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方急愼勿言我死""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 일본의 대백과사전에 등록되어 있는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초상화(견본채색, 22cm x 28cm).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6호로 등록됐다. <출처=동아대학교 박물관

[안경하 기자 @이코노미톡뉴스] 여해(汝諧) 이순신 장군은 421년 전 오늘인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그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게 5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1598년 12월 16일 오전 8시


이순신 장군은 이날, 왼쪽 가슴을 관통한 탄환에 의해 전사했다.

"此讎若除 死即無憾"
이 원수를 무찌를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 노량 해전 직전 이순신의 맹세 by 이충무공행록

12척의 전선으로 대승리를 거두었던 명량해전을 통해 다시 조선의 제해권을 장악한 이순신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이후 왜군이 철수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왜군의 퇴로가 왜군의 마지막이었음을 인지했고, 그래서 그는 노량을 선택했다. 그가 노량해전 출전 직전에 남긴 말이 그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무패의 이순신 장군을 잘 아는 명나라의 진린(陳璘) 도둑은 이순신과 함께 왜군을 상대로 최후의 결전을 치른다. 노량해전이다.

《노량해전》

조명연합군(조선 수군 7,328명+명군10,000여 명) vs 왜군 17,500여 명
판옥선 60척+명군 300척 vs 300척
결과 판옥선 -1척, 왜선 -200척
조명연합군 -800여명, 왜군 -7,000여명

왜군 장수 고니시를 구출하기 위해 모이기 시작한 왜군과의 마지막 혈투를 위해 시작된 노량해전의 개시는 매복했던 조선 수군의 기습이었다. 이어 명군 진린 함대가 투입되었다. 

포위당한 왜군을 선봉장 이순신(무의공)이 돌격, 왜선을 돌파해 왜구의 전열을 흔들었다. 이에 왜선 선봉대는 진린 대장선을 노렸으나 이순신 장군이 그를 구했다.

휘몰아치는 조선 수군 때문에 왜선들은 막힌 외길인 관음포로 도망갔다. 한편 왜선은 돌격하는 이순신 대장선을 노렸다. 이에 진린 도독이 포위망을 뚫고 이순신을 구했다. 배수진을 친 왜군의 저항은 심했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은 적이 쏜 탄환이 그의 왼쪽 가슴에 박혔다. 

"戰方急愼勿言我死"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노량해전은 이순신 장군의 최후 해전이자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 왜선 200여 척이 불타거나 섬멸됐고, 왜군 7,000여 명이 사망했다. 100여 척 가까이 남은 왜선은 남해로 도망갔다.

조명연합군은 가리포 첨사 이영남(李英男), 낙안군수 방덕룡(方德龍), 흥양현감 고덕장(高德蔣) 등 장수 10명이 전사했고, 명군은 등자룡 전사와 그가 타고 있던 판옥선 1척이 소실되었다.

7년 전쟁이 끝난 후, 45년이 지난 1643년, 인조는 이순신에게 무인으로서의 최고격인 '충무(忠武)'의 시호를 내렸다. 조선 시대에 시호 충무 시호는 총 9명이 받았다. 조영무, 이준, 남이, 김시민, 이수일, 정충신, 구인후, 김응하가 나머지 8명이다.

현존하지 않고 있는 초상화 4점


지금까지 알려진 충무 이순신 공의 초상화는 5점이지만 1점은 아산 현충사에 있는 표준 영정으로 1953년에 장우성이 그린 초상화다. 4점 모두 일제 강점기 시대를 거쳐 소각되거나 분실·유출되어 현존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충무 이순신 초상화》
① 통영 착량묘: 행방불명
② 한산도 제승당: 행방불명, 수채화 형식, 1920년대 외국인에 의해 반출
③ 순천 예고 신당포(충무사): 無, 문관복을 입은 이순신, 1944년 일제에 의해 소각
④ 여수 장군도(해신당): 행방불명, 김차봉에 의해 유출 후 골동품점에 매각
⑤ 아산 현충사: 장우성본의 표준 영정

착량묘의 초상화 원본은 사라진 상태로 유실의 시기조차 불분명하다. 착량묘는 임란 직후인 1599년, 장군 수하의 군사와 인근 백성들이 이순신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의 시초격이다. 당시 초상화는 승병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그린 것으로 이순신 사후 최초의 초상화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실제의 이순신과 매우 닮은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착량묘의 이순신 초상화와 흡사한 채색된 초상화 그림이 동아대박물관에 있다. 강렬한 눈빛과 굳게 다문 입술과 뾰족한 수염 등 다소 강한 인상을 주고 있다.

한산도 제승당에 있던 초상화는 1920년대에 이 지역을 찾은 외국인에 의해 국외로 반출됐다. 현재 봉안된 영정은 1978년 정형모 화백이 그린 것이다.

순천 충무사 신성포에 있던 초상화는 1944년 일제에 의해 신당(현 충무사)과 함께 소각됐다. 충무사는 1608년에 한 승려가 이순신 장군을 기리기 위해 지은 것으로 1948년에 충무사로 탄생했다. 현재의 영정은 김은호본(1950년).

여수 장군 영당(해신당)의 초상화는 1943년에 당시의 여수경찰서 형사 김차봉이 가지고 가 골동품점에 매각했다고 전해진다.

표준 영정으로 지정된 아산 현충사의 이순신 초상화는 1953년 장우성본으로, 지난 1973년에 박정희 대통령의 '충무공 영정 통일사업'을 통해 국가 표준 영정이 됐다.

그러나 장우성 화백과 김은호 화백은 친일 행적이 밝혀지고 있는 만큼 충무공 이순신 초상화의 표준 영정 문제에 지속적인 논란이 남아있다.

한편,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고 후원하는 단체들이 많은 편이다. 아산문화재단, 명량문화재단, 서울여해재단(윤동한 전 한국콜마 회장), 여수여행재단, 부산여해재단, 이순신포럼, 충무공이순신기념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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