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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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깍기 외길 30년

20년 되물림에 감격

경인상사 曺圭大(조규대) 사장, 외산선호 분통

“추억의 학용품…60?70노인들 근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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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상사 曺圭大(조규대) 사장>

연필깎기 대명사 ‘샤파’의 보람

연필깎기와 문구류분야에서 외길 30년을 걸어온 경인상사 조규대(曺圭大) 사장은 어느날 한 고객으로부터 생산된지 20년된 ‘샤파’를 받았다.

20년전 구입한 샤파가 삼촌에서 어린 조카까지 여러 대로 되물림되다 AS받기 위해 경인상사에 접수된 것이다.

29년전 경인상사를 창립한 뒤 그곳에서 청춘을 불태운 조규대 사장의 감회는 남달랐다.

고가품을 잃어버려도 다시 사면 그만인 세상에 세월 흐르고 시대가 변해도 샤파의 품질만은 여전하다는 것이 입증됐기 때문이다.

조사장은 “20년 지난 샤파를 손봐달라고 가져왔는데 정말 감탄했다”며 “물건 제대로 만들었다는 생각에 자부심도 컸다”고 말한다.

연필깎이가 뭉뚱그려 사퍄로 불릴 정도로 샤파는 연필깎이의 대명사였다.

샤프펜슬, 컴퓨터의 등장으로 연필 깎는 일이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학교에서는 필기도구를 사용하고 학생들은 샤프펜슬보다는 연필을 권장 받는다.

부드럽게 잘 밀려나가는 샤프펜슬은 쓰기는 좋아도 글씨를 망치게 하고 나중에는 교정도 어렵다는 게 조사장의 설명이다. 연필로 한 자 한 자 눌러써야 글씨체가 예뻐지고 실력도 늘 수 있다는 것이다.

20대들도 샤파에 대한 추억이 깊다. 없는 살림에 부모님 졸라 샤파 하나 얻으면 연필이 뭉뚝해지기도 전에 깎고 또 깎던 기억이 아련하다.

세련되고 날렵한 디자인의 학용품이 나오면서 샤파의 명성이 예전만큼은 못하다. 그렇지만 지금도 1년에 25만개가 팔려나가고 동남아, 유럽, 미국 등 각지에 수출되고 있다.

“제발 나가라는 말만 말아요”

경인상사는 1972년 설립된 중소기업으로 연필깎기(샤파)와 그림물감, 크레파스(티티파스)같은 학용품을 만들고 있다. 1년 매출은 150억원 규모다.

본사직원 40명에 용인공장에 100명 직원이 고작이지만 부채 한 푼 없는 견실한 기업이다.

용인공장에서 일하는 직원의 5분의 1이 이 지역 노인들이다.

18년전 공장을 서울 오류동에서 용인으로 옮겼다. 그때 이웃 시골아주머니들 30, 40명이 몰려와 일하게 해달라 요청한 것.

조사장은 사람 구하기도 힘들고 그들의 요청도 외면할 수 없어 그들의 요청을 수락했다.

최근 공장의 직원현황을 조사해보니 30, 40명의 마을주민 중 20여명 가량이 남았다.

18년동안 근속한 최고령 직원이 무려 73세나 되고 가장 젊은 사람이 63세다.

할 일없는 노인들에게 소일거리와 월급을 제공하니 좋은 일 한다지만 조사장에게는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작업은 기계가 만든 학용품을 포장하는 일이 고작이다. 그러나 나이가 나이인만큼 일하다 쓰러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는 게 사실이다.

고민 끝에 젊은 사람들을 찾아봐도 농촌에 남아있는 젊은이가 없다는 설명이다.

“50대도 찾아보기 힘들어요. 젊은 사람들은 모두 서울로 취직하러 가고 농촌엔 인적자원자체가 없어요.”

조사장은 70대 노인에게까지 일시키는 게 도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퇴직을 권고해도 한결같이 “손아귀에 힘 남아있을 때까지 일할테니 제발 나가라는 말만 하지 말라”는 호소다.

경인상사에는 노조도 없다. 오히려 직원들이 “그런 거 뭣하러 만드냐”는 반문이다.

나라위해 방위산업하려다 면박만

조사장은 서울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하고 섬유회사에 입사해 섬유수출업무를 담당했다.

72년 직장내부사정으로 회사를 그만둔 뒤 자기사업을 하기 위해 창업아이템을 구상했다.

이윤 낮은 노동집약적 산업은 전망이 밝지 않다고 생각돼 접어두고 다른 사업을 구상하던 때였다.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이 군수산업을 국가산업으로 전략화하던 시기였다. 조사장은 군수산업이야말로 국가안보를 위해 꼭 필요한 사업이라고 생각하고 방위산업에 뛰어들었다.

“세계무기전시회를 둘러보면서 나름대로 역사공부를 했는데 우리나라가 외침받은 회수가 500번은 족히 넘더라구요. 그때부터 국가안보에 관심을 갖게 됐고 방위산업이 가치 있다고 생각됐죠.”

핵탄두와 미사일같은 무기는 국가에서 관장하고 조사장같은 개인사업자는 소모성 간접무기를 생산하면 좋겠다는 판단이었다.

사업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2년간 세계를 돌아다니다 적외선탐지기에도 노출되지 않는 야시경을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의 무기제작회사들과 가계약까지 마치고 이제 정부에 인가를 받는 일만 남았다. 조사장은 모든 사업기획안과 가계약서를 청와대에 제출했다.

