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 92세 인생, 다정다감 43년 정치
국립묘지 마다하고 고향산천 유택

박정희와 함께 ‘파란만장’
정치虛業, 笑而不答(소이부답)
JP 92세 인생, 다정다감 43년 정치
국립묘지 마다하고 고향산천 유택
▲ 박정희 공화당 총재가 김종필 국무총리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1971년). <사진@국가기록원>

정(雲庭) 김종필(金鍾泌)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92세 노환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5.16 혁명의 기획․연출가, 살아 있는 대한민국 현대사에다 내각제를 정치신념으로 YS와 3당합당, DJ와 DJP연합으로 대통령 당선을 도와주고 자신은 만년 2인자로 정치인생을 마감했다.

5.16 혁명정치, 3김정치 마침표

[배병휴 회장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이톡뉴스)] 운정의 정치인생 43년은 혁명가 박정희(朴正熙)와 함께 ‘파란만장’에다 굽이굽이 ‘우여곡절’이 겹친 풍운의 일생이었다. 고인은 ‘국민적 애칭’처럼 JP로 불리면서 집권당의 의장, 총재, 국무총리 두 차례, 국회의원 9선(選)의 화려한 경륜이지만 박정희가 떠난 후의 3김시대마저 끝내 2인자로 조연에 그친 셈이다.

JP가 본래 무인이나 혁명가의 소양을 타고났는지는 모르지만 재능의 폭이 너무 넓어 정상의 도전에 실패하지 않았느냐는 관측이 있다. JP는 학창시절의 각종 스포츠 취미와 특기로부터 글, 그림, 문학, 음악, 예술에다 패션, 종교, 철학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꿈을 탐험하는 종합예술 연출가형으로 대통령이 될 수 없었다는 해석이다.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가 2016년 2월 중앙일보 특별취재팀에 의해 출간됐다. (1, 2권 960쪽) 이 책에서 JP는 “회고록 대신에 소이부답(笑而不答) 증언기록사를 남긴다”는 심정을 밝혔다. 이어 ‘정치는 허업’(虛業)이라고 정의했다. 정치란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 봉사, 희생하고 나면 끝이라는 말이다. 행여 경영에 투신했다면 주식지분을 보유한 채 매년 배당금을 받을 수 있겠지만 정치은퇴는 퇴직금이나 배당금을 받는 법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국립묘지 마다하고 부여 고향산천으로

정부는 JP의 국가공헌 등을 고려하여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JP는 전직 총리로서 국립현충원에 묻힐 법적자격이 있지만 미리부터 고향 부여에 유택을 준비하여 먼저 간 부인 박영옥(박정희 조카딸) 옆에 잠들겠다고 유언했다. 이에 따라 27일 가족장 후 화장되어 고향산천으로 돌아간다.

JP는 지난 2015년 3월 손수 묘비문을 작성한바 있다.

“사무사(思無邪)를 인생의 도리로 삼고 무항산이 무항심(無恒産而 無恒心)을 치국의 근본 삼아 국태민안(國泰民安) 구현에 헌신했다”고 적었다. 이어 “나이 90에 이르러 생각해 보니(年九十而知), 지난 89세까지가 헛된 인생(八十九非)이라 수다(數多)한 물음에도 소이부답(笑而不答)이다.

내조의 덕을 베풀어 준 영세반려(永世伴侶)와 함께 이곳에 누웠노라”

박정희의 인간적 향기 추억, 그리움

JP에게 박정희는 초급장교 시절 육본 정보국에서 처음 만난 ‘조그만 하고 새카만 분’이다. 그는 술 좋아하고 과묵했지만 가슴 속엔 늘 항변으로 꽉 찬 분이기도 했다. 또한 사범학교 출신으로 또박또박, 꾹꾹 눌러 쓴 육필 편지글이 특징이라고 회고된다.

