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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톡-오늘은] '6.25 한국전쟁' 68주년, 준비된 전쟁 '남침 명령서'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전면 남침 개시
  • 배만섭 이코노미톡뉴스 기자
  • 승인 2018.06.25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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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철교를 따라 한강을 건너는 북한군(1950). <사진@국가기록원>

6월이 호국·보훈의 달이 된 가장 큰 이유는 6.25 한국전쟁 때문이다.

[배만섭 기자 @이코노미톡뉴스] 이코노미톡뉴스가 68주년 6.25 한국전쟁을 맞아 당시 11일간의 기록을 훑어 보았다.

이미 '준비된' 남침 전쟁

6.25 한국전쟁에 대하여 과거 김일성은 '남조선 해방전쟁'이라고 불렀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미완성 통일전쟁'이라고 일컫었다. 해방전쟁이라고 외쳤던 김일성은 아들 김정일에게 권력을 세습했다.

6.25 전쟁이 남침전쟁이었음은 미국 워싱톤 미국정부 문서보관소에 있는 '남침 명령서' 원본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원본은 한국전쟁연구소 유관종(劉官鍾) 소장이 제시한 것으로, 해당 남침 명령서는 1950년 9월 21일 북한 제13사단 참모장 이학구(李學九) 총좌가 왜관지구 전투에서 체포됐을 때 노획된 것이다. 남친 명령서는 한글과 로어로 적혀있다.

복사본은 1951년 5월 2일, 미국 유엔대표 월렌. R. 오스틴이 각국 대표에서 뿌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북 제13사단 참모장 이학구(李學九)가 휴대한 남침명령서.

남침 명령서에 따르면, 

① 1950년 6월 18일. 북 최고사령부가 인민군 제4사단장에게 하달한 정찰 명령서 제 1호와 ② 인민군 제4사단장 이권무(李權武)가 예하 연대장에게 하달한 전투명령서 제1호로 참모장 허몽학이 부서해 놨다.

전투명령서 제1호는 1950년 6월 22일. 02시 제4 보병사단 본부가 작성한 것으로 요지는 아군 공격정면에는 적 7보병사단(한국군)이 방어하고 있다. 사단은 군단공격의 정면에서 가장 중요한 방향인 관동, 아장동 전선을 돌파. 점령하고 최후로는 의정부 방향을 지향한다는 내용이다.

예하 연대별 공격목표를 제시하고 돌격준비 시기. 종심전투시기. 항공대의 임무, 기본신호 등 돌격작전 관련 명령내용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이 같은 공격 명령서가 전장에서 노획되어 만천하에 공개됐는데도 김일성은 줄곧 “리승만 괴뢰군이 해주, 금천, 철원 등을 132km까지 침입하여 부득이 남쪽으로 진격을 개시했다”고 발언을 했던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남침암호 '폭풍'이 북한 전군에 하달되면서 전면 남침이 개시되었다.

김일성은 남반부 지하 남로당원 50만 명이 봉기하여 2주일이면 부산까지 점령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1,2,3,4,5,6,12사단, 제105전차여단 등이  11개 지점에서 국경을 넘어왔다.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이 북한 지상군 4~5만 명이 전차 94대를 끌고 남침했다고 발표했다.

소련제 T-34 탱크가 전선을 무너뜨리고 내려와 국군의 유무선 통신망이 파괴되고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개성, 문산 및 동두천, 포천을 거쳐 의정부와 서울까지 침투했다.

6.25 남침은 국국 청년장교들에 의해 사전정보가 탐색됐지만, 국군 최고 수뇌부는 이때까지도 전세 파악이 안되었다. 신성모 국방과 채 참모총장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의정부 전선에서 역습이 성공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적 2개 사단과 탱크 2개 대대 앞에 보병 4개 대대로 역습을 명령했으니 쓸데없는 소모전이었다.

6.25 상오 10시 쯤, 채병덕, 김홍일, 이응준, 송호성 장군 및 재야의 이범석, 이청천, 김석원 장군 등이 긴급 전략회의를 가졌지만 채 총장은 북진론을 강조했으나 일선 지휘관들이 적 탱크를 막을 수단이 없다고 긴급보고하자 “수류탄으로 까부시라”고 독전명령만 하달했다. 이무렵 이승만 대통령은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에 전화로 "한국을 구해주시오"라고 호소하면서 무기원조를 요청했다. 

