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진오 기자 @이코노미톡뉴스] 인천 동구 금곡로에 위치한 배다리성냥마을박물관이 개관을 맞이해 '신 도깨비불! 인천 성냥공장' 전을 진행한다.

'배다리성냥마을박물관 전경'.(사진=국립민속박물관)

이번 전시는 인천광역시와 국립민속박물관이 손을 잡고 인천 지역의 민속문화를 주목해 지역 문화를 조사 연구하고 지역의 가치를 새롭게 정립하는 인천 민속문화의 해 사업의 일환이다.

개막 전시인 ‘신 도깨비불! 인천성냥공장’에서는 우리나라에 성냥이 도입된 후 성냥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성냥으로 인한 사람들의 생활 변화상을 주목했다. 전시는 인천광역시, 인천광역시 동구, 그리고 국립민속박물관이 함께 했다.

개항장에서 소외된 조선인들의 거주지‘배다리’는 일반적으로 배를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놓고 그 위에 판재를 걸쳐 만든 주교(舟橋)이다. 작은 배가 드나들던 곳으로 금창동과 송현동 일대를 가리킨다.

이곳은 개항 이후 일본인들에게 밀려난 조선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현재는 헌책방 거리로 알려져 있으며, 마을 내에 다양한 예술 활동이 활발히 펼쳐지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냥은 마찰에 의해서 불을 일으키는 마찰성냥이다. 1827년 처음 개발된 이 성냥은 개화승이있던 이동인(李東仁, ?~1881)이 1880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들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일반인이 성냥을 접한 계기는 1886년 독일 마이어(Meyer) 상사 제물포 지점으로 설립된 세창양행(世昌洋行) 무역상사에서 수입된 성냥을 판매하면서 부터이다.

배다리성냥마을박물관이 들어서는 인천광역시 동구 금곡로는 일제강점기 이곳은 인천부 본정 4정목 7번지로 조선인촌주식회사가 있던 자리이다.

'배다리성냥박물관 전시 유물 모습'.(사진=국립민속박물관)

회사 이름에 포함된 인촌(燐寸)은 당시 성냥을 일컫는 말로 그 뜻은 ‘도깨비불’을 의미한다. 불을 얻기 힘들었던 그 시절, 한 번의 마찰로 불이 일어나는 문화적 충격으로 생겨난 말이다.

조선표, 쌍원표, 삼원표 등을 대표 상표로 하는 이 회사는 인천 노동운동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배다리 주민들의 부업과 연계되는 등 배다리마을과 함께해 왔다.

한편, 이 회사는 6·25 전쟁 이후 문을 닫게 되었는데, 이후 이 공장 주변으로 성냥 제조 기술자와 기계 등이 퍼져 대한성냥, 한양성냥, 고려성냥 등이 들어섰고, 우리나라 전역으로 퍼져 각 지역에 성냥공장이 들어서는 한 계기가 됐다.

전시 공간으로 활용한 동인천우체국은 배다리마을 주민들의 사랑방 같은 공간이었다. 따라서 배다리마을 주민이 기억하고 있는 우체국을 남겨두기 위해 이곳에서 사용했던 숙직실과 금고를 그대로 살려 전시 공간으로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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