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 식성에 내장비만 완치 어려워
쌀엔 천기, 지기의 전천후 내성 듬뿍

사랑과 미움의 만감 교차
쌀 천시 노여움 받는다
웰빙 식성에 내장비만 완치 어려워
쌀엔 천기, 지기의 전천후 내성 듬뿍

 소비량이 1인당 연간 78.8㎏으로 줄어들었다. 1년 내내 한가마니도 먹지 않는다는 통계이다. 게다가 우리 쌀이 남아도는데 외국쌀을 수입해야 하는 세월이니 나이든 경험세대에게는 야속하게 느껴진다.
쌀에 얽힌 지극한 사랑과 미움으로 만감이 교차할 수밖에 없는 처절한 심정이다.

과복에 젖어 오도된 웰빙병
▲ <사진=국가기록원 영상캡쳐>

[배병휴 회장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e톡뉴스)] 1인당 쌀 소비량 78.8㎏은 지난 86년에 비하면 무려 48.9㎏이나 줄어들었다. 첨단산업시대에 접어들어 웰빙문화가 보급 되면서 쌀밥을 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루에 겨우 216g, 한 공기 반쯤 밖에 먹지 않는다는 뜻이니 쌀농사를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라 일컬었던 옛 조상들의 신앙이 무너졌다. 오히려 천덕꾸러기 신세가 쌀농사이다.
농민들은 연간 1인당 128㎏을 소비하니 아직도 농사를 짓고 있다는 죄의식으로 열심히 소비하지만 남는 쌀을 처분할 길이 없다.
쌀밥이 소원이던 우리네 경험세대들은 쌀이 남는 것이 단군 이래 과복(過福)을 누린다고 감사하고 있지만 신세대들은 쌀밥을 촌스럽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통계당국에서는 우리의 1인당 소비량 78.8㎏이 일본의 61.5㎏, 대만의 48.6㎏ 보다는 아직도 많다고 비교한다. 참으로 눈앞이 캄캄한 지경이다. 앞으로도 계속하여 우리의 쌀 소비량이 더욱 줄어들 것이라는 시사이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우리의 쌀 소비량이 일본이나 대만 수준으로 줄어들면 우리농사는 어찌될까. 신세대들이야 라면과 빵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고 피식 웃고 말런지 모르지만 우리네 가슴은 두려움으로 안정을 찾을 길 없다.

쌀밥 천시 후 내장비만증

서울 도심에서는 수시로 한미FTA를 반대하는 시민단체들의 집단시위가 열리고 농민단체들도 고속도로를 점거하는 사태가 빈발한다. 모두가 쌀시장 개방 저지를 제일의 명분으로 삼는다.
그러나 쌀을 먹지 않으려는 도시민들을 상대로 쌀시장 개방 반대를 부르짖는 꼴이니 별로 딱하게 여기는 시선이 없어 보인다.
농업문제나 FTA 현안을 다루기 위한 당·정간의 조찬 호텔모임이 있지만 빵 먹으며 쌀 문제를 이야기 한다. 한 FTA 협상단도 미국 대표들과 만나 빵 먹으면서 “쌀 시장은 절대 개방 못하겠다”고 강조한다. 미국 대표단이 속으로 킥킥 웃으면서 쌀 대신에 뭘 내놓겠느냐고 따졌을런지 모른다.
쌀을 천시하면서 웰빙시대를 예찬하는 오늘의 한국인들이 내장비만(內臟肥滿)병에 시달린다. 어릴 적부터 서구식에 길들여 오장육부가 단백질과 지방질로 덕지덕지 쌓여 있다는 병이다.
전국에 비만센터가 무려 3천 곳이 넘고 연간 치료비가 수조원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나 비만이 의술로 쉽게 완치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칼질하고 약물 복용해도 금방 다시 비만해 지니 비만은 타고한 천성과 식성을 배반한 원죄 때문이다.
한국인의 DNA는 5천년 풍상을 이겨낸 밥과 된장으로부터 형성됐기에 식성을 대물림하지 않고서는 비만증을 치료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쌀밥 먹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만 비만 예방과 치료에 쌀이 좋다는 경험적 사실만은 강조하고 싶다.

