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1월 17일은 망국일이었다
11월은 날이 건조해지는 시기로 11월 9일 '소방의 날'이 있는 '불조심 강조의 달로' 불리지만, 대한민국에 있어서 11월은 6월의 '호국·보훈의 달', 8월의 광복절에 못지않은 의미깊은 날들이 많다. 11월 17일은 '순국선열의 날'로, 나라의 주권을 위해 몸과 정신을 헌신한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기리고 후세에 널리 알리기 위해 제정한 뜨거운 기념일이다. 또한 114년 전인, 1905년 11월 17일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이 있던 가슴 아픈 날도 존재한다. (편집자 주) |
[안경하 기자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이톡뉴스)] 11월 7일은 한반도 역사에서 매우 슬프면서도 뜨거운 의미의 날들이 많다.
114년 전인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에 의해 외교권을 박탈당했다. 을사늑약이었다. 조선에 망국일이 생겼다.
80년 전 아직 해방 전인 1939년 11월 21일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제31회 임시총회에 의거 11월 17일이 순국선열공동기념일로 제정되었다. '순국선열의 날'이다.
조선 망국·국모 탄생·순국선열의 날
11월 17일(1905년)은 대한제국의 망국일이자 조선의 국모인 명성왕후의 출생일(1851년)이기도 하다.
또한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였던 최익현 선생이 을사늑약(을사조약)에 항거해 박제순,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 등의 을사 5적(五賊)의 처단을 주장하고 1906년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해산 후 일제에 의거 재판을 받고 대마도 유배 중에 1906년 11월 17일(양력 1907년 1월 1일) 단식으로 사망한 날이다.
최익현 선생은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을사늑약, NO 비준절차·황제 재가…국제법 위반
조선의 국명인 대한제국은 이날을 기점으로 외교권을 일제에 양도함으로써 외교권이 없는 나라가 되었다. 조약의 서명에는 외무대신 박제순과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서명이 선명히 기록돼 있으나 당시 황제인 고종의 서명이나 도장은 찍혀 있지 않았다. 당시의 문서는 덕수궁 중명전에 전시되어 있다.
이 조약으로 통감부가 설치되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Itō Hirobumi, 伊藤博文, 이등박문)가 앉았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반에 안중근 의사의 FN M1900에서 발사된 3발의 총성으로 중국 하얼빈역에서 열차 안에서 사망했다.
을사늑약은 비준 절차와 황제의 재가가 없는 국제법 위반 협약으로, 고종은 조약의 무효화의 주창을 위해 헤이그 특사로 이준, 이상설, 이위종 열사를 파견했으나 인정받지는 못했다.
아래는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 문서의 내용.
일본국 정부와 한국 정부는 두 제국을 결합하는 공동의 이익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한국이 실제로 부강해졌다고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 이 목적을 위해 아래에 열거된 조목들을 약속해 정한다. 제1조. 일본국 정부는 도쿄에 있는 외무성을 통해 금후에 한국의 외국과의 관계 및 사무를 감독 지휘하며, 일본국의 외교대표자와 영사는 외국에 체류하는 한국의 관리와 백성 및 그 이익을 보호한다. 이상의 증거로 아래의 사람들은 각기 본국 정부에서 상당한 위임을 받아 본 협약에 이름을 적고 도장을 찍는다. 광무 9년 11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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