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 비전승국 운명은 달라

서울과 파리, 8월 해방 동갑
전승, 비전승국 운명은 달라
▲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루스벨트 대통령과 처칠 총리와 함께 (1943년). <사진@Why We Fight, Divide and Conquer, 저작권=퍼블릭도메인,위키피디아>

[김무일 (파리1대학 국제정치학박사·(前)한전KDN(주)상임감사·(前)주 프랑스국방무관)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이톡뉴스)] 

프랑스군 단독으로 쟁취한 파리해방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인 1940년 6월 프랑스 정부는 독일의 침공으로부터 세계적 문화도시인 파리가 시가전 등으로 파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파리를 무방비도시로 선포하고 보르도(Bordeaux)로 철수하였다.

그 후 1944년 당시 프랑스내의 지하 레지스탕스(Résistance : 프랑스 내 항독저항세력)는 봉기하여 내부로부터 파리를 해방시킬 준비가 끝나고 있었으며, 패튼(Patton) 장군은 미군의 영광을 위하여 파리입성을 원했다. 그러나 파리는 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였기 때문에 연합군 사령관 아이젠하워 (Eisenhower)장군은 그가 지휘하는 프랑스 부대가 파리를 해방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북아프리카와 노르망디(Normandie)에서 독일군을 상대로 싸웠던 프랑스 제2기갑사단이 영광의 부대로 선정되었으며, 8월 25일 드디어 파리에 입성해 전략적 요충지인 개선문, 국방부, 시청을 점령했다. 독일군의 파리점령군 사령관 폰 콜티즈 (Von Choltitz)중장은 다리를 폭파하고 주요 공공건물을 파괴하라는 히틀러(Hitler)의 지령을 어기고 파리를 파괴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군 사단장인 르끄레르(Leclerc) 장군에게 파리를 고스란히 넘겨주었으며, 그 휘하의 17,000여명 독일군은 항복하였다. 1944년 8월 26일, 파리 시민들은 해방에 환호했다. 파리는 4년간 독일군 점령하에 있었으며, 독일군이 노르망디에서 후퇴하자 해방을 부르짖었던 것이다.

국가주권을 회복하고 전승국인 된 프랑스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의 드골(De Gaulle)장군은 독일이 점령지 프랑스 내에 그들의 괴뢰정권을 세우자,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망명정부를 세우고 프랑스에 남아있던 레지스탕스(Résistance)를 지휘하며 미국, 영국 등과 당당하게 연합군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런던에서 자유 프랑스군을 조직하고 부하들에게 프랑스 군복을 착용하게 한 후 연합군에 가담시켜 프랑스 내의 레지스탕스 세력과 협력하여 실질적인 전투에 참전하도록 하였으며, 파리가 해방되던 그날, 샤흘르 드골(Charles de Gaulle)장군과 그의 병사들은 개선문에서 부터 노트르담 대성당까지 행진하여 감사기도와 미사를 드렸으며, 승리한 연합군의 일원이 되었다. 전후 처리과정에서 드골이 이끄는 프랑스는 전승국 자격으로 패전한 독일의 항복을 받아내고 그 후 UN에 진출하여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 되었다.

일본정규군과 싸워 이긴 우리 독립군과 광복군

독립군은 일본 정규군에 비해 무기와 장비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오직 민족독립을 위한 애국정신과 지휘관의 전투지휘능력 하나로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그 대표적인 전투가 1920년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전투와 김좌진 장군이 이끈 청산리대첩이다. 또한 광복군은 1945년 8월 일본이 폐망할 때까지 온갖 시련과 난관을 오직 불타는 조국애 하나로 극복하면서 최일선에서 일본군과 싸웠던 것이다.

홍범도 장군이 지휘한 봉오동(鳳梧洞)전투는 1920년 6월 지린성(吉林省)․허륭현(和龍縣)․봉오동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을 참패시켰던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 10여 명의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독립군 측의 피해는 전사4명, 중상 2명으로 경미하였다.

한편, 청산리 대첩(靑山里 大捷)은 1920년 10월 21일 아침 8시부터 26일 저녁까지 6일간 계속된 전투에서 김좌진(金佐鎭)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독립군이 만주 허룽현(火龍縣:三道溝)청산리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마록구(馬鹿溝) 등지의 3차에 걸친 전투에서 5만의 일본군을 대파한 전투이다. 2,500명의 아군병력은 지리적 이점을 충분히 이용하여 적 3,300명을 사살하고 아군은 120여명의 전사자만 내는 대승리를 거두었다(출처 : 국방부/정신교육교관용 교재 2003발간). 청산리 지역의 3차에 걸친 전투는 한국독립군 무장독립운동 전사 상에 가장 빛나는 전과를 올린 대첩으로 독립군전사에 기록돼있다.

이어서 1940년 9월 17일 창설된 광복군 총사령부는 광복 1년 전인 1944년에는 1945년 8월 20일 약 1개 사단 병력으로 한반도 진공(進攻)계획까지 세웠으나 작전개시 5일전에 일제가 항복을 선언하고 8․15광복이 됨으로써 이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전승국의 대열에 참여하지 못한 결과

만일 상기의 8월 20일 한반도 진공계획이 성공하였다면 한반도내의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하는 사태도 없었을 것이며, 한반도의 분단이라는 비극도 없었을 것이다. 역사는 교훈이며, 역사는 위대한 스승이고 현재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생활의 지침서요, 미래에 대한 예언서라고 할 수 있다.

󰡐싸움에서 이긴 국가와 민족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모든 것을 지배하며 승리자로서의 권리를 향유하지만 싸움에서 진 국가와 민족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견딜 수 없는 수모와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금년 광복 73주년을 맞이한 우리는󰡐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Si Vis Pacem, Para Bellum:로마전략가 Vegetius)󰡑는 경구(警句)를 재삼재사 음미하면서 국제정세의 흐름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慧眼)으로 평화의 분위기가 넘치면 넘쳐흐를수록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철저한 국방안보태세를 한층 더 강력하게 유지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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