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화령장 지구 통쾌한 승전보
피난수도 요지경, 김두한 주먹세례

김일성의 독전도 무위
다부동 혈전 대구 사수
음성, 화령장 지구 통쾌한 승전보
피난수도 요지경, 김두한 주먹세례
▲ 다부동 전투에 참가한 전경대원들이 잠시 쉬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민군의 T-34 탱크 앞에 서울 방어망은 속수무책이었지만 7월초 음성과 화령장 지구에서 6·25 후 통쾌한 승전보가 날아왔다. 춘천에 있던 국군 6사단은 인민군 제2사단의 연대병력을 섬멸한 후 홍천에서 적 7사단을 저지하다가 7월1일 충주로 철수, 전력을 정비하고 있었다.

음성, 화령장서 6·25 첫 승전

[배병휴 회장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이톡뉴스)] 인민군 7사단은 원주, 제천으로 남하하고 1사단은 이천, 여주, 충주 방면, 15사단은 장호원을 거쳐 음성으로 밀려 왔다. 이때 국군 7연대(중령 임부택)는 음성 기름고개에 배치되어 있다가 적 15사단(박성철 소장, 뒤에 부수상 역임) 정찰중대를 일거에 타격, 본대의 남진을 저지시켰다. 또한 7연대 2대대는 무극리와 동낙리 중간 고지를 점령하여 적이 올때마다 격퇴했다.

7월8일, 고지에서 관측하니 적 48연대가 남하하다가 동낙리 초등학교 교정에 집결하고 있었다. 아군 대대는 병력손실로 겨우 400여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은밀하게 접근하여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기습, 전멸 시켰으니 6·25 개전 이래 첫 승리였다.

전투후 전과를 확인하니 사살 800여명, 포로 90명에 차량 60대 등 각종 장비와 무기류도 엄청났다. 이 전투승리로 이승만 대통령이 연대장 이하 전 장병을 1계급씩 특진시켜 줬다.

다시 국군 수도사단 17연대가 보은에 집결했다가 상주로 진출하기 위해 화령장에 접근하자 노인이 적 정보를 귀뜸해 주고 자전거 타고 오던 적 연락병을 생포하여 문서를 분석하니 적의 주력이 곧 상주로 진격할 참이었다. 적은 하오 6시경 1개 대대가 금곡리에서 소를 잡아 회식하고 일부는 저수지에서 목욕하는 여유를 보였다.

연대는 식사시간을 기다렸다가 기습하여 30여분간의 사격으로 적을 섬멸했다. 적 시체 200여구에 군관급 포로 10명을 잡고 각종 무기도 노획했으니 화령장 전승이었다. 다음날 새벽 국군 매복조에 적 1개 대대가 걸려 역시 궤멸됐다. 인민군 48연대(김치구 대좌)는 총 한방 제대로 쏘지 못하고 전멸함으로써 인민군 편제에서 삭제되고 말았다 반면에 국군 연대 장병들은 1계급 특진 포상을 받았다.

T-34 위력에 눌려 미군 기겁

이 무렵 미군의 참전소식은 국군의 사기를 높였지만 오산, 대전지구 첫 전투에서 참패했다. 스미드 중령의 21연대 1대대가 오산 북쪽 죽미령 고개에서 적 탱크에게 75미리 무반동총과 2.36인치 로켓포로 조준 포격했지만 끄덕 없었다.

인민군 제4사단 2개 연대가 포위공격으로 압박해오자 미군은 중화기를 버리고 후퇴했다. 이날 서전에서 미군은 180명이 전사했다. 적은 4사단 부사단장 김동수 총좌가 전차 안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안성에 배치된 미 34연대 2대 대대는 명령도 없이 천안으로 후퇴했다. 연대장 마틴 대령은 2.36인치 로켓포로 적 탱크를 포격하다 전사했으니 한국전 참전 14시간만의 미군 고급 지휘관의 희생이었다. 당시 미군의 M-24탱크가 인민군의 T-34에 적수가 되지 못하자 전투경험이 없는 미군 병사들이 무질서하게 후퇴하고 말았다.

미 24사단장 딘 소장은 금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대전방어를 서둘었지만 적의 포위공격에서 통신이 두절되었다. 부관 1명을 데리고 금방 공수해 온 3.5인치 로켓포반을 지휘하다가 후퇴했다. 딘 소장은 지프편으로 옥천으로 가려던 것이 금산으로 잘못 접어들어 적의 공격을 피해 산으로 피신했다. 8월25일, 단신으로 진안군 상전면 운산리 원송 부락을 찾았다가 좌익계의 밀고로 포로가 됐다. 1953년 9월 포로교환때 딘 장군이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귀환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곳 전투에서 미군은 1,150명의 전사자와 수많은 장비를 잃었다.

진동리 전투서 미군 첫 승리

김일성이 7월20일, 충북 수안보의 전선사령부를 방문하여 8월15일까지는 부산까지 점령하라고 김책 사령관에게 독려했다. 인민군은 영동, 김천, 대구, 부산을 주공선으로 설정, 공격준비를 서둘렀다.

