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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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에게 듣는다①]

한국영화계의 대부(代父)

오래 살다보니 방화도 돈되네

한진흥업 韓甲振(한갑진)회장의 영화 40년

'묻지마라 甲子生(갑자생)’ … 기자하다 영화로

글 / 朴美靜 (박미정 편집위원)

<영화인생 40년의 한갑진 회장>

영화계가 야단법석이 났다. 그야말로 흥청망청하는 분위기마저 감돈다. 지난해 최고의 히트 상품은 영화 ‘친구’가 뽑혔다. 삼성경제연구소가 41개 상품 후보군을 제시한 뒤 네티즌 4천2백여 명과 학계 언론계 광고업계 인사 60여명에게 물어 2001년 10대 히트상품을 선정한 결과다.

전국적으로 8백 20만명의 관객이 들어 방화(邦畵)사상 최고 흥행기록을 세운 ‘친구’에 대해 전문분야 응답자들은 주저없이 1백점 만점을 주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지난해는 우리 영화계에 큰 획이 그어진 해였고, 이젠 영화가 ‘돈 되는 사업’이라는 인식들이 젊은 엘리트 계층사이에 널리 퍼지기 시작하면서 지난해 영화계와 관련된 펀드의 규모는 무려 2천억원대에 달했으며 편당 제작비도 평균 27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액수가 들어갔다. 이 수치는 전년도에 비해 무려 편당 평균 6억원이나 늘어나 숫적으로도 엄청나게 발전을 보인 셈이다.

유난히 험난했던 甲子生 인생

전문가들에 따르면 올해 영화판에 들어올 돈은 4천억원에까지 이를 것으로 보인다. 속된 말로 ‘돈넣고 돈먹는’그런 게임판 같은 기류마저 형성되는 듯 한 것에 대해 영화계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마저 나지막하게 새어 나오고 있다. 그만큼 의견이 분분하고 해법이 제각각인 그야말로 ‘난세’에는 아무래도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정신으로 원로어른들의 말씀을 경청해듣는 슬기가 필요할 듯 싶다.

40여년간 영화제작자의 외길을 걸어온 한국영화계의 대부 한갑진(韓甲振·78, 한진흥업 대표)회장의 영화인생은 그런 의미에서 젊은 영화인들의 귀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인생길은 ‘묻지 마라 갑자생(甲子生)’이라는 말처럼 유난히 험난했다고 운을 뗐지만 그의 얼굴은 ‘큰바위 얼굴’처럼 편안했고, 자신의 인생을 아낌없이 연소해 ‘위업’을 이룬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이른바 ‘달관의 모습’은 보는이로 하여금 위안과 편안함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올해 설을 세면 우리나이로 79세이지만 젊은이들과의 대화에 전혀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순발력과 상황인식이 뚜렷했고, 결정적인 조언의 순간에는 ‘원로의 위엄’마저 느껴지는 그런 모습이었다.

97년 IMF 직전에 경영하던 사업체들은 거의 정리했지만 요즘도 영화 관련 소식에는 현역시절 못지 않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요 몇 해 사이 일어난 한국 영화계의 ‘대지각 변동’에 대해서도 큰 관심과 함께 원로다운 우려의 시각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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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한갑진회장 부부. 스리랑카 국민훈장수여 기념촬영.>

돈 몰리고 사람 몰리면 오염된다

한회장이 가장 염려하는 것은 ‘반짝 경기’를 타고 기초실력이나 철학 없이 불나방들처럼 덥석 영화계에 뛰어드는 젊은이가 행여나 많아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돈’이 몰리고 ‘사람’이 몰리다 보면 ‘오염’되기 쉬운 것이야 어느 분야에서건 인지상정인 점을 감안해 보면 원로의 걱정은 한낱 기우에만 그칠 것 같지는 않아 보이기도 한다.

최근 몇 해 사이에 방화계에는 이제까지는 꿈도 감히 꾸지 못했던 밀리언 관객들이 예사롭게 극장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시발점이 ‘쉬리’ 였고 그 이후 ‘공동경비구역JSA’ 그리고 문제의 ‘친구’가 한국영화사를 새로 쓰게 만들었다.

