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속에 흐르는 한국인의 정서, 온전히 작품에 투영된 대리석 조각 선보여◆

△돈이 떨어지면 돌이라도 씹으며 작업 한다△

[왕진오 기자 @이코노미톡뉴스] 이탈리아를 출발한 대형 선박에서 내려진 수십 톤의 대형 대리석 조각을 싫은 대형 트럭들이 줄을 지어 도로를 질주한다.

▲ 서울 성동구 서울숲 갤러리아 포레 더페이지 갤러리에 설치된 대리석 작품과 함께한 박은선 작가.(사진=왕진오 기자)

육중한 무게의 돌조각들을 옮기기 위해 대형 크레인까지 동원되어, 마치 고층 빌딩 건설현장의 모습을 방불케 할 정도다.

이 작품들이 오랜 시간을 거쳐 자리를 찾은 곳은 바로 10개월 동안 리뉴얼 공사를 마치고 뮤지엄급의 전시공간을 꾸린 성수동의 더페이지 갤러리(대표 성지은) 전시장이다.

천장에 매달린 원통 모양의 대리석 조각은 중력을 거스르듯 위압감을 주고, 박은선(53) 작가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선보였던 기둥 모양의 다양한 조각품들이 전시장을 가득 채웠다.

지난 4월 아트부산이 열렸던 부산 벡스코 야외전시장 특별전을 통해 선보였던 조각의 모습과는 또 다른 힘을 드러낸 것이다.

▲ 박은선, 'Infinite Column - Accretion - Intension'. 441.5(h)× 41.6× 41.6cm, White Marble, 2018.(사진=더페이지 갤러리)

'숨 쉬는 돌의 시간'이란 타이틀로 5월 16일부터 6월 30일까지 성수동 더페이지 갤러리에서 진행되는 박은선 작가의 개인전에는 우리 알고 있던 조각가 박은선의 궤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구성으로 눈길을 모으고 있다.

박은선 작가의 작업은 '균열과 깨짐'으로 이뤄진다. 두 종류의 대리석 판을 반으로 쪼개 틈을 내어 번갈아 쌓아 올리고, 구상하는 형태를 만들 수 있는 덩어리와 높이가 되면 비로소 조각을 시작하는 과정을 통해 그의 이미지가 완성된다.

완성된 조각은 정교하고 균형 잡힌 기하학적 형태이지만, 서로 다른 색과 질감을 가진 대리석 때문에 시각적 효과가 두드러진다.

▲ 박은선, '숨 쉬는 돌의 시간' 설치 전경.(사진=더페이지 갤러리)

박은선 작가는 "열린 틈으로 돌에 숨통을 내는 것이라며, 처음 쪼개져 들어간 부분들이 위 아래로 이어져 숨 쉬는 조각을 완성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인간의 이중적 성격을 묘사한 작업입니다. 물론 저를 빗댄 것일 수도 있죠. 외국에 살며 힘든 시절 돌파구를 찾기 위해 온전한 대리석을 파괴하고 깨뜨리면서 저의 숨통을 열어놓은 것 같은 효과가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가 조각에 몰입하고 각광을 받게 된 이유는 작업 외에는 딱히 다른 것을 할 것이 없었다는 이유가 있었다. 1993년 이탈리아로 유학을 간 후 1997년 결혼 후 한국을 찾은 이후 다시 떠나야 할 때 수중에 돈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국내에서 활동을 도와준 박여숙화랑 대표에게 어렵게 300만 원을 빌려 이탈리아에 돌아온 박 작가에게는 작업 외에는 다른 일에 눈길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운명적으로 다가오게 된 계기다.

▲ '서울 성수동 더페이지 갤러리에 설치된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박은선 작가'.(사진=왕진오 기자)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가 거주하며, 작업했던 이탈리아 '피에트라산타(Pietrasanta)'는 세계적인 거장들인 살바도르 달리, 마리노마리니, 아르망, 후안 미로, 헨리 무어 등이 활동했던 무대로 현대와 전통이 공존하는 조각가의 성지와 같은 곳이다.

박 작가 또한 이곳에서 세계적인 조각가로의 도전을 멈추지 않고 25년 여 동안 작업하고 있다. 최고의 대리석 생산지 이태리 카라라의 돌산 박은선 작가가 영감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그는 거대한 석산에서 떨어져 나가는 대리석들을 보며 강인한 대지의 생명력을 느꼈다고 한다.

"돈이 떨어지면 돌이라도 씹으며, 작업한다."

박 작가는 "내 작업의 형태는 모두 내 안에 있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또한 한국적인 것을 입히려 노력하지 않았다"며 "다만 피 속에 흐르는 한국인의 정서가 작품에 그대로 투영된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또한 "내 인생의 모든 것을 표현해 내놓는 것이 바로 내 작업의 본질이다. 특히 대형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마다 현장을 답사하며 어떤 색과 어떤 형태의 작품이 어울릴지를 고민한다"며 "작품이 놓일 장소를 중요시 하는 작가로서 더페이지 갤러리도 수차례 방문해서 주변 환경과 어울릴 수 있는 작업을 설치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 '서울 성수동 갤러리포레 더페이지 갤러리 외부에 설치된 박은선 작가의 'Continuazione - Duplicazione'.(사진=왕진오 기자)

기하학적 추상을 통해 동양과 서양, 고전과 모던, 균형과 불균형, 통제와 자율성 등이 대립항의 공존을 표현하는 박은선의 작업은 유럽 미술계에서 서양 모더니즘의 추상 조각과는 차별화되는 '동양적 추상조각'이라는 평가로 주목 받아왔다.

"깨짐은 우연이지만, 쌓아올리는 것은 사전에 치밀한 계산에 의해 이뤄져"

색이 다른 두 개의 대리석 판을 켜켜이 쌓아 올리면서 원형, 사각형, 원반과 같은 조각의 외형을 마름질하고, 그 과정의 시간들을 겹쳐간다.

이는 미니멀리즘 조각의 과정과 유사하게 보이지만 실은 의례에 가까운 수행적 태도를 통해 작업의 정신적 가치와 회화적 존재감을 공감각적으로 구현해 내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 박은선, 'Condivisione' 설치 모습.(사진=더페이지 갤러리)

이번 전시는 작가가 10여년 만에 갖는 한국 전시이자, 수 년 만에 공개되는 신작들을 발표하는 자리이다. 특히 중력을 거스르는 설치를 통해 조형의 가능성과 공간과 조각의 상호적인 관계에 대해 깊이 고찰한 작가의 신작들이 세계 최초로 선보이게 된다.

박 작가는 "멀리 작업하고 싶네요. 내일도 작업을 하고 싶은 조각가 박은선이 되고 싶습니다. 수년 수십 년까지도 돌을 깨는 조각가로서의 삶을 살고 싶네요"라고 앞으로의 비전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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