괘씸죄 심정 이해 가지만 폭력 용서 안돼

판사에게 석궁 공격
어느 해직교수의 비극
괘씸죄 심정 이해 가지만 폭력 용서 안돼

[趙源林(조원림 CPA, P&L Korea 대표) @경제풍월] 화약과 총이 발명되기 전까지 살상 무기로서 상당한 위력을 떨쳤던 것이 석궁(Crossbow)이다. 일반적인 유효 사거리는 60~70 미터 정도 되며 고대 및 중세 전투에서는 상대방의 갑옷을 뚫을 수 있는 치명적 살상 무기였다.
석궁은 동양의 고대 중국에서 처음 사용된 무기가 아니었나 싶다. 멀리는 기원 전 2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500년에는 중국의 문헌에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 기네스 세계 기록에 의하면 기원 전 341년에는 석궁에 관한 확실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영국과 유럽에서 이 석궁의 살상 능력이 치명적이 되자, 1097년 로마 교황 우르반 2세는 석궁이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이라 하여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그 사용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영국 리차드 1세 왕과 리차드 왕(Lionheart)도 이 석궁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2007년 벽두의 비극적 사건

이제는 하나의 스포츠로서 알려진 이 석궁이 2007년 새해 초반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한 해직 대학교수가 자기 소송 사건의 판결에 불만을 품고 담당 판사를 석궁으로 살상을 시도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전직 대학교수, 판사, 석궁, 살인미수로 이어지는 만만치 않은 등장인물들과 사건의 특이성, 희귀성으로 어우러져 큰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이 사건의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도 판사가 담당 사건 때문에 피습을 받는 일은 드물게나 일어나는 일이다. 더욱이 이런 일이 한국 내에서는 전대미문이기 때문에 당사자인 사법부는 물론 일반 국민들도 큰 충격이다. “사법 체계를 흔드는 중대한 일이다”로부터 “오죽 답답하고 억울했으면 그랬을까”까지 여러 의견들이 있다. 

괘씸죄로 재임용 탈락 심정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 주장하는 이 사건의 직접적 원인은 지난 1995년 해당 대학교 수학 입시 문제의 오류를 공개 석상에서 지적한데 대한 괘씸죄라 한다. 
당시 젊은 나이의 조교수였던 김 모 교수는 채점위원의 입장에서 한 수학  입시문제의 오류를 발견하고 이를 학교 당국에 시정을 요구하자 학교 당국에서는 김 교수의 건의를 묵살하고, 그 대신 이듬해인 1996년 교수 재임용 절차에서 탈락을 시켰다는 주장이다. 
한편 해당 학교에서는 괘씸죄에 대한 재임용 거부가 아니고, 본인의 교수로서의 자질이 문제가 되어 재임용을 거부하였다는 주장이다.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진실이 있기는 있으되 수학적으로 빈틈없이 증명되지 않는게 인간관계 아닌가. 김 교수의 주장이 물증은 없지만 상당한 심증이 가는 것이 나만의 생각인가. 한국의 교수 사회에서는 젊은 교수가 선배 교수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상당한 각오가 필요하다. 
이 사건과 비슷한 일이 다른 대학교의 젊은 미술 교수에게서도 일어났다. 선배 교수의 친일 행적을 지적한 대가로 재임용 거부되어 교수 신분을 잃고 오랜 동안 학교 내에서 천막치고 농성을 하며 고생한 적이 있었다. 그나마 그는 소송에 이겨 학교에 복직이 되었다. 
이번 사건의 경우, 1995년도에 입시 문제의 오류를 지적하는 일이 일어난 후, 몇 해가 흐른 것도 아닌 바로 이듬해에 재임용 거부가 되었다면 이는 물증이 없지만 상당히 괘씸죄에 걸려들었구나 하는 심증은 충분히 간다. 이 점은 사법부도 충분히 알고 있었으리라 본다. 

사법부도 고민 했을듯

물증 없이 심증만으로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는 사법부의 고민이 여기 숨어 있을 것이다. 재판은 기본적으로 원고와 피고 중 누가 더 유리한 자료를 많이 내놓느냐에 성패가 갈린다. 제3자인 판사는 제출된 증거를 가지고 법에 따라 심리하는 것이 보통이다. 여기에 본인의 양심에 따라 일반적 경험칙이나 상식이 판단의 근거에 보태지기도 할 것이다. 
재판이란, 원고와 피고 중, 심판자인 판사를 누가 더 잘 속이느냐에 재판의 명암이 갈린다. 판사의 입장에서 보면, 원고와 피고에게 속지 않아야 제대로 된 판결을 할 수가 있다. 혹시 이번 판결에서 제출된 증거만을 다루느라 해당 대학교의 재량권 보다, 더 근본적인 점을 놓치지는 않았는지 되짚어 볼만한 일이다. 
해당 학교의 재량권을 보장해 주어야 하는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동시에 그 재량권이 해당 학교 내의 모든 교수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보편성을 상실한 채 괘씸죄에 걸린 특정인에게만 특정 시점에서 적용되었다면 아무리 적합한 재량권의 사용이라도 이는 바로 잡아 주어야만 한다. 괘씸죄로 인하여 갑자기 재량권을 사용했다면 이는 재량권 범위 내에 있더라도 재량권을 임의적으로 사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은 해당 교수의 법정에서의 태도가 소송의 진실을 파악하는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는지 한번 되새겨 봄직하다.
‘사랑과 자비’는 법의 세계에서는 정의와 공정, 약자에 대한 배려라는 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사법부는 먼저 이 귀한 옷을 입은 후에 법조문과 원고와 피고를 대하여야 한다. 그래야만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재판 당사자들이 수긍하게 될 것이다. 