말이 쉬워 8백20만이지 인구 4천5백만명인 나라에서 이런 관객 숫자는 사실은 엄청난 것이다. 일본은 물론 중국 영화인들조차 경이롭다고 말할 정도이니 그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나 본 사람들이나 한국인들의 저력은 과연 대단하긴 대단하다.

그러나 한회장은 ‘친구’에 대해 그렇게 높은 점수를 주는 것 같지는 않았다. ‘철학이 다소 부재’해 보인다는 것이 그의 평이다. 젊은이들이 모처럼 방화계에 활기를 불어넣어 준 것은 가상한 일이지만 영화 자체의 완성도 면에서는 선뜻 ‘甲’을 주기 어렵다는 얘기다.

비단 ‘친구’뿐 아니라 소위 밀리언 관객들을 불러모은 근간의 이러저러한 방화들, 특히 ‘조폭관련’ 영화들에 대해 원로는 ‘실망’의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만큼 우리 영화계와 후배 영화인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는 반증이었다.

한회장은 자신이 현역으로 활약했던 5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사이, 특히 방화계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60, 70년대에도 비록 작업환경은 열악했지만 영화를 한다는 자존심과 영화에 대한 철학이 우선시되던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지금처럼 영화에 대자본이 투입되고 철저히 상업적인 계산이 앞서는 상황에서는 ‘영화다운 영화’가 나오기는 다소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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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보다는 사람이 우선해야지

명감독에 앞서 인생과 영화에 대한 철학이 확고한 일류 제작자들이 고르게 배치될 때만이 영화계의 진정한 발전이 이루어진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하루살이같은 ‘돈’의 역할보다는 ‘사람’이 세운 틀이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업성이 너무 앞서다보면 언젠가는 냉정한 관객들이 등을 돌린다는 얘기도 나왔다.

경남 고성출신인 한회장은 고향에서 잠시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거쳐 부산 국제신문 정치부장을 지낸 언론인 출신의 특이한 경력으로 1957년 영화판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영화의 지방판권, 부산과 경남 일대 극장에 대한 영화 배급권을 맡아 판매하는 일을 했다. 어느 일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초심자에게 영화배급판매업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회장이 배급업에 손대면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수입관리였다. 당시만 해도 공식 입장권이 따로 없던 시절이어서 얼렁뚱땅하는 사이에 판매 수입은 적당히 속일 수가 있어서 이 문제로 골치를 앓아야 했다.

이런 저런 곤경에 처하자 한회장은 기왕에 영화관계 사업을 할 바에야 아예 제작사업을 해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배급업에는 상당한 자금이 필요했지만 영화제작은 기획만 하고 기발하면 자기 자금이 없어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벤처사업’과 비슷한 ‘아이디어 사업’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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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제11회 몬트리올 영화제 2개부문수상 축하연
‘ 은마는 오지 않는다’ 에 한갑진회장>

영화는 상품, 상품은 팔려야 한다

기자출신답게 한회장은 직접 시나리오를 쓰기로 하고 서울 을지로 국도극장 근처 허름한 여관방에 들어앉았다. 첫 시나리오가 ‘아카시아에 비오는 밤’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빅 히트한 유행가 제목을 차용한 것이다. 시나리오를 완성해 전국 배급업자에게 배부했더니 의외로 반응이 좋아 전국 배급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한회장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영화 간판이 붙자 지나가던 사람이 ‘아가씨 비오는 밤에가 뭐꼬’라고 자기들끼리 주고 받는 얘기를 들으면서 히트하긴 어렵다는 직감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그만큼 영화에 있어서 ‘제목장사’는 절대적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아무튼 첫 작품은 기대만큼 성공은 못했지만 손해는 보지 않았다고 한다.

“완성된 영화는 상품이며 상품은 팔려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지만 이상과 현실에는 괴리가 있었다. 영화를 상영할 공간이 절대부족한 당시 상황에서는 제작자의 고뇌는 극한 상황에까지 달했다고 한다.

