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40년 역사의 선화랑이 올해 가장 중요한 전시의 하나로 준비한 것으로, 1970년대 작가 중 여성작가로는 유일하게 꾸준한 작업을 진행하는 작가의 작업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대중적 인지도는 저평가됐지만 세상에 이런 좋은 작가도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과정의 일환으로 준비됐다.

▲ 이정지, '무제'. 117×91cm, Oil on Canvas, 1979.(사진=선화랑)

선화랑 1, 2, 3층 전관에 펼쳐진 작업들은 이정지의 80년대 단색조회화가 시작된 시점부터 83년 이후부터 확고해진 '반복행위'가 주를 이루는 신체성, 촉각적 특징이 두드러진 작업으로 화면 전체가 회갈색으로 표현된 작업과 1991년대 작품까지 망라됐다.

체질에 대한 문제를 작업으로 풀어내는 이정지 작가는 "나의 작업은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것이다. 마치 살아있는 그림을 그린다고 할 수 있다. 성냥갑 속에 성냥개비가 똑같지 않은 것처럼, 내 그림도 다 다르게 완성된다"며 "누리끼리하고 검으스름 한 색상이 보이는 것도 마치 수묵화처럼 물감이 스며 나오는 느낌이 강하게 나타난다. 내가 숨 쉬고 공유하는 것을 직설적인 화법으로 풀지는 않지만, 내 자신의 실체를 증명하기 위해 표현하고 있다"고 말했다.

▲ 이정지, '무제 1984-1'. 227×364cm, Oil on Canvas, 1984.(사진=선화랑)

작가는 긁고, 쓰고, 지우고, 깔고를 반복해 화면에 궤적을 만들고, 이 궤적은 작가가 의식적으로 숨겨 놓은 시간의 흔적으로 나타난다.

"60년 화업의 시간, 움츠려들지 않았다. 대중적으로 아직 친화적이지는 않지만 누군가 마음에 기록될 것이고, 안목이 있는 자에게는 내 그림이 제대로 각인 될 것이다."

얼굴 없는 작가로 불려온 화업 60년의 시간동안 주변인들부터 진정성 있게 그림을 그리며 그들과 대화는 하는 작가로 남는 것이 아티스트의 자존심이라고 말하는 작가의 깊은 호흡은 현재 진행형이다. 전시는 4월 14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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