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산, 화천 공방서 한국전 최대전과
포로수용소에 인공기, 인민재판 버젓

‘낙동강아 잘 있거라’
북진, 후퇴, 반전, 휴전
용문산, 화천 공방서 한국전 최대전과
포로수용소에 인공기, 인민재판 버젓
▲ UN군 낙동강 방어선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일성이 승산없는 낙동강 전선 독전에 매달려 있을 때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은 일거에 전세를 역전시켰다. 인민군은 거의 지리멸렬 상태인 반면 국군은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면서 일사천리로 북진했다.

▲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어 포를 쏘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북진기세 중에 중공군 참전 첩보

[배병휴 회장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이톡뉴스)] 역사적인 10월 1일, 국군이 38선을 폭파하여 원산, 평양을 거쳐 한만(韓滿)국경에 도달하자 김일성은 황급히 도주하고 말았다.

인민군의 저항이 미미한 가운데 국군 1군단은 두만강으로 질주하고 2군단은 압록강을 향해 진격했다. 한미간에 적도(敵都) 평양을 누가 먼저 탈환하느냐는 경쟁을 했지만 국군 1사단이 1착으로 입성하는 기록을 세웠다.

▲ 유엔군과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후 서울시청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있는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북진도중에 적과 몇 차례 조우했지만 사실상 무저항으로 하루 60km가 넘는 행군 속도를 내기도 했다.

압록강에는 7연대 1대대 이대용(李大鎔) 중대장이 가장 먼저 도착하여 태극기를 휘날리며 수통에 강물을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바치기도 했다. 이대용 대위는 나중에 장군으로 진급했다가 월남 패망기때 마지막 주월공사로서 한국인 피난민 수송을 끝까지 지휘한 후 자신은 월맹군에 붙잡혀 혹독한 시련을 겪어냈다.

이 무렵 7연대는 초산에서부터 중공군 참전첩보를 수집하고 적의 통신망에 접촉하여 사실 확인했지만 사단이나 군단에서는 무시를 했다. 다시 운산 북녘에서는 중공군 포로를 잡아 정확한 정보를 확인했지만 어쩐일인지 수뇌부에서는 그냥 흘려 보냈으니 비통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중공군 참전으로부터 피리소리와 꽹과리를 앞세운 인해전술에 포위되어 국군과 유엔군이 얼마나 피를 흘렸는지 모른다. 눈물의 흥남철수작전 비극과 그 뒤 1.4후퇴, 수도서울의 재함락, 중공군의 춘계공세 등 끈임없는 소모전이 펼쳐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몰랐을까. 알고 무시했을까.

중공 수상 주은래(周恩來)는 국군이 38선을 돌파하자 “제국주의가 우리의인방을 침략하는 것을 묵시할 수 없다.”는 성명으로 한국전 참전을 시사 했었다.

이보다 앞서 8월 26일에는 중국과 소련이 회담을 갖고 의용군의 파병에 합의 했고 9월 초에는 만주 장춘에 중·북 합동사령부가 설치되고 사령관에는 임표가 임명됐다. 이렇게 중공군의 참전이 확실한데도 맥아더 사령관은 트루먼 대통령과의 웨이크섬 회담에서 중공군 개입 가능성을 일축했었다.

전장에서는 중공군 참전설이 이미 확인되고 있는데도 유엔군 사령부가 이를 모르고 있었는지 알고도 무시했는지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른 셈이다.

중공전의 참전이후 전선의 후퇴는 비참했고 서울을 다시 뺏긴 것은 국민들을 동요시키기에 충분했다. 피난살이에 찌든 서울시민들의 생계는 막연했으며 적 치하에서 고생했던 사람들은 다시 피난길에 나섰으니 그들의 절망감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용문산 전투서 한국전 최대의 승전보

중공군은 그해 4월 들어 서울, 춘천, 간성 가도를 차단하고 서울을 압박하는 제1차 춘계공세를 벌였다. 국군은 홍천강 이남 용문산에 주진지를 구축하고 북한강과 홍천강 일대에는 6사단 제2연대를 전위부대로 배치하고 주저항선은 7연대와 9연대가 맡았다.

