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2월호]

KAL趙重勳(조중훈) 명예회장

미워할 수 없는 민족의 날개사업

세계 10대 항공사 발돋움

개인 종합소득 1,2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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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를 판매한 애국사업

지난 80년대 경제기자의 취재록에 실려있는 KAL 관련 미발표 원고를 다시 들춰보니 애국심을 판매하는 스피드재벌로 묘사되어 있다.

KAL은 민족의 날개라고 표방했다.

순수한 같은 피를 나눈 단일민족의식에다 민족의 날개라고 선전했으니 가슴이 뭉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KAL을 바탕으로 축성한 한진그룹을 미워할 수 없는 재벌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 두었던 것이다.

당시 해외여행 때 자국기를 타는 기분은 말할 수 없었다. 반면에 남의 나라 비행기를 타게되면 반민족 행위를 저질렀지 않았느냐고 스스로 두려운 마음을 가졌었다.

이 무렵 KAL의 사세는 세계 10대 항공사에 진입했다고 했다. 민족의 날개가 5대양 6대주에 펼쳐지도록 4천만명이 지극정성으로 성원했던 소망의 결집이었다.

KAL은 당시 자사의 영업에 대한민국 태극기를 떳떳이 게양할 수 있는 유일한 항공사였다. 민간기업이면서도 국익을 대변하는 사업으로 국민 앞에 당당히 행세할 수 있는 특권을 KAL이 누렸었다.

반면에 우리 국적기를 이용하게 된 우리네는 언어 소통의 불안감이 없고 여행규칙에 서툴러 야단 맞을 위험이 없어 좋았다. KAL을 타므로 특별히 운수 좋은 날에는 라면과 곰탕을 먹을 수 있었고, 옆사람 눈치 안 보고 고추장도 얻어먹을 수 있었다. 조심성 없이 평소의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여행할 수 있는 항공사가 지구상에는 KAL 하나뿐이었다.

기내에 들어서면 긴장을 풀고 포근한 잠을 청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내집에 들어선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실로 KAL은 하늘을 나르는 우리의 영토로서 4천만명을 주주로 거느린 가장 튼튼한 배경하에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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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람과 울분의 세계 10

지난 83년도 한진그룹의 매출액은 16천억원으로 재벌순위 9위에 올랐었다.

이중 KAL의 매출액이 93백억원으로 전체의 64%를 차지했다. 모기업인 한진을 훨씬 능가했다.

한진은 KAL을 날개로 육운과 해운과 항공 등 육해공을 제패한 스피드재벌이라는 칭호가 이때에 붙여졌다. 이때 ICAO(국제민간항공기구) 보고서에 따르면 국제선 운송실적 기준으로 KAL8위였다.

한진이 KAL을 인수한 69년 화물운송실적이 17백톤에서 84년도에는 191천톤으로 늘어났다. 동양권에서는 일본항공에 이어 2위였다.

당시 DC9 1대를 최신예기로 자랑하며 겨우 8대로 발족되어 보잉747 점보기 등 44대를 움직이는 대형항공사로 발돋움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83년 소련의 미사일 공격으로 KAL기가 격추되어 온 국민의 가슴을 잔인하게 찧어놓았다. 아직도 왜 KAL기가 항로를 이탈하여 미사일 공격을 받게 되었는지 정확히 모른다.

국민적 사랑과 신뢰가 울분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한때 안전도 세계제일을 자랑했던 것이 KAL이었다.

그러던 것이 768월 이란 테헤란에서의 화물기 추락사고와 78년 소련 무르만스크 강제착륙사고도 다시 생각케 했다. 민족의 날개를 성원하던 순박한 애정이 미움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 항공사 사장은 밤늦게 걸려오는 외부전화를 받지 않는 법이라는 말이 있었다.

한밤중 전화라면 필경 사고보고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는 해명이다. 그만큼 긴장 속에 살아가는 것이 항공사 경영이라는 의미이다.

KAL의 잦은 사고는 짧은 기간에 급성장하는 과정에 쌓인 여독이 지나쳤기 때문이 아닐까 관측되었다. 당시 나라가 잘 살아보자고 모든 부문에서 무리를 마다하지 않고 과로를 두려워하지 않았었다.

결국 민족의 날개에 실린 국가적 민족적 소명감이 너무 무거워 KAL도 과로를 범했었다는 느낌이었다.

민항 15년의 눈부신 성장기록

이 시절 항공산업은 194810월 합명회사로 발족한 대한민국항공(KNA)으로부터 37주년을 맞을 때였다.

가난한 신생 독립국의 초라한 KNA항공사는 설립 14년을 버티다가 적자에 시달려 해산되었다.