그런데 정부가 굵직한 국가산업을 모 대기업에 맡기면서 조사장의 아이템을 그 대기업에다 달래기용으로 줘버린 것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조사장은 청와대에 쳐들어갔다.

“다른 사업해라. 지원해주겠다”고 응대하는 관계자에게 조사장은 “자손을 생각해서 한 일이었다. 나라가 이래서 되겠느냐. 이래서 국방 자립하겠느냐”고 욕만 실컷하고 나왔다고 한다.

朴統(박통) 불호령 이후 학용품 품질혁신

조사장은 국가인허가 필요없는 업종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시장조사를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높은 한국인의 교육열, 경기변동과 계절을 타지 않는 시장, 외상없는 현금구매 등을 감안할 때 학용품시장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단가가 싸 이윤은 낫지만 그래도 일종의 교육산업이라 자부심도 가질 수 있는 사업이었다.

“연필에 침 발라 썼던 시절이 있었어요. 연필심의 질이 낮아 잘 안 써졌던 거죠. 연필심이 불량이니까 연필깎기 안의 칼도 금새 날이 둔해져서 얼마 못쓰던 시절이죠.”

70년대 말경까지도 학용품질이 매우 낮았다.

조사장이 당시 박정희대통령과 관련된 일화 하나를 들려줬다.

교직생활 경험이 있던 박정희대통령이 학용품질이 점점 낮아지자 상공부장관과 제조판매업자들을 불러모아 놓고 ‘아이들이 쓰는 물건을 그렇게 함부로 만들어도 되냐’는 불호령을 했다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검사규정을 엄격히 만들고 관리감시가 철저히 이뤄졌다. 학용품 질이 일대 혁신을 이루고 수출도 급격하게 증가한 것도 박통의 불호령이 있고 난 뒤의 일이다.

그런데 조사장은 요즘 학용품시장을 보면 은근히 걱정이 앞선다. 학용품의 질이 또다시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연필 70?80%가 중국산입니다. 군소업체들이 과당경쟁을 하다보니 중국에서 질낮은 물건만 들여와 팔고 있습니다. 연필심이 한쪽으로 치우쳐 박힌 것은 예사고 나무결이 거칠 것, 심지어 썩은 나무재료를 가지고 만들고 있어요. 아이들이 쓰는 물건을 그렇게 속여서 만들면 안되죠.”

전량 중국에서 만든 제품을 Made in Korea로 파는 경우도 많다.

샤파의 경우 평균 5천개의 연필을 깎을 수 있고 한 번 깎는데 손잡이를 35번 돌리게 돼있다.

그런데 중국에서 들여온 연필은 재질이 나쁘고 연필심이 불량이어서 연필깎기의 칼까지 망가뜨려 오래 못쓴다는 게 조사장의 설명이다.

일 소비자 값싸도 질낮으면 외면

이미 한국의 생필품과 저가품시장은 중국제품에게 잠식당하고 있다.

조사장은 “소모성 생필품은 상당부분 점령당해 시장이 황폐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조사장이 일본에 출장갔을 때의 일이다.

일본의 도소매 문방구에서 시장조사를 해보니 70%가 중국산인 한국문구시장과 달리 일본시장에선 중국산이 1, 2%에 그쳤다.

“일본인에게 중국제품이 싸서 이문이 많이 남을텐테 왜 안 쓰느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말이 팔려고 시도는 해봤는데 너무 질이 낮더라는 겁니다. 일본이 아무리 어려워져도 자식들에게 일본제 연필 못사줄 정도로 가난하지 않다는 것이죠.”

일본인에게 중국제품은 아무리 싸도 자기수준이하라는 것이다. 조사장은 당당한 일본인의 말에 큰 쇼크를 받았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사업차 해외에 나가면 간혹 외국사람들이 “당신네 나라는 왜 그렇게 차입경영을 많이 하느냐”는 지적한다면서 “무리한 차입경영은 직원과 은행, 국가에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다”고 우려했다.

사업에서도 자기 능력껏 분수를 지켜는 것이 중요하는 생각이다. 어떻게 부채없는 회사로 운영하느냐는 질문에 “확장을 안하니까 부채가 없다”는 간단한 대답이다.

“중소기업을 하려면 자기 능력범위에서 해야합니다. 맨파워와 자본, 직원들만 있으면 되고 밑져봐야 자기만 손해보면 되지 남한테 피해를 주면 안되지요.”

그는 이 땅에 정직한 기업이 많아야 한국이 성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기업을 30년 경영해보니 속이는 기업, 사람들이 너무 많더라는 고백이다.

손으로 직접 필기하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다. 아직까지 학생들은 필기도구를 사용하지만 미래엔 공책과 연필이 필요없는 교실에서 공부하게 될지도 모른다.

또 출산율도 점점 줄고 있어 학생수요자도 감소추세에 있다. 조사장에 따르면 20년전에는 1년에 80만명의 신생아가 태어났지만 요즘은 58만명으로 급감했다고 한다.

조사장은 요즘 차세대 사업을 구상하기 위해 해외에도 나가 시장조사도 한다. 조사장이 지나온 인생과 가치관에 비춰 어떤 사업이든 정도와 분수에 벗어난 경영을 상상하기 힘들 것 같다.

그가 65세의 고령에도 빛나는 눈동자를 간직하고 있는 것은 세계를 향한 열린 마음과 국가와 아이들을 소중히 하는 애국심 때문이 아닐까.

(宋今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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