중공군의 1차 공세는 초전에 격퇴할 수 있었지만 5월 16일 야간의 2차 공세는 2개 사단을 투입한 인해전술이었다. 전면에 배치된 2연대를 완전 포위하여 육박전으로 물리치는 극한상황이 벌어졌다. 중공군은 제2연대를 본대로 착각하여 주력 2개 사단을 투입했던 것이다.

이튿날 중공군은 다시 189사단을 투입했지만 국군 2연대는 군단포와 미공군기 엄호하에 완강한 저항으로 버텨냈다. 포위상태로 보급이 끊어지자 장병들은 소나무 껍질로 목을 축이고 공중지원을 통해 탄약과 식량을 의존했다. 2차 공세를 막아 낸 연대 지휘부는 논란을 거듭한 끝에 반격작전을 감행키로 결의했다. 당초 무모한 반격작전이라는 반론도 있었지만 공중지원에 의존하면서 무려 46시간의 사투 끝에 본대와 소통할 수 있었으니 대단한 승리였다.

중공군은 1, 2차 춘계공세에 실패하자 엄호부대 2개 연대를 남겨두고 철수했다. 국군은 추격전을 벌여 엄호부대마저 내쫓고 북한강을 건너 가평으로 진격했다. 이 때 용문산 전투로 중공군은 사단규모의 병력손실에다 사기가 떨어져 퇴각한 것이다.

당시 중공군 포로는 밥을 얻어 먹기 위해 투항한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통신선 가설병과 보급물자를 나르던 노무자들도 자진 투항했었다. 용문산 전투의 승리로 6사단은 북진 후 초산과 온정리에서의 퇴각 및 사창리에서의 패전을 깨끗이 설욕했다.

사단은 다시 춘천 서북으로 퇴각하던 중공군 패잔병 1만 5천 명을 추격하여 화천에서 퇴로를 차단한 채 격멸한 후 화천발전소마저 탈환했다. 이때의 용문산과 화천에 이르는 공방전 전과는 한국전 최대의 통쾌한 승리로 기록되었다. 적 사살 21,552명, 포로 3,251명, 말 759필 및 각종 무기와 탄약 등의 노획 기록으로도 전과를 짐작할 수 있다. 아군은 전사 107명, 실종 89명 부상 494명 등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다.

군·민·관 합동 특공결사대

미국 7사단에는 한국인 카츄사 8,637명이 배속되어 한미 합동작전 등에 기여 했지만 특별공격대를 적진에 투입 정찰활동을 벌인 전과도 많았다. 특별공격대는 대대장 배동걸 소령(육사 5기) 지휘로 1950년 12월 24일, 흥남철수 작전을 끝까지 엄호한 후 연포 비행장에서 부산 수영비행장으로 개선했다.

부산에서는 신불산(1,209m)의 적 잔당을 소탕하고 경주, 영천을 거쳐 안동으로 진군했다. 안동에는 인민군 2사단이 홍천, 횡성, 원주, 제천, 단양을 거쳐 일부 출몰하고 있었다.

특별공격대에게 1951년 1월 11일 진격명령이 떨어져 300명의 대원과 미고문관 3명이 문경군 동노면 경찰지서 뒤편 적성리(赤城里) 언 땅에 진지를 구축, 야영했다. 당시 작전장교 손장래 중위(육사 9기)가 적정이 심상치 않다고 보고 사주경계 속에 숙영키로 한 것이다.

밤이 깊자 단양 고개에 나가있던 매복조가 적과 교전을 개시했다. 인민군 1개 연대 포위 속에 10cm 적설이 쌓인 전선에 북소리, 꽹과리 소리와 함께 다발총성이 진동했다. 매복조가 30여분 교전 끝에 적은 퇴각했다.