지금이야 멀티플렉스라고 해서 한 영화관에 몇 개의 극장이 한꺼번에 들어앉아, 강남의 한 복합상영관의 경우 지난 한해 동안 1천만명이 넘는 관객이 들었다는 얘기를 듣고 보면 30, 40년 전 우리 영화계에 ‘밥줄’을 매단 영화인들이 차라리 영웅처럼 돋보인다는 얘기도 나올 법하다.

‘이수일과 심순애’로 대박

한회장은 1964년 첫작품이 그럭저럭 평년작은 기록하자 용기를 얻어 이듬해 ‘이수일과 심순애’를 제작했다. 이 작품을 제작하려하자 사람들은 코웃음을 쳤다. 지금 신파 영화 따위를 제작해서야 쓰겠느냐는 비난이 대세를 이뤘지만 “신파고 구파고 간에 대중이 관심을 갖는 작품이라면 흥행에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제작을 추진했다”고 회상했다. 이 영화가 요즘말로 ‘대박’을 터뜨리면서 제작자 한갑진(韓甲振)의 존재와 명성을 굳힐 수 있게 되었다.

인구대비로 볼 때 ‘친구’ 못지 않은 흥행이었다.

한회장은 당시의 ‘시대흐름’은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모두들 ‘잘 살아보세’하는 분위기여서 이수일이 사랑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돈’을 끌어모으는 그 과정이 관객들에게 틀림없이 어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 착안했다고 말했다.

자신을 성공가도로 달리게 만들어준 ‘이수일과 심순애’의 흥행성공을 얘기하면서 그는 다시금 60년대 장년의 시절로 돌아간 듯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거기에는 방화 280여편을 제작했던 자부심도 함께 자리했다.

한회장은 요즘 매일 정해진 스케줄대로 움직인다. 철학자 칸트의 일상생활을 보고 이웃주민들이 시간을 알았듯이 그의 주변 사람들도 시계처럼 정확한 회장의 일상에 시간을 맞춘다. 부인 손병희(孫炳嬉)여사와 늘 아침 5시면 어김없이 기상, 6시에는 집을 나서, 남산길을 산책한다. 아침 후에는 독경과 명상에 들어간다. 오전 9시 30분에는 사무실로 출근, 글을 쓰는 일은 요즘도 거르지 않는다. 점심 후에는 1시간 정도 운동을 하고 그 이후에는 독서와 TV 시청 등으로 소일한다. 부인의 헌신적인 내조도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중의 하나이다.

한회장은 자신의 부인을 엄동설한 속에 피어난 한 송이 매화로 설명한다.

젊은이가 이런 말을 한다면 ‘팔불출’이라는 소리를 듣겠지만 인생의 신산(辛酸)을 함께 겪어온 노부부에게서 이런 얘기를 듣는 것은 정초의 덕담 중에서도 괜찮은 스토리같다. 영화사 일을 함께 해온 노부부는 요즘도 영화 얘기에 시간가는 줄 모른다고 한다. 한회장은 다시 젊음이 찾아와도 영화일을 하고 싶고 영화계의 체계를 세우는 작업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한갑진>

- 동아대 법정대 졸업
- 국제신문 정치부장
- 대양영화주식회사 대표이사
- 한진흥업주식회사 대표이사
- 한국영화제작자협회장
- 세계영화제작자연맹 이사
- 주(駐) 한국 스리랑카 명예영사
- 17회 국제영화예술상 최우수 작품상
- 20· 21회 아시아영화제 작품상
- 12· 13· 16· 21· 23회 대종상 대통령상 및 최우수상
- 11회 몬트리올영화제 2개부문 수상
- 28회 백상예술대상 4개부문 수상
- 스리랑카 프리마다사 대통령으로부터 ‘ 라미아’ 최고 훈장 수훈 등
- <부처님의 생애><저승에 갔다온 사람들>등 저서 및 편· 역서 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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