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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권 칼럼] 미·북 정상회담 이후, 김정은의 선택 주목1991년 노태우 비핵화선언, 북은 NPT탈퇴
2005, ‘9.19 공동성명’ 이듬해 대포동발사
  • 최수권 전 세계문인협회 부이사장, 수필가
  • 승인 2018.06.18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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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 최초로 열린 미북 정상회담(@6.12 싱가포르)에 앞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서명을 마쳤다. <사진@방송화면 캡쳐>

[최수권 칼럼(전 세계문인협회 부이사장·수필가) @이코노미톡뉴스] 2018년 6월 12일 73세의 트럼프가 34세의 김정은을 만났다. 미·북 정상회담이다. 은둔자 김정일을 싱가포르에까지 오게 한 것은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트럼프의 능력이었다. 완벽한 비핵화(CVID), 핵폐기가 아니면 회담은 없다로 해서 모두가 기대를 걸었지만, 결과는 단계적 비핵화였다.

미국의 언론도, 한국의 언론도 우려의 시선과 혹독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런 유사한 합의를 알고 있어서였다. 미북은 여러 차례 비핵화를 위해 접촉했다.

1991년 노태우 비핵화선언, 북은 NPT탈퇴

1980년대 말 북핵시설 사진이 공개되면서 북핵문제가 거론됐다.

1991년 1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은 비핵화를 선언했고, 12월엔 남북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했다. 그러나 한반도의 비핵화 선언은 오래가지 못했다. 1993년 북한은 핵을 보유하지 않는 나라가 새로 핵무기를 가지는 것을 금지한 핵확산금지조항(NPT) 탈퇴를 선언했고, 1994년 6월에는 국제원자력기구(NPT) 탈퇴를 선언했다. 국제사회에 북핵 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북한은 ‘서울 불바다’ 발언을 할 정도로 한반도를 둘러싼 위기는 극에 달했다. 1994년 전쟁위기까지 치닫기도 했다. 서울에서는 생필품 사재기의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고, 미·북 고위급 회담이 이루어졌으며, 그해 10월 미국은 북핵시설 동결과 경수로 지원 등을 골자로 하는 미·북 제네바합의서를 체결했다. -당시 한반도는 전쟁의 공포에 휩쓸렸고, 실제 북한은 남한 공격을 위해 모든 포문을 벙커에서 개방시켰다. 미국은 이의 실제 상황을 인공위성으로 촬영했고, 우리의 작전계획은 비상시 1:1로 공격을 가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있다.- 제네바 합의가 이뤄진 10년만인 2003년 북한은 제네바 합의를 공식파기 했고, 북한은 파키스탄 등지에서 우라늄 농축용 원심 분리기를 비롯한 각종 장비를 몰래 들여왔다.

1998년 8월 장거리 미사일인 대포동 1호를 쏘아 올렸다. 2002년에는 고농축 우라늄 핵개발을 시인하기도 했다.

2005, ‘9.19 공동성명’ 이듬해 대포동발사

2001년 9.11테러를 겪은 미국의 조지부시 대통령은 2002년 북한을 향해 “악의 축” 이라고 비난했다. 북한은 2003년 NPT를 탈퇴했다. 북한이 원자로를 재가동하자 국제사회가 움직였다. 2003년 북·미·중에 이어, 한·일·러가 참여하여 6자회담이 개최됐다.

네 차례의 6자회담 끝에 2005년 북한은 핵무기를 포기하고, 그 대가로 안전을 보장 받았다, 그리고 9.19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한반도의 검증 가능한 비핵화에 따른 합의는 북한에 중유제공, 대북송전 무상 제공, 경수로 무상제공 등의 지원이었다. 9.19 공동 성명은 오래가지 못했다. 미국이 마카오에 예치된 북한 자금에 대해 동결조치를 취하면서 정세가 변했다.

북한은 이듬해인 2006년 7월 미국 독립기념일에 대포동 2호를 발사했다. 이어 10월 최초 핵실험을 강행하면서 한반도 비핵화 선언 합의서를 무효화 했다.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는 대북제제를 채택하며 국제사회가 북한을 압박했다. 국제사회는 북한을 압박하면서도 협상을 지속했다. 2007년에는 9.19 공동성명의 구체적인 이행계획서인 2.13합의와 10.3합의를 마련했다. 북한에 에너지 공급을 재개했고, 방코텔타아시아은행(마카오) 예치금을 전액 수령했다.

