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 1958, 그리고 Since 1978
미국 진출 40년史

160조 원 매출의 LG그룹이 올해로 미국 시장 진출 40년을 맞이했다. 지난 1978년 LG전자(당시 금성사)는 미국에 처음으로 본견 진출했다. 사실 정확히 보자면 1962년 미국 뉴욕 아이젠버그 社에 라디오 62대를 수출한 것이 더 먼저이긴 하다.

▲ 금성사 텔레비전 생산 공장 현장의 모습(1965년). <사진@국가기록원>
Since 1978, 美 본격 진출 개시

[최정아 기자 @이코노미톡뉴스] 1968년에는 뉴욕에 해외지사를 설립해 미국 진출의 기점을 마련했다. 지사 형태이기에 공식적인 미국진출은 아니다. 본격적인 진출은 1978년으로 미국 뉴욕에 현지법인이 설립돼 본격적인 북미 시장 공략이 시작되었다. 연이어 금성사는 캐나다의 토론토, 미국 LA와 시카고에 지사를 설립해 북미시장 판매망을 확대했다.

▲ 1959년 11월 15일, 우리나라 최초로 금성사(LG전자 전신)에서 출시된 진공관식 A501형 라디오.

1981년에는 한국 기업으로는 최초로 미국 헌츠빌에 컬러TV 공장 건설 착공해 북미 시장 확대를 위한 생산량 증대에 힘썼다. 1984년 12월에는 매출 1조 원을 돌파했다. 하지만 80년대 중반에 이르러 매출 증가률이 떨어지고 국제경쟁력이 약화돼 위기가 닥쳐왔다. 여기에 북미 경제 블록화를 위해 CDT(무역개발위원회) 반덤핑 제소 사건도 있었다.

이에 금성사는 1993년 미국의 컬러TV 생산공장을 멕시코 소재  CSMX로 이전했다. 금성사는 제니스 社 인수(1995년)와 설힙한 멕시코 CSMX를 통해 TV 중심의 수직계열화를 실현하게 되었다. 브라질에는 LGESP를 설립하고, 페루에는 현지법인을 두는 등 중남미 전체에 걸친 적극적인 시장 개척을 해왔다. 이윽고 나프타(NAFTA) 지역의 최대 규모의 TV업체로 부상하기에 이르렀다.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서 1995년 럭키금성(Lucky Goldstar)의 사명을 'LG'로 변경했다. 결정은 고 구본무(具本茂)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그룹명을 바꾸었다. 금성사도 LG전자로 사명을 변경했다.

Since 1958, 韓 '금성'의 개시
'국산 최초의' 타이틀 명성

사실, 전자와 가전 업계에서 '국산 최초'라는 타이틀은 LG전자(구 금성사)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금성사의 시작은 1958년 10월, 당시 락희화학의 사장이었던 연암 구인회 선대 회장이 부산 연지동에 전자 회사 '금성사'를 설립해 초대 사장을 맡았다. 1년 후, 금성사는 국산 최초의 진공관식 9구 라디오 'A-501'을 개발해 첫 생산을 개시했다. 다시, 1년 후에는 최초로 6석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개발했고 또다시, 1년 후에는 국산 최초의 자동전화기도 개발했다.

▲ 최초의 국산 TV인 흑백텔레비전 'VD-191'. <사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미국 아이젠버그社에 최초로 수출했던 때는 구인회 선대 회장의 동생인 구정회 회장이 사장으로 취임한 첫 해이기도 하다. 1965년 4월 최초의 국산 냉장고에 이어 1966년 8월 금성사는 최초의 국산 TV인 흑백텔레비전 'VD-191' 제품을 최초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국산 TV는 당시의 삼성과 대한전선 등의 후발 회사에 관련 시장 진출을 고무시켰다. 금성사는 1967년 본사를 서울 을지로 한일을지빌딩으로 이전한 후 가전-통신-전선의 3개 사업부로 개편했다.

1968년 금성판매(주)를 설립하고 최초의 국산 룸에어컨을 개발했다. 1969년에는 최초의 국산 펌프와 세탁기를 생산했다. 1977년 8월에는 금성사 최초의 첫 컬러TV 'CT-808'를 개발했다. 1978년 12월 기준으로 매출 1천억 원 및 수출 1천억 불을 달성했다. 1982년에는 국내 최초로 VCR·컬러 비디오카메라를 개발했다. 