이 무렵 국군은 경북 함창에서 2군단(유재흥 장군)을 창설하여 수도 군단을 합쳐 5개 사단으로 재편성했다. 유엔군은 24사단에 이어 제1기갑사단이 포항으로 상륙하고 25사단이 부산에 도착하여 3개 사단으로 증강됐다.

▲ 미 제5해병대가 탱크와 함께 낙동강에 진군중이다. <사진@국가기록원>

한미군 8개 사단에 비해 인민군은 10개 사단규모로 역시 병력의 우위를 지켰다. 8월 들어 본격화된 낙동강 방어전은 1진1퇴의 혈전이었다. 미8군 워크사령관이 진지사수를 명령하여 김일성의 8·15까지 부산점령 명령과 맞섰다.

이때 미군 최초의 승리를 25사단 27연대 마이켈리스 중령이 이룩했다. 미 27연대는 진동리 지구에서 적 6사단의 기습을 잘 극복하여 적차량 20여대를 파괴하고 400여명을 사살했다. 이 전투로 마이켈리스 중령은 대령으로 승진했으며 나중에는 육군대장으로 전역했다.

이와 별도로 미 해병대는 진동리에서 사천에 이르는 전선에서 공군과 협조하여 적병 4,500여명을 사살, 인민군 6사단을 거의 궤멸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이때부터 한국 산악전에 서툴었던 미군의 전투력이 강화될 수 있었다.

백병전으로 지켜낸 다부동 혈전

낙동강 방어전의 결전은 국군 1사단의 다부동 전투, 8사단의 영천 전투, 3사단과 학도병의 포항지구 전투에서 승기를 잡았다. 미군 24사단과 2사단 및 미해병대는 창령과 영산지구 전투에서 적의 기세를 꺽어 내렸다.

다부동 전투의 국군 1사단(백선엽)은 적 3개 사단과 맞섰다. 이때는 3.5인치 로켓포가 보급되어 인민군의 T-34에 대한 공포를 얼마큼 이겨냈다. 국군은 미공군 B-29 편대의 융단폭격 엄호를 받았지만 백병전이나 다름없는 사투였다. 해발 300m 고지 하나를 탈환하고 후퇴하기 9회를 거듭했다.

장병들의 희생은 늘고 보충은 거의 되지 않았다. 소대장은 중·상사들이 맡고 분대장은 학도병이 맡은 경우가 많았다. 학도병들은 M1소총 조작이나 수류탄 투척에도 서툴러 고참들이 가르치며 싸워야만 했다. 인민군들도 후방선이 길어지자 보급물자 수송이 늦고 전투병이 모자라 남한에서 동원한 의용군들을 앞장 세웠다. 그들도 전투의 초보들로 희생이 많았다. 다부동 전투에서 적 사살 1만2,500여명, 포로 98명 외에 수많은 무기와 장비들을 노획했다.

다부동 전투를 회고하는 노병들은 지게를 짊어진 노무자 부대원들의 숨은공이 많았다고 평가한다. 계엄 사령부의 노무자 동원령에 따라 일선 전투중대까지 탄약과 주먹밥을 나른 노무자들도 6·25 종군기장을 받았으니 참전용사이자 국가 유공자들이다.

무더기 납북인사 중 송장군의 호통

김일성의 남침은 낙동강 전선에서 발목이 잡혔지만 적치하의 서울과 지방에서는 납북행렬이 계속됐다. 종래 남북협상파이던 안재홍, 조소앙, 오하영, 엄항섭, 조완구, 김규식, 윤장섭, 송호섭, 원세훈 등 지도급 인사들은 정치보위부에 일단 연금됐다.

내무부 장관 김효석은 자진하여 인민군 편에 서서 방송을 통해 감언이설로 자수를 권하고 방문수색을 안내하기도 했다. 또 국회프락치 사건과 관련된 노일환, 김약수, 김옥주, 이문원 등은 정치 보위부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7월 하순에는 80여명의 저명인사들을 평양시찰 명목으로 끌고 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8월에는 제2진 100여명이 다시 끌려 갔다. 국회 부의장 김동원, 천도교 교령 최린, 서울대 총장 최규동, 고대 총장 현상윤, 서울사대 학장 손진태, 소설가 이광수 등이 포함되었다. 또한 판검사, 고급관료, 종교계 인사들도 무차별 납북됐다.

납북인사들은 평양에서 자술서를 강요받고 세뇌교육으로 달랬지만 병들고 지쳐 도중에 죽고 숙청되기도 했다.

6·25 당시 청년방위대 고문단장이던 송호성(宋虎聲) 장군은 납북되고서도 장군 예우를 받은 특례이다. 그는 해산진에 있는 미군포로 수용소에 감금됐지만 “나는 남북협상 지지파다. 중국에 있을 때도 좌익으로 지목 받았다. 지금이라도 지휘권을 주면 국군과 유엔군을 격퇴시켜 주마”라고 호언했다.