북한은 2.13 합의를 이행할 것임을 천명했고, 2008년 북핵 문제의 상징인 연변 원자로 냉각탑을 폭파했다. 미국은 대북한 테러 지원국 지정해제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1년짜리에 불과했다.

2009년 4월 장거리 미사일 시험 발사 이어 5월에는 제2차 핵실험을 강행해 합의는 사실상 파기됐다.

미국과 북한의 네 번째 합의는 김정은 시대에 이루어졌다.

김정은 집권 직후인 2012년 2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미·북 고위급 회담에서 미국의 지원 대가로 북한은 장거리 미사일 발사와 우라늄 농축활동을 중단한다는 내용으로 “2.29 합의”를 이루어냈다. 미국의 대북지원에는 식량지원도 포함돼 있었다.

이 합의도 오래가지 못했다.

북한은 두 달 뒤인 2012년 4월 동창리 미사일 발사장에서 은하수 3호를 발사했다. 서해상에 추락하여 실패했다.

북한은 광명성3호인 인공위성이 탑재됐다고 했지만, 국제사회는 유엔 안보리 위반이라며 대북제제안을 통과시켰다. 미 국무부는 “2.29일 합의는 북한 위성 발사도 포함된다.”고 했다.

2013년 북한은 제3차 핵실험을 하는 등 2018년 이전까지 핵병진 노선, 미사일 시험발사를 실행하고 있으며, 이에 국제사회는 북한에 대한 제제를 강화하며, 평행선을 이어갔다. (NAVER 인용)

 

지금도, 미국내 ‘북핵보유용’ 가설 부상

북한이 왜 그렇게 핵보유에 집착할까?

세계는 하나의 자본주의 체제다. 어떤 나라가 그 체제에 들어가 달러 경제 혜택을 누릴지는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결정한다. 6.25 전쟁이후 북한은 여러 차례 미국에 세계 체계로 가는 티켓을 요구했지만, 미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북한은 미국이 외면 할 수 없는 카드를 찾아 들었다. 바로 핵개발이다. 이런 논리로 한때 풍미했다가 사실상 폐기 되는 듯 했던 “북핵대화용” 가설은 12일 북미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앞두고 화려하게 부상했다.

북한의 핵개발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미국의 인정을 받기위한 수단이었다. 미국이 북한에 세계체계로 입장하는 티켓을 발급한다면 핵은 그 사명을 다하고 폐기될 예정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학자들도 있다.-

미·북 공동 합의문이 완전한 비핵화를 명시 했지만 미국 내에서는 “북핵보유용” 가설이 다시 비상하고 있다.

“돼지가 하늘을 날면 모를까(Not until Pigs fly) 북한 비핵화는 불가능하다며” 북한이 2005년 9.19 공동성명을 이행할 가능성이 없다고 말했던 로버트 조지프(전 미국 국무부 비확산 담당 차관) 발언이 다시 회자되고 있다.

▲ 최수권(전 세계문인협회 부이사장, 수필가)

이시대의 환경은 경제를 우선한 안보이지, 낡고 진부한 체제유지를 위한 안보의 틀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세계의 경제 체계에서 국제사회에서 영영 사라지거나 낙오하고 말 것이다. 김정은이 깨어있고, 국제적인 감각이 있다면, 개혁 사회주의로 성공한 중국, 베트남, 싱가포르식의 정치와 경제 개발 모델을 꿈꾸지 않을까 선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 푸르고 싱그러운 6월, 이 아름다운 산하에 6.25전쟁의 비극이 있었다. 잊혀진 전쟁 말이다.”

“자유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이 땅에서 미군 3만5천명이 희생되었고, 수십만 명이 불구가 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미국의 신세를 졌다.”

전쟁피해-남한 160만명(민간, 군)피해/북한 350만명 피해

최수권 전 세계문인협회 부이사장, 수필가  econotalki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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