우리 쌀에는 4계절 내성 결집

쌀은 공산품과는 달리 4계절 농사이기 때문에 천기(天氣)와 지기(地氣)를 듬뿍 받은 생명산업 산물이다.
겨울 퇴비, 봄 논갈이와 모심기, 여름 김 매기, 가을 수확에 이르기까지 하늘 쳐다보고 땅을 지켜본 온갖 기도와 정성으로 생산된다. 그러기에 쌀 한 톨 속에는 가뭄과 홍수와 병충해를 이겨낸 4계절 전천후 내성(耐性)이 결집되어 있다. 이런 쌀이 계절 변덕이 심한 이 땅의 후손들 몸에 좋은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쌀이 모자라 희귀하던 시절에도 조상님 제사상에는 흰쌀밥을 올린 이치가 있었다. 조상님 은덕에, 하느님 덕택에 쌀농사 지었으니 감사드린다는 의미이다.
이 같은 소중한 쌀이 남아돌아 풍작일수록 농민들 근심, 나라의 걱정이 되고 있으니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고 했던 2천 년 전 공자 말씀이 너무나 옳다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지금  이 시각 현재 북녘 땅 2천수백만 동포들은 쌀은 고사하고 초근목피(草根木皮)마저 모자라 수백만명이 굶어 죽은 것이 실제상황 아닌가. 김일성이 생전에 독재하면서 ‘흰쌀밥, 고깃국, 기와집’ 약속을 했지만 단 한가지도 지키지 못하고 죽었다.
반면에 남한은 쌀이 지천이라 근심, 걱정이 쌓여 있으니 과복이라 해야 할지, 방종이라 해야 할까.

농림장관 목이 하늘에 달려
▲ 보리고개에서 해방시켜준 통일벼로 주곡 자립을 이룩한 박정희. 쌀산업은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농업의 근간이므로 농심은 정책적으로 보존하되 쌀생산 조절은 불가피해 보인다.

쌀이 모자랄 때 어머님이 보리밥솥 중앙에 쌀 한웅큼 집어넣어 아들에게만 쌀밥 먹이려 고심하던 모습을 회상하면 눈물이 난다.
“어린 자식 꽁보리밥 먹이면 소화 못해 탈난다”면서 억지로 나만 쌀밥 먹으라고 하니 철부지 시절이지만 목구멍으로 넘어갈 수 없었다. 그 시절 누님들은 시집갈 때까지 쌀 한가마 먹었을까 말았을까.
60년대 초 GOP 소대장으로 근무할 때 병사 한명이 월북하여 “쌀밥 배불리 먹고 싶어 의거 월북했다”고 나팔 불어대던 녹음방송이 귓전에 생생하다.
실제로 당시 군대 정량만으로는 배가 고팠다. 북녘 진지에는 전깃불 켜있고 우리 진지는 희미한 호롱불로 대치하고 있던 그 시절, 농촌 출신 병사들은 자나 깨나 수북한 밥그릇과 흰떡이 소원이라고 했다.
군복무 마치고 올챙이 기자시절 쌀과 연탄에서 기사가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농림부장관 목은 하늘에 매여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실감했다.
요행히 가뭄 홍수 이기고 풍작이 들면 농림부장관은 한 턱 내야만 했다. 하늘이 도와 풍작 이루고 장관 수명 연장됐으니 스스로 기분이 좋아 한턱 낼만 했었다.
쌀이 생명산업이라는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 풍작과 흉작에 따라 민심이 달라지고 나랏일이 편안하거나 혼란에 빠진 것이 5천년의 역사이다.
다만 지금은 세월이 변절하여 배고플 때를 잊고 우리 농업과 우리 쌀이 뭣인지 알지 못하고 농민들의 고통이야 우리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요즘 양극화를 한탄하고 있지만 실상 배부른 사람과 배 아픈 사람 간 싸움 붙이는 정치나 다름없다. “많이 갖고 큰집에 사는 사람들 보면 배 아프지 않느냐”고 부추기는 꼴이기 때문이다.
우리네 경험세대가 보면 내 배 부르고 나면 남들이야 뭘 하건 배 아플 까닭이 없다. 세끼 먹고 살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뱃속이 편하기 때문이다.