금성사는 북미와 멕시코 진출 이후, 1980년에 서독에 첫 현지법인을 개설해 유럽시장 공략도 본격화하였다.

1983년에 디자인 종합연구소 및 제품시험연구소를 개설했고, 1984년에 국내 최초로 음성다중 TV를 개발한 후 평택공장과 김해공장을 개설하였다. 그해 12월에는 매출 1조 원을 돌파했다. 1986년에 허신구 대신 구자학이 사장직에 앉았고, 1987년 구자학이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부문별 사장제를 도입했다.

Since 'LG전자', LG(정도경영) vs 삼성(제일주의)
-뼈아픈 금성일렉트론→LG반도체→하이닉스→SK하이닉스 변천사

1990년대까지 LG전자는 라이벌이자 앙숙으로 대표되는 삼성(삼성전자)과 치열한 경쟁구도에 있었다. 그러다가 1997년 외환위기가 난 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재계의 중복투자와 소모성 경제를 지양해야 하는 정책기조에 따라 그룹 간 빅딜 요구에 반도체 빅딜의 결과, LG그룹은 LG반도체(舊 금성일렉트론)를 현대전자에 넘겨주었다.

현대반도체는 2001년 현대그룹에서 분리돼 '하이닉스'로 사명을 변경했다. 명확한 주인이 없던 하이닉스는 2012년 3월 SK그룹으로 합병되어 오늘날의 SK하이닉스 역사를 걷게 되었다.

개척자 모드의 LG가 가지고 있는 뼈아픈 역사의 한 장이었다. 강력한 잠재적 추진력을 가졌던 LG반도체가 LG그룹에 남겨졌다면 어쩌면 오늘날 삼성전자와 대등한 위치가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 이상일 수도.

2000년 휘센 에어컨 출시로 세계 에어컨 시장 1위를 장악했고, 2002년 4월에는 주식상장이 이뤄졌다. 2005년에는 싸이언 초콜릿폰을 출시해 1천만 대를 판매하는 실적을 올렸다.

▲ 1973년 4월 4일 경향신문에 개제된 금성사의 눈표냉장고(120리터) 신문광고. 눈표냉장고는 국산 최초의 냉장고로 당시 가격이 8만5천원 이었다. <스크랩@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과거 우리나라 가전업체들 사이에서 냉장고 제품 싸움이 한창일 때, 3사는 냉각방식과 전력 절감율을 과장 광고해 서로들 자랑으로 광고를 한 적이 있다. 일례로 1981년, 삼성전자는 금성사의 눈표냉장고 제품을 흠집내기 위해 '하이콜드는 소비전력을 줄이기 위해 냉동실을 줄이는 변칙방법을 택하지 않았읍니다'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금성사도 마찬가지였다. 

냉장실 윗부문의 폭을 줄이고 마치 늘어난 것처럼 표시를 하고 홍보했으나 이 역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 각사는 신문을 통해 대형 사과문을 게재했다. 85년 초에도 금성사, 삼성전자, 대우전자도 공동으로 사과광고를 신문에 실기도 했다. 시장점유율 싸움에서 대리점 밀어내기식 판매경쟁과 가격단합 행위로 말썽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료 제공: '생존경제 반칙경제(1985년 출판)' 배병휴 매일경제신문 논설위원, 현 경제풍월미디어 회장)

평민 총수 ㈜LG 구본무 정도경영 회장 별세
▲ 1995년 2월22일, 취임식에서 LG깃발을 흔드는 고 구본무 회장. <사진@LG>

고인이 된 LG 구본무 회장은 올해 5월 20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1995년 부친인 구자경 회장이 고희 70세를 맞아 경영에서 물러나면서부터 구본무 회장은 1995년 2월 22일 '정도경영’ ‘일등경영’ 등을 내세워 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이후 23년간 LG그룹을 뚝심의 리더십으로 이끌어왔다. 

전경련은 고 구본무 회장이 정직·공정의 기업인상을 남겼노라고 회고하면서 구 회장의 정도경영이 인재양성 기업문화에다 의인상(義人賞)으로 우리 사회를 밝게 이끌어왔다고 높이 평가하며 애도했다. 하지만 구본무 회장은 LG반도체를 현대전자에 넘겨줄 때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당시 전경련에 대해 울분을 토했다는 후문이 있었다.

한편, LG전자는 최근 미국진출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온라인 이벤트를 미국에서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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