그 뒤 국영 KAL62년에 설립되었다가 두 차례의 공개입찰 끝에 한진상사가 인수했다.

KAL의 민영화는 프로펠러기의 제트기 교체를 촉진시켰다. KAL 조중훈(趙重勳) 사장은 693월 취임 후 가장 먼저 747도입위원회를 구성하고 보잉사와 점보기 두 대 구입계약을 맺었다.

점보기 1번기가 735월 김포공항에 도착하고 7월에는 2번기가 도착했다. 그리고 75년에는 유럽 항공사들이 자랑하던 에어버스 3대를 도입했다.

민영화 10주년이던 794월에는 일시에 점보기 10대 구매계약을 맺어 KAL의 명성을 미국 본토에 널리 알릴 수 있었다.

KAL의 노선도 60년대 사이공과 방콕으로부터 73년 태평양 여객노선, 75년 파리 노선, 76년 바레인과 취리히 노선, 78년 제다와 쿠웨이트 노선으로 급격히 확장했다. 그리고 81년에는 리비아의 트리폴리에 기착함으로써 아프리카대륙에 태극기를 꽂았다.

KAL은 노선 확장과 함께 항공기 제조업 분야에 투자하고 항공기술연구소를 설립하고 항공대학을 인수했다.

항공기 제조분야는 73년 엔진공장 준공, 79년 자가용 헬기 판매, 82년 국산전투기 제공호’(制空號) 출고까지 이르렀다.

KAL83년도 비행거리는 782Km로 지구 둘레 2천 바퀴에 달했다. 수송인원은 1년에 480만명에 이르렀고 민영화 이후 15년간 수송실적은 39백만명으로 당시 우리나라 총인구와 거의 맞먹었다.

KAL의 자산은 민영화 당시 29억원에서 9천억원으로 불어났고 영업망은 세계 150개 도시에 뻗쳤다.

월남 특수로 재벌성 축조

한진그룹의 영업전선은 육··3면에 걸쳐 무한정 한 관할구역을 대상으로 스피드경영을 생명으로 삼았다.

한진은 1945년 인천시 해안동에서 트럭 한 대로 시작한 화물운송업이 모태이다. 그리고 창업자 조중훈 사장이 발로 뛰어 미8군 구매처와 화물수송계약을 맺은 것이 성장의 발판이었다. 60년대에 접어들어 미군용 버스 80대를 불하받아 서울과 인천간 여객버스를 운행하면서 조사장의 이름이 경제계에 올라왔다.

한진이 두 번째로 획기적 성장세를 잡은 것은 663월 주월 미군구매처와 하역 및 수송계약을 맺을 수 있었던 기회이다.

뒤이어 맹호부대의 파월을 계기로 한진이 전쟁물자 수송이라는 특수경기를 누릴 수 있었다. 이 무렵 캘리포니아 대학을 졸업한 동생 조중건(趙重建)씨가 한진에 합류하여 뻗어나는 사세를 배가시켰다.

조사장 형제는 용감하게 미 펜타곤에 접근하여 사상 최대규모인 725만 달러의 하역 및 수송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한진은 이 계약으로부터 5년만에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12천만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었다.

이를 기세로 67년에는 삼성으로부터 동양화재보험을 인수함으로써 무명의 한진을 재계의 무대 위에 올려놓는 계기가 되었다. 화재보험 인수이후 한진은 노른자위로 꼽힌 미도파백화점 옆 대지를 사들여 빌딩을 세우고 한국공항주식회사를 인수하고 한일개발을 설립했다.

또한 미국의 시랜드사와 컨테이너 수송계약을 체결하고 69년도에는 KAL을 인수함으로써 월남특수의 실체를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70년대에는 한진이 재벌성을 축성한 시기였다. 월남에서 중동으로 발길을 돌려 77년 쿠웨이트 하역업에 진출하고 79년도에는 사우디아라비아 화물운송업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독점사업의 프리미엄

재계의 중심권에 오른 한진은 항공대학 인수와 항공산업에의 투자로 거의 독점적인 영토를 마음껏 개척할 수 있었다.

한국항공대는 1952년 교통고교에 특설된 2년제 항공과로 출발하여 4년제 국립항공대로 개편된 전문대학이었다. 한진은 항공대 인수 후 대학발전계획을 세워 시설을 개체하고 항공기술요원 양성소와 항공문제연구소를 설립, 미래투자에 착수했다.

또 창업자의 아호를 붙인 정석(靜石)항공공고도 이때 설립했다.

이보다 앞서 한진은 재벌의 문화사업으로 이승만박사가 설립한 인하대학교를 인수하여 인재양성에 참여한 바 있다. 인하대는 1953년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설립된 민족계 대학으로 재단 이사장이 이기붕(李起鵬) 정구영(鄭求瑛) 김장훈(金長勳) 윤태림(尹泰林) 권영대(權寧大) 씨 등으로 이어져 왔었다.