날이 밝자 2차 공격이 밀려와 2중대 정면이 돌파 되었지만 좌우 중대의 협공으로 물리쳤다. 또 3차 공격은 3중대 정면으로 돌진해 왔지만 경찰지서의 견고한 방벽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

그 다음날 또다시 4차 야간공격이 있었지만 특별공격대는 조준사격 거리까지 접근해 올때까지 기다렸다가 격퇴시켰다. 이 과정에 미 고문관의 유도 아래 적진에는 기총소사와 네이팜탄이 쏟아지고 헬리콥터 편에 식량과 탄약이 수송되어 사기가 높았다. 그뒤 5차 공격을 마지막으로 적은 단양으로 완전 퇴각했으니 군경과 소방대원 및 지역주민들이 합세한 전공이었다.

적이 물러난후 집계된 적군시체는 1,247명, 포로 79명(대좌 등 군관 7명), 부상 900여 명에 이르렀다. 아군은 국군 9명, 민간인 4명, 소방대원 7명이 희생됐다. 이 같은 특별공격대의 빛나는 전공은 1971년 5월 20일, 주민들이 전승비를 건립하여 군·민·관이 합동하여 적의 5차례 공격을 물리친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24차례 뺏고 뺏긴 백마고지

전쟁이 지루하게 길어지고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소강상태이던 전선은 다시 고지탈환을 위한 공방전으로 치열했다. 철의 삼각지대를 비롯하여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김일성 고지, 모택동 고지 등 수 많은 격전지가 피안간 피를 쏟는 소모전이었다.

1952년 9월, 중공군의 막바지 공세가 철의 삼각지대 백마고지에 집중됐다. 해발 395m의 백마고지는 철원, 금화, 평강 등 삼각지의 요충으로 국군이 이를 장악한 것은 눈에 가시격이었다. 국군은 이 좁은 고지에 5개 중대를 배치하여 확고한 고수전략을 보였지만 중공군은 사단 병력규모로 필사적이었다.

▲ 국군 9사단 53탱크대대가 백마고지 전투에서 큰 활약상을 펼쳤다. <사진@국가기록원>

때마침 중공군 114사단 340연대 통신장교인 중국인이 귀순하여 백마고지 공격계획을 탐지할 수 있었다. 중공군은 백마고지와 유사한 지형을 선정, 6개월간 공격을 위한 실전훈련을 거듭했던 사실이 밝혀졌다.

피아간에 사력을 쏟아 부은 백마고지 공방전은 9월 1일 첫 포격으로부터 42일간 12차례나 뺏고 뺏기는 혈전이었다. 고지의 주인이 자주 바뀌는 바람에 미군기의 오폭으로 아군이 피해를 입는 경우도 있었다. 백마고지 혈전은 중공군의 주력부대 및 예비사단을 재기불능 지경으로 몰아갔으니 6.25 전사에 기록된 승전이었다.

1957년, 단기 4290년 7월 15일, 국군 5군단이 건립한 백마고지 전적비에 따르면 백마고지에는 피아간 포탄 30만 발이 쏟아지고 주인이 24차례나 바뀌었다. 포탄가루와 시신들의 분진 등이 무릎 깊이에 이르렀으며 산허리는 백마(白馬)등처럼 풀 한포기 마저 없어졌다.

포로수용소에 인공기와 인민재판

3년여 전쟁 기간 중 수많은 사건이 많았지만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친공, 반공 포로간의 사생결단은 전쟁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포로수용소 내에 인공기가 펄럭이고 인민재판이 자행되어 반공포로가 시체가 되어 유기되고 있었으니 마치 치외법권 지대였다.