5·16은 밥 먹여 주는 정치

박정희 대통령의 5·16정부를 ‘밥 먹여 주는 정치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절망과 기아선상에 허덕일 때 5·16 혁명은 “배고픈 국민이 먹어야 산다”는 민생우선을 실천했다.
5·16정부는 금지와 금욕(禁慾)을 요구했다. 쌀밥 안되고 쌀 막걸리도 안되고 보리밥과 칼국수나 먹으라고 했다. 양주와 양담배 금지는 물론 호화주택도 안되고 장발도 안된다고 금지했다. 달러화가 너무 귀중하여 해외여행도 금지했지만 밀수와 외제도 반국가 반사회범으로 엄중히 다스렸다.
이무렵 야간 통금 없고, 양담배 양주가 금지되지 않는 자유를 찾아 이민 떠난이가 많았다. 나중에 개선장군처럼 일시 귀국한 동료에게 5·16정부의 ‘밥 먹여 주는 정치’가 성과가 있어 우리네도 밥 먹고 살게 됐노라고 일러주었다.
그랬더니 “밥만 먹고 살면 돼지이지 사람이냐”고 면박했다. 독재정권 하에서 밥 먹고 살게 된 것이 자랑이냐는 비웃음이었다. 그렇지만 우리네는 미국에 이민 가서 팔자 고쳤다는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비록 금지와 금욕이 많아도 배고픈 국민이 배불리 먹는 것이 인권이고 민주주의라고 여겼다. 지금이야 천지개벽 만큼이나 나라가 발전하여 내장비만증에 걸린 시절이지만 그때 그 세월을 생각하면 쌀이 생명이자 자유이며 천부의 인권이었다.
인간이 배고플 때 눈에 보이는 것은 쌀 뿐이다. 이는 배가 불러 배 아픈 시절을 살고 있는 이들은 도무지 알지 못하는 원리이다.

다수확 쌀 증산이 유죄 취급

5·16정부는 혁명 열흘 만에 농어촌 고리채 정리령을 내렸다. 전 국민의 6할이 농민이던 시절, 호당 6만7천환씩, 총 1천517억환의 고리채가 농민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초근목피로도 연명이 안돼 가을 추수 때 갚는 조건의 장리곡으로 보릿고개를 넘겼다. 장리곡은 5할짜리 초고리채 인지라 농민들은 빈곤의 악순환이 운명이었다.
이때 농어촌 고리채 정리령은 연간 이율 2할이 넘는 것은 모조리 고리채로 규정, 신고토록 의무화 했다. 신고 고리채는 1년 거치 4년 분할상환으로 농업금융채권으로 교부키로 했다.
그러나 계몽과 독려에도 불구하고 신고액은 537억환에 불과했고 그나마 심의위원회를 거쳐 고리채로 판정된 경우는 89만건에 294억환에 불과했다.
우리의 농촌생활 구조가 지연과 혈연으로 묶어져 고리채 신고를 악덕으로 여겼기 때문에 고리채 정리가 성공할 수 없었다. 그 뒤 5·16정부는 자립과 자조를 앞세워 국민재건운동을 전개하며 농지개량, 지력개선, 용수개발, 농업기계화 등으로 쌀 증산에 국력을 쏟았다.
또 농촌진흥청 작물시험연구소를 통해 다수확 신품종개발에 나서 통일벼, 밀양호, 수원호 등을 개발하고 다수확시상제도를 만들어 ‘전국 증산왕’을 선발하기도 했다.
이렇게 증산하여 주곡자급을 이룩하자 밥 맛 없는 통일벼를 개발, 보급한 것이 죄목으로 꼽혀 다수확 시상제도가 없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살아온 과거를 회상하면 지금에 와서 쌀에 얽힌 지극한 사랑과 미움이 교차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쌀밥으로 비만증 보지 못했다

쌀에 관한 과학적 지식이 전무하지만 쌀을 주식으로 5천년 역사를 살아오면서 오늘과 같은 비만증이 한국인을 괴롭힌 사실이 과거에는 없었다고 확신한다.
쌀에 함유된 단백질과 지방질의 특유한 물성이 체내에서 과부족을 절로 조절하여 넘치면 배출하고 모자라면 축적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네 조상대대로 비만의 내력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특히 중노동 하던 머슴들이 고봉으로 세끼 먹고 간식으로 막걸리 마시고 때론 야식까지 했지만 과체중이나 비만에 걸린 적이 없었다고 기억한다.
지금껏 중병 앓지 않고 살아온 과거를 생각하면 쌀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의 전통음식이 한국인의 건강과 체력을 너끈히 뒷받침해 왔다고 믿는다.
연간 쌀 소비량이 80㎏ 미만으로 떨어진 사실을 두고 농민들만을 생각하자는 주장은 아니다. 도시민들의 건강도 우리 쌀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쌀에 관한 사랑과 미움을 읊는 것이다. (烋)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90호(2007년 3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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