한편, 유엔한국위원회는 북한 측에 전쟁 중지를 요구했다. 유엔아보리는 특별회의를 개최해 전투 중지와 북한군의 38도선 철수를 결정,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미국이 요구한 정전요구결의안을 09시에 채택했다. 그 사이 트루먼 대통령은 38선 이남 지역에 한해 미해군과 미공군의 작전을 승인했다.

6월 27일, 수도가 대전으로 이전했고, 유엔한국위원회는 일본 도쿄로 이전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6.25전쟁이 남침이라고 성명을 발표했고, 미 국무부는 맥아더 원수를 한국작전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튿날 새벽 3시에 이 대통령은 경무대를 떠나갔는데도 초저녁에는 대통령이 녹음방송으로 "유엔이 우리를 돕기로 했으니 조금만 참으면 적을 격퇴할 수 있으므로 시민들은 안심하시오”라고 했다.

▲ 파괴된 서울역 부근 모습(1950년). <사진@국가기록원>
북한군 서울진입, 한강교 조기 폭파
@6월 28일

6월 28일 자정을 넘어 인민군 탱크들이 미아리와 종암동으로 진격하였고, 채 총장은 한강 이남으로 물러나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교 폭파를 명령했다. 남아 있던 6개 사단 병력과 150만 명의 서울시민이 한강 이북에 갇혔다.

채 총장은 해임되고 정일권 소장이 지휘권을 잡았다. 채 소장은 경남 하동 전선에서 의문의 전사로 일생을 마감했다. 한강표 조기폭파의 책임으로 최창식 대령은 9월 21일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훗날 최 대령의 명예는 법적으로 회복되었다.

우연의 일치일까. 6.25 직전에 5~6월 위기설이 파다할 때 채병덕 총장은 6개 사단장을 이동하고 중화기와 차량 등을 정비 명목으로 후송명령을 내렸다. 홍천에 주둔한 8연대를 서울로 교대시키고 서울에 있는 제 3, 8, 18연대는 1개 대대씩 집단 휴가를 보내기까지 했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6월 28일, 김일성 연설을 통해 "우리의 조국수도 서울을 해방했다"고 선언하고, 이어 "조속한 남반부 통일을 위해 시민들은 인민군에게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미해방지구 인민들은 빨치산 활동으로 적후방을 교란시키고 인민폭동으로 적의 군수물자 수송을 방해하라"고 명령했다.

"상관의 철수 명령때까지 사수하겠습니다"
"무기와 탄약을 주십시오"

6월 29일, 맥아더 원수가 전용기를 타고 수원비행장에 도착해 한강방어선까지 직행해 시찰했다. 맥아더 장군은 김종갑 대령의 통역하에 한강 방어진지 속 병사와 대화한 기록이 유명한 일화로 남았다.

맥 장군은 병사에게 "자네는 언제까지 호속에서 싸울 것인가"라고 묻자, 병사는 "상관의 철수명령이 있을 때까지 사수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다시 "자네의 소원이 뭔가"라는 질문에 "무기와 탄약을 주십시오"라고 응답하니 맥  장군이 즉석에서 도쿄로 돌아가자마자 지원병과 탄약을 보내 주겠다고 약속했다. 

▲ 미국 스미스부대 부산에 첫 상륙한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실제로 맥 장군은 이날 병사와의 약속을 지켰다.7월 1일, 미 지상군 선발대가 부산에 도착했다. 중공군 부대는 이미 압록강 연안에 집결 중이었다.  7월 2일, 국군 공군이 미군으로부터 F51전투기를 최초로 인수받았다. 같은 날 인민군 주도의 인민재판 제1호가 서울 을지로에서 열렸다. 당시 검사였던 영락연판소 직공 노동운(남로당원)과 판사였던 서울 옵셋 공원인 이영기는 서울수복 후 무기징역의 중벌을 받았다.

한강 도하장비가 없었던 인민군 제 1,3,5,6사단, 105전차사단은 한강 철교를 보수하여 전차대가 도하해 영등포로 진격했다. 7월 3일, 한강 방어선이 6일만에 무너지고 인민군은 인천과 수원을 점령했다. 중공군 20만 명이 프랑스·인도 국경으로 이동중이었다.

전쟁 10여일 만인 7월 5일, 미 24사단 선발대인 스미스 대대가 오산에 도착했지만 낯선 산악전선에서 참패할 수 밖에 없었고 딘 소장의 미 24사단도 대전 전투를 계기로 붕괴됐다.

▲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 1950년 10월 26일 압록강 초산에 도달한 6사단 7연대 한 병사가 압록강물을 수통에 담는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 1953년 7월 27일 휴전회담장 밖의 휴전협정 취재보도진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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