한진이 인하대를 인수한 것은 이박사의 애국애족정신을 승계한다는 의미가 있었지만 기업발상지인 인천에 위치한 대학이라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 무렵 한진은 항공산업의 독점적 지위에 대한 정부와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독점에 대한 시비보다는 인력양성과 기술축적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한진이 이때부터 방위산업에 참여하여 최신 훈련장비와 정비시설을 도입하고 국산 헬리콥터와 전투기 조립생산을 시작했다.

이렇게 한진그룹이 샛별처럼 떠오르자 창업자인 조중훈 회장이 취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조회장 관련기사는 개성상인의 출세기였다.

불교신자인 조회장이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기는 모습을 보고 언론에서는 부처님상이라고 평했다. 조회장은 대대로 크게 행세해 온 서울 토박이의 둘째로 태어났는데도 언론은 개성상인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뛰어난 상인정신 때문이었다.

트럭 한 대로 한진상사 창립

조회장은 열다섯살에 선친의 사업이 기울자 보수적인 선비집안에서 과감히 상인의 길로 나섰다. 8남매의 둘째로 태어나 충분히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가 어려운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조회장 이력서에 따르면 미동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명문 휘문고에 진학했지만 형편이 따르지 않아 진해 해군기지에 있던 해기원 양성소 기관과를 졸업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리고 일본 고베에 있던 잠수함조선소에 입사하여 기관사로 동남아화물선에 승선하여 각국의 항구를 구경할 수 있었다. 당시 항구에는 히틀러에 쫓기는 유태인들이 많아 맨주먹으로 일어서는 그들의 상술을 배울 수 있었다.

스물두살 때 귀국한 조회장은 눈으로 익힌 유태인 상술을 밑천으로 이연공업이라는 조그마한 공장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첫사업은 일제의 군수공장에 흡수되고 징용에 끌려가 잠시 군속으로 근무하다 8·15를 맞았다.

해방후 인천항에 각종 화물이 밀려오는 것을 보고 그의 필생의 사업이 된 운송업에 뛰어들었다.

한진상사는 부두에 하역되는 짐을 실어 나르는 한편 전기가 모자라던 시절 불티나게 팔린 카바이트 장사도 겸했다. 당시 삼척의 북삼화학에서 독점 생산한 카바이트는 북한의 5·4단전(斷電)으로 수요가 폭발했다.

조씨는 트럭으로 여름에 카바이트를 실어와서 겨울에 파는 방식으로 이익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6·25가 그의 사업을 산산조각 내고 말았다. 맨주먹으로 부산 피난을 다녀온 후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폐허가 된 인천항 복구용 물자수송이 한진상사 재건사업이었다.

사업은 곧 예술감성적 경영

조회장 사업은 미군과의 우의를 바탕으로 재건되었다.

8군 군수당국과 수송계약을 맺은 후 귀국하는 미군병사에게 환송파티를 열어주는 정성을 베풀기도 했다. 이 때문에 미군들의 눈에 조씨는 영리하고 정직한 상인으로 비춰졌다. 그리고 미군에 정성을 쏟은 만큼 한진의 수송실적도 늘어나 60년도에 2백만달러를 넘어섰다.

이 무렵 서울로 올라온 조씨는 반도호텔에 사무실을 열고 자하문 밖 부암동에 저택을 마련하여 수시로 미군을 초대하곤 했다. 그러니까 철저한 고객관리로부터 한진의 운수용역사업은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뒤 월남에서 미군 수송장비와 물자수송의 독점계약을 맺을 수 있었던 것도 수천명의 미군을 초대한 접객영업전략의 개가로 믿어진다.

그러나 조씨의 사업은 69KAL의 인수로 용역군납에서 항공산업으로 주력을 돌려 세계 10대 항공사로 육성함으로써 꽃을 피우게 되었다.

80년대 초반 조중훈 회장의 종합소득납세액은 최상위를 기록했다. 80년과 81년에는 1, 83년도에는 3위로 국내 최고재벌 총수로 자부할만 했다. 당시 전경련 부회장으로 활약했지만 회장을 맡지는 못했었다. 제조업이 아닌 서비스업 재벌이 전경련 회장이 될 수 있느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에 되돌아 봐도 80년대는 KAL과 조중훈 회장의 전성기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성장기 때 바이런에 심취하고 삼국지를 탐독했었다는 조회장이다. 그래서인지 전성기적 재벌 총수로서 사업은 곧 예술이라며 감성이 담긴 비즈니스를 강조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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