그런데도 북한은 빨치산 투입을 통한 교묘한 선전술과 집단시위로 수용소 당국을 속수무책으로 끌어갔다. 1952년 5월, 포로수용소장 도드 준장이 친공 포로들에게 납치, 감금되는 웃지 못할 사건이 빌어졌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3년 휴전을 앞두고 참다못해 3만5천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 거제도 포로수용소 전경. <사진@국가기록원>

도중에 8천여명의 포로는 다시 붙들려 수감되고 이 대통령은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지만 반공포로의 인권과 생명을 보호하지 못하는 수용소 당국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 역할을 충분히 했다.

전남광주지역이 적치로부터 행방된 후 2개의 포로수용소가 있었다는 사실이 사진으로 보는 한국전쟁 하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광주 포로수용소는 1951년 4월, 인민군 패잔병과 부역자 및 공비출신 등 4만 8천여명을 수용했다. 포로수용소장 송인섭 소령(헌병)은 자대병력 300명으로는 경비가 불가능하여 전차부대 1개 중대 및 전남 도경 경찰관 300여명의 지원을 받았다.

그렇지만 외부의 빨치산과 수용소 내부의 친공포로간 내통에 의한 군경의 사상자가 속출했다. 빨치산의 본거지인 광주 무등산이 인접하여 곳곳에 공비들이 신분을 위장, 침투하고 있었던 것이다.

▲ 데일리메일 등 해외에서 주목한 마릴린 먼로 한국 위문공연 관련 보도 캡처.
빨치산 출몰로 군·경 피해

포로들은 전원 삭발하고 군복을 입혀 ‘PW’라는 포로 표시를 하여 천막 1개에 60여명씩 수용했다. 그러나 전쟁기간 중 물자부족으로 급식이 모자라 기간병사들이 나가 뱀과 개구리를 잡아오고 산나물도 캐어 영양을 보충하는 실정이었다.

4만 8천명의 포로 중에는 여성이 3,800명, 이중 아기를 출산한 여성이 400명이었다. 여성 포로들은 집안 어른이 빨치산으로 입산하자 따라 나선 경우도 있고 명문집 처녀와 빨치산 지도부의 성노리개 역할을 했던 20대도 많았다. 수용소 당국은 당시 백선엽 사령관에게 보고하여 포로가 낳은 고아들은 송정리의 ‘백선 고아원’에 수용하여 돌봐줬다. 그렇지만 은신한 빨치산의 출물에 따른 피해사고가 문제였다.

1951년 8월, 수용소 경비 헌병대 김상사가 야간 순찰 중 광주경찰서 박경감을 만나 막걸리 한잔 나누자는 제의를 받았다. 김상사는 막걸리 집에 들어가자마자 박경감의 권총에 의해 사살됐다. 박경감은 철저한 위장 공비였다.

9월에는 순천지역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했던 임소령이 광주시로 외출 나와 육사 동기생(7기)인 수용소장 송소령을 만났다. 두 사람은 운전병을 데리고 극장구경을 마친 후 송소령의 지프편으로 전송했다. 그러나 임소령은 귀대길 도중에 지프차가 폭발하여 사망했다. 두 사람이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할 때 고정 빨치산이 지프차 내부에 수류탄 폭발 시한장치를 장착하여 포로수용소장 목숨을 노렸지만 대신에 임소령이 사망한 것이다.

또 광주 77육군병원 군의관 송대위는 송소령과 얼굴이 비슷하여 빨치산 공격으로 희생된 어처구니없는 경우이다. 이렇게 공비들의 공격이 거세지자 수용소에서는 헌병 20여 명을 삭발시켜 포로로 위장 침투시켰다. 이 결과 탈출용 지하 땅굴을 3m가량 파고 있는 사실을 확인하고 주모자 3명을 체포할 수 있었다.

광주 포로수용소 빨치산들의 저항이나 투쟁방식이 거제포로수용소와 유사했다는 사실이 무엇을 말하겠는가. 김일성의 남침이나 대남전략은 철저한 위장전술이 기본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광주 포로수용소는 그뒤 1952년 12월 이승만 대통령이 시찰한 후 살인범등 흉악범을 제외하고는 전원 석방하라는 지시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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