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진오 기자 @이코노미톡뉴스] 지난 4월 익산 쌍릉(대왕릉)에서 발견된 인골이 7세기 사망한 큰 키의 노년기 남성이라는 인골 분석 결과가 나왔다.

▲ '발견 당시 목제유골함과 내부 인골 파편'.(사진=문화재청)

그동안 쌍릉은 백제 시대 말기의 왕릉급 무덤이며, 규모가 큰 대왕릉을 서동 설화(무왕이 신라의 선화공주와 결연해 왕위에 오르고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향가)의 주인공인 무왕의 무덤으로 보는 학설이 유력했었다.

쌍릉의 존재는 '고려사'에서 처음 확인되며, 고려 충숙왕 때(1327년) 도굴됐다는 사건기록도 남아 있다. 당시부터 고조선 준왕이나 백제 무왕의 능이라는 설이 있었다.

1917년 조선총독부는 쌍릉을 단 며칠 만에 발굴하면서 백제 말기의 왕릉이거나 그에 상당한 자의 능묘라는 것은 확인했지만, 1920년 고적조사보고서에 단 13줄의 내용과 2장의 사진, 2장의 도면만 공식기록 전부로 남겨놓았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8월부터 백제왕도 핵심유적 보존관리사업의 하나로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익산시와 공동으로 쌍릉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석실 끝부분에서 여태까지 그 존재가 알려진 바 없던 인골 조각이 담긴 나무상자를 발견했다. 100년 전 일제가 발굴하면서 다른 유물들은 유출했지만, 이는 꺼내 가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 '인골의 상태확인과 분류작업'.(사진=문화재청)

102개의 조각으로 남아있던 인골을 분석한 결과, 성별은 남성인 것으로 조사됐다. 팔꿈치 뼈의 각도(위팔뼈 안쪽위관절융기 돌출양상), 목말뼈(발목뼈 중 하나)의 크기, 넙다리뼈 무릎 부위(먼쪽 뼈 부위)의 너비가 남성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넙다리뼈의 최대 길이를 추정하여 산출한 결과 키는 161㎝에서 최대 170.1㎝로 추정된다. 훨씬 후세대에 속하는 19세기 조선 시대 성인 남성의 평균 키가 161.1㎝인 것을 고려한다면 비교적 큰 키이다.

'삼국사기'에는 무왕에 관한 묘사로 ‘풍채가 훌륭하고, 뜻이 호방하며, 기상이 걸출하다’라고 되어 있다. 639년에 작성된 '미륵사지 서탑 금제사리봉안기'에는 ‘대왕폐하’로 불린 기록도 있다.

나이는 최소 50대 이상의 60~70대 노년층으로 봐도 큰 무리가 없다. 목의 울대뼈가 있는 갑상연골에 골화가 상당히 진행됐고, 골반뼈 결합면의 표면이 거칠고, 작은 구멍이 많이 관찰되며, 불규칙한 결절이 있다.

▲ '익산 쌍릉(대왕릉) 석실 내부와 발견되 목제유골함'.(사진=문화재청)

최신 공학기술이 반영된 이번 연구에서는 뼈의 3차원 입체(이하 3D) 모형화와 3D 프린팅을 통해 여러 분야에서 활용이 가능한 디지털 자료도 구축했다.

▲600년에 즉위해 641년 사망했다는 무왕의 재임 기록으로 보아 10대나 20대에 즉위한 경우 무왕의 사망 나이가 남성 노년층으로 추정되는 쌍릉의 인골 추정 나이와 비슷하며 ▲사망 시점이 7세기 초반부터 중반 즈음이라는 인골 분석 결과는 익산을 기반으로 성장해 같은 시기에 왕권을 확립한 백제 무왕의 무덤이라는 역사적 가능성을 한 걸음 더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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