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승패 분수령
용문산전투 대승 67주년

6.25 전쟁 승패 분수령
용문산전투 대승 67주년
▲ 제66주년 용문산 대첩 전승행사. <사진@가평군>

[김무일 (파리1대학 국제정치학박사·(前)한전KDN(주)상임감사·(前)주 프랑스국방무관)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이톡뉴스)] 6.25전쟁의 승패(勝敗)를 가름하는 분수령(分水嶺)이 되었던 용문산 전투는 중공군이 춘계 2차 공세에 재한(在韓) 70만 명 중 80%의 병력을 투입하였던 전투였다. 

6.25전쟁 승패(勝敗)의 분수령(分水嶺)이 되었던 용문산 전투는 중부전선의 요충지인 용문산을 탈취하기 위해 중공군 63군단이 닷새(1951년 5월18~22일)에 걸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한 피아간의 치열한 공방전이었다.

국군 6사단 용맹분투 위용 기록

그러나 중공군은 아군 6사단의 용전분투와 항공․포병화력에 의해 치명적인 손실을 입고 21일 새벽 북으로 철수를 개시했다. 이로써 6사단은 용문산 전투의 대승이라는 기록을 세워 국군의 위용(威容)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전과를 보면 적 사살 1만7177명․포로 2183여 명․말 137마리․포 46문․기관총 54정․소총 851정을 노획했다. 한편 아군의 피해는 전사 107명․부상 494명․실종 33명이었다. 이어 24일부터 30일까지 계속 전개된 유엔군과 아군 6사단의 작전기간 중에 중공군은 10만 명의 병력과 주요 장비를 거의 상실하는 등 결정적 타격을 받아 마침내 공산군 측에서 휴전회담을 제의하기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용문산 전투는 한국전쟁 사상 최고의 전과를 올린 작전이었으며, 이보다 오히려 승패의 갈림길에서 적의 기도를 분쇄해 공세 이전 계기를 마련했다는 데 더 큰 의의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6사단의 용문산 전투는 용문산을 방어했다는 단순한 전술적 승리보다 전략적으로 중부전선에 형성될 수 있었던 적의 돌파력을 저지함으로써 전선의 절단을 막아 수도권에 미칠 위협을 미연에 방지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그 전승의 힘은 오직󰡐더 이상은 물러설 수 없다는 결사(決死)의 임전무퇴(臨戰無退) 정신󰡑에 의한 것이었다.

용문 전승비, 호국 결사․임전무퇴 정신

이와 같은 전사(戰史)에 길이 빛나는 용문산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전승비(戰勝碑)가 경기도 용문에 서 있다. 그 날의 빛나는 승리를 기리고 호국영령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한 이 전적비는 관련부대와 유관기관의 유기적 협조 하에 잘 관리되고 있으며, 호국의 안보역사 교육장으로도 활용되고 있어 무척이나 다행스럽다. 전국에 산재한 이러한 전적비․전승비들이 이곳처럼 잘 관리․활용되고 있는지 우리는 호국보훈의 달을 앞두고 다시 한 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조국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민족의 제단 위에 용감히 바친 많은 유․무명 영웅들과 의인(義人)들 앞에 우리는 경건한 마음과 감사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숙여야 한다. 우리가 생명의 안전과 자유를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 김무일 전 주프랑스 국방무관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나라와 겨레를 위해 공훈을 세웠거나 희생한 분들의 은공을 기리고 보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국가의 기본책무인 것이다. 또한 그분들의 큰 뜻을 마음속 깊이 숭상하고 애국정신의 귀감으로 삼아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우리의 의무요, 국민 된 도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문산전투의 대승 67주년을 맞이하여 호국영령들을 위로하고 추모하는 것으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섰던 조국의 위기를 오직 맨몸으로󰡐결사(決死)의 임전무퇴(臨戰無退)정신󰡑으로 극복한 호국영령들의 뜨거운 애국심과 거룩한 희생정신을 참 군인정신으로, 또한 전체국민정신으로 승화(昇華)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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