진정 가치 있는 일로 여겼는가

나는 누가 옳고 그름을 논하고 싶지는 않다. 판결이 잘 되었다 잘못 되었다를 논하려는 것도 아니다. 의견이라는 것은 늘 보는 시각에 따라 그렇듯 이편과 저편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이 충격적인 사건을 일으킨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를 생각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우선 한국 내에서 벌어진 전대미문의 충격적인 이 사건의 근본 원인이 이 일을 저지른 김 교수가 주장하듯이 잘못된 판결에 경종을 울리고자 함이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진짜 원인은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을 벌인 해당 전직 교수의 폭력을 품은 마음에 있지 않을까.
그는 우리나라의 일류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유학을 다녀온 수재이다. 능력으로 보자면 그는 지금도 수재이다. 그의 부모에게 그는 가문을 빛낸 영광스런 아들이고, 가장의 입장에선 하늘과 같은 아버지이고 남편이 되며, 제자들의 눈에는 스승이 되고 학계에서 보면 재능 있고 용기 있는 수학자이다. 
그는 이런 중요한 자신의 위치와 역할과 명예를 폭력 하나와 맞바꾸어 버렸다. 이 모든 것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판사(사법부)를 살상할만한 가치가 있었던가? 어떠한 경우에도, 비록 자신이 아무리 억울한 입장에 있어도, 폭력은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난장판이 되어 버린다.
그는 사법부의 잘못된 판결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고자 이 일을 저질렀다고는 하지만, 폭력을 휘두르며 그런 일을 벌이는 것은 체계와 질서가 잡힌 지금의 세상에선 인정받지 못한다. 
간디가 존경을 받고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찬사를 받고 달라이 라마에게 칭송을 보내는 이유는 그들은 자신의 억울함을 어디까지나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해당 교수에게는 분명 억울함이 있었다. 그리고 입시 문제의 오류를 지적한 것도 옳았고 용기 있는 일이었다. 학교에서는 극구 아니라고 하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괘씸죄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김 교수에게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 오래 전부터 마음 깊은 곳에 폭력성과 공격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것이 이 사건의 근본적이고도 직접적 이유이다. 
그에게 묻고 싶다. 정말로 이런 역할을 포기하면서까지 가치 있는 일을 하였냐고. 이 일로 인한 당신 가족들의 고통과 충격을 생각해 보았냐고, 또 죽을 뻔한 판사와 그 가족을 생각해 보았냐고. 

궁색한 해명, 서툰 도전방식

또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 젊은 교수가 다소 서툰 방법으로 입시 문제의 오류를 공개적으로 지적했더라도 세계적으로도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진 해당 대학교에서는 넓은 아량으로 그 실수를 인정하고 젊은 교수의 의견에 귀 기울였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누구나 다 실수를 한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말이다. 더군다나 학문의 자유가 보장되고 토론이 자유스러워야 되는 대학교에서는 실수로 인하여 학문의 발전도 가능한 일이다. 조그만 실수를 제때 인정하지 않는 바람에 이 사건은 파장이 커질 대로 커져 이제는 국제 학계로부터 한국 학계가 아니 대한민국 자체가 톡톡히 망신과 창피를 당하고 있지 않은가? 
해당 학교에서는 절대 입시 문제 오류의 지적에 대한 보복이 아니고, 해당 교수의 자질 때문에 재임용 거부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을수록 어쩐지 궁색한 느낌이 든다. 
1995년도 입시 문제 오류 지적 이전에는 문제화 되지 않았던 그의 자질 문제가 그의 입시 문제 오류 지적이후 1996년 재임용 심사 시기까지 재임용에 걸림돌이 될 만한 갑자기 큰 사건이라도 있었는가? 
단순한 학문의 오류 지적을 혹시 선배 교수와 학교에 대한 도전이라고 확대 해석한 것은 아니었는가? 
정말 그의 교육적 자질이 진정한 재임용 거부 이유라면 이런 오해와 불상사를 낳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 두 해 더 기다려 준 후에 자질의 문제를 가지고 재임용 거부를 해야 옳지 않았을까? 길고 긴 아쉬움이 남는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90호(2007년 3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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