JP가 쓴 5.16 혁명 공약에도 박정희에 대한 배려와 존경이 담겨 있다.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1의로 삼아…”라는 대목이 한때 남로당에 연루된 박정희의 전력을 덮어주려는 배려였다. 이어 “절망과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라는 문장 속에 구국과 조국근대화의 열정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JP는 늘 박정희가 근엄한 표정으로 웃음을 잃은 듯 보이지만 그의 미소가 천하일품 아니냐고 회상한다. 또한 그의 내면세계에는 감성, 유머, 상상력이 넘친다고 들려준다. 이런저런 이유로 끝까지 2인자로 끝났지만 그의 인간적 향기를 추억하고 그리워한다고 고백했다.

박정권 2인자 오너반열에 고뇌, 번민 교차

JP는 충남 부여생으로 일제 강점기 국립 공주중학을 졸업하고 대전사범 1년 과정을 수료, 교사자격증을 취득했다. 이때 교생 실습 나갔다가 일인 교장에게 주먹을 휘둘러 헌병대 영창에 구금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벽촌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아 퍽 고생이 심했다고 회상했다.

JP는 8.15 직후 서울대 사범대학에 진학, 3년을 중퇴하고 정부수립 직전에 국군 사병으로 입대했지만 탈영과 재입대 끝에 육사 8기로 임관되어 직업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임관 초 엘리트 장교로 육본 정보국 북한반에 근무하며 6.25 남침정보를 분석, 보고했지만 상부에서 이를 묵살하여 분통했다.

그 뒤 북진전투에 참가하고 미육군 보병학교 단기유학을 거쳐 6사단 수색중대장으로 중공군 10명을 생포한 전공도 세웠다. 소령 진급 후에는 육본 정보과장을 맡고 중령 때는 정군(整軍)운동을 주도하다 하극상 사건으로 예편되어 5.16 혁명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5.16 설계 기획자로서 JP는 중앙정보부를 창설, 초대 부장을 맡고 공화당 창당 사전조직, 한일국교 정상화 등으로 정국을 주도했지만 곧 내부의 반발로 1963년 두 차례에 걸쳐 ‘자의반, 타의반’ 외유를 겪었다. 얼마 뒤 귀국, 공화당 의장으로 복귀했지만 다시 국민복지회 사건으로 1968년에는 정계은퇴를 성명했다. 또 1969년에는 3선 개헌을 반대하다 박정희의 설득으로 고집을 꺾고 국무총리직을 맡아 유신정국까지 박 정권 2인자 지위를 누렸다.

그러니까 JP의 5.16 후 박 정권의 오너 반열에 속해 화려하게 군림한 모양새지만 속으로는 늘 2인자로서 고뇌와 번민이 교차했노라고 짐작된다.

3당합당, DJP연합 후 3김시대 빈손마감

JP는 10.26 국변 이후 신군부 하에 또 한번 굴곡을 겪었다.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 46일간 구금 끝에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낙인 찍혔다.

최규하 대통령이 어떤 연고로 사임하고 박충훈 총리가 권한대행을 맡고 있을 때 노태우 보안사령관이 전화로 만나자길래 보안사 안가로 나갔더니 “선배님,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 일인데 못할 짓을 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사과했다.

이때 JP는 “이것도 도도히 흘러가는 시대의 역사라면…”이라는 전제 아래 “1인자는 반드시 2인자를 견제하려는 속성이니 꼭 1인자를 넘보지 말고 참고 견디라”는 조언을 남기고 왔다. 나중에 노태우 대통령 시절, JP가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YS와 함께 3당합당하여 YS가 대통령 꿈을 성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YS가 5.18 소급입법을 통해 전두환, 노태우를 구속 처단하자 YS와 결별하고 자민련을 창당했다. 이때 JP는 다시 DJ와 연합으로 그의 집권을 뒷받침해 주었지만 노무현 후계자에게 밀려 3김시대의 맨손으로 정계를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JP의 43년 정치인생 최종 메시지가 ‘굳이 할 말 없이 웃고 만다’는 뜻의 ‘소이부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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