이 때문인지 중부전선 후방지구를 담당한 해방사단장으로 임명되어 국군포로들을 설득, 인민군으로 편입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해방사단에는 6·25 전 춘천 8연대 대대장으로 근무하다 월북한 강태무(姜太武)와 표무원(表武源)이 연대장급으로 있었지만 실권은 없었다.

송장군은 해방사단 병사들이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니 먼저 부식을 개선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북측은 사상교육부터 시키도록 독촉했다. 또한 국군포로들을 전향시키라는 임무에도 불구하고 탈주자들이 계속 늘어나자 사단장직에서 해임됐다. 그뒤에도 ‘의거입북자 군사정치 학교’ 교장을 맡았으니 납북되고서도 유일하게 장군 예우를 받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이다.

‘수도사수’ 결의해 놓고 도망가나

국군이 초전에 질서가 무너져 정신없이 후퇴할 때 서울의 적치하에 같힌 우익인사나 피난길에 나서 죽을 고비를 넘긴 눈물의 사연이 수두룩하다.

가령 국회의원 박순천(朴順天) 여사는 “국회가 수도사수를 결의해 놓고 도망갈 수 있느냐”고 버티다가 정치보위부에 체포된 경우이다. 박의원을 심문한 종로경찰서장은 전쟁 석달전에 빨치산으로 내려 왔다는 사실을 자랑하며 6·25가 남침이 아닌 국방군의 북침이라고 우기더라고 했다.

시인 모윤숙 여사는 국방부 정훈국장과 함께 중앙방송국에서 국군이 곧 반격할 것이라는 국방부 정보를 방송하다가 적치하에 갇혀 곳곳으로 피난하다가 남한산성 산중에서 미군을 만나 생환한 경우이다. 헌병소령 장우주씨 부인 이정송 여사(23)는 ‘반동의 아내’로 총살 언도를 받고 사형장으로 끌려가다가 남대문에서 미군 폭격을 만나 인민위원장과 호송병사가 지하도로 피신할 때 탈출에 성공했다. 이 여사는 용산을 거쳐 한강을 건너 피난길에 들어섰지만 오산 부근 죽미령에서 검문에 걸려 내무서원의 총격때 다리밑에 떨어져 죽은 시늉으로 살아났다.

다시 아픈 몸을 이끌고 낙동강 다부동 전선까지 내려갔다가 인민군 검문에 걸려 즉결처분 직전에 “내 남편 장우주 소령에게...”라고 유언하는 바람에 살아 났다. 당시 이 여사를 여간첩으로 몰아 즉결처분 내린 부대는 국군 21연대 수색대가 인민군으로 위장하여 전선을 넘나드는 간첩들을 소탕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던 것이다.

피난수도 부산 요지경 김두한이 박살

낙동강 방어선이 일부 무너지고 대구시에 까지 적포탄이 떨어진 경우도 있었지만 9월에 접어 들면서 전세가 역전됐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함께 9·28 서울수복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돌아왔다.

▲ 일본군을 탈출한 학도병들. <사진@국가기록원>

다시 국군은 38선을 돌파하여 원산과 평양을 탈환하고 압록강변까지 진격하여 통일을 내다 보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다시 후퇴하여 서울을 뺏겼다가 재탈환하는 수모를 겪었으니 전쟁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낙동강 방어선이 위급할 때 조병옥 내무장관이 대구사수를 다짐함으로서 민심수습에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무렵 피난수도 부산에서는 전쟁을 모르는 유한족과 일본이나 제주도로 밀항하려는 도피꾼 부호들이 우글거렸다. 동래 기생촌에서는 전쟁 중에도 풍악 소리가 그치지 않고 댄스홀에서는 유엔군과 휴가 장병들이 여대생들과 놀아났다.

이때 의리의 주먹 김두한(金斗漢)이 몽둥이를 들고 일어났다. 대한청년단 감찰국장을 맡고 있던 김두한은 밀항을 준비하고 있던 귀족선박들을 모조리 습격하여 수많은 금품을 탈취했다. 돈은 학도병 부상치료비로 사용하고 물자는 피난민 구호용으로 사용했다.

또한 김두한은 쌍권총을 차고 댄스홀을 급습하여 춤바람에 놀아나는 군상들에게 “전선에서는 사느냐, 죽느냐”는 기로에서 목숨을 바치고 있는데도 춤바람이냐고 호통치며 그들의 주머니를 털어 부상군인 치료비로 지원했다.

김두한은 서울을 탈출하여 한강전투에 참가하고 부산에서는 학도병 청년들을 모집하여 포항전투에 보냈으며 독자적인 유격대를 편승, 적진을 습격하는 용맹성을 떨쳤다. 내일의 운명을 모르는 피난수도의 이같은 암울한 분위기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후 한숨을 돌리게 됐으니 전쟁을 체험한 세대는 지금도 맥장군을 대한민국의 은인으로 추앙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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