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6월 21일 ~1932년 12월 19일 7시 40분(25세)

▲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의 윤봉길 의사 동상. <사진=이코노미톡뉴스>

[안경하 기자 @이코노미톡뉴스] 87년 전인 1932년 12월 19일, 이날은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이었다. 

1932년, 12월 19일 오전 06시 30분, 일본 가나자와 구금소의 검찰관이 윤 의사에게 사형집행이 오늘임을 알렸다. 윤 의사는 바로 답했다.

87년 전, 12월 19일
"사형은 이미 각오하여 이에 임하여 하등의 할 말이 없다"

07시 40분, 윤 의사는 가나자와 육군작업장의 서북쪽 골짜기로 끌려가 눈에는 흰 천이 감싸였고, 양팔은 십자형태의 형틀에 묶여 있는 상태로 포박당했다. 그의 10미터 떨어진 앞에서 2명의 사수는 엎드려 자세를 취한 후 총을 발사했다. 윤 의사의 미간부에 작은 구멍이 생겼고, 그는 총살형으로 절명했다. 그의 나이 25세.

"매헌 윤봉길"
(1908년 6월 21일 ~1932년 12월 19일 7시 40분)

<1932년, 윤봉길 의사 동선>

4월 29일, 의거일
5월 25일, 사형선고
11월 18일, 일본 본국 압송, 오사카 독방 수감
12월 18일, 가나자와 구금소 이감
12월 19일 6시 30분, "사형은 이미 각오하여 이에 임하여 하등의 할 말이 없다"
12월 19일 7시 40분, "..."

(자료제공: (사)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87년 전, 4월 29일 오전 @中 상해 홍커우공원

금요일 이 날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전 07시 50분, 윤봉길은 양복에 스프링코트를 입고 도시락과 수통폭탄을 어깨에 매고 중국 상해시 홍커우공원(루쉰 공원)에 도착했다. 11시 50분, '일본 천장절 및 전승 기념식' 행사 2부가 진행될 때, 일본 기마병의 뒤로 이동해 동쪽에 위치한 단상에서 약 4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들고있던 수통폭탄을 단상 한 가운데로 던졌다.

당시 공원에는 기념 행사식을 보기 위해 상해에 거주 중인 일본인 약 1만 명과 파견된 일본군 제9사단과 해병대 병력 등 1만 2천 명, 그리고 기타 각국의 사절단과 초청자 등 모두 약 3만 명이 모여 있었다.

폭발한 폭탄으로 거류민단 행정위원장인 가와바다 사다쓰구는 다음날 사망, 상해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은 5월 26일 사망, 시게미쓰 마모루 주중공사는 오른발 절단,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은 왼발 절단, 해군사령관 노무라 요시사부는 오른쪽 눈 실명, 토모노 민단서기장과 무라이 주중총영사는 큰 부상을 입었다. 

윤 의사는 도시락 폭탄으로 자결하려 계획했으나, 일본 헌병과 호위병에 의해 제압을 당하고 체포되었다. 이어서 몰린 군중들에 의해 구타를 당해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차가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고 당시 보도한 신문이 전했다. 이후 군법재판을 통해 의거 한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5월 25일, 사형이 선고되었다.

김구 단장의 은신처의 자백을 위해 일제는 윤 의사의 사형 집행을 잠시 잠시 미뤘다. 11월 18일, 일본 우편수송선 대양환을 통해 윤 의사는 일본 본국으로 압송되었다. 이틀 후에는 고베항을 거쳐 오사카로 이동, 오사카 육군위수형무소 독방에 약 한 달간 수감되었다. 12월 18일에는 가나자와 구금소로 이감되었다. 그의 마지막 위치다.

▲ 상해의거 전 단상의 모습과 의거 후 체포된 윤봉길 의사. <사진출처=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매헌 윤봉길의사 순국 87주기 추모식이 12월 19일 오전 11시, 서울시 용산구 효창공원 윤봉길의사 묘역에서 거행된다. 행사에는 오진영 국가보훈처 서울지방보훈청장과 김원웅 광복회장, 김형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장, 윤봉길잠수함부대원, 독립선열단체회원, 유족 등 400여명이 참석해 윤 의사의 수호 정신을 기리고 명복을 빈다.

한편, 윤봉길 의사의 독립정신의 뜻을 기리기 위해 롯데백화점은 지난 2015년부터 매년 2억 원씩 올해까지 총 10억 원을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에 후원하고 있다. 또한 GS칼텍스는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으로 독립운동가 윤봉길과 한용운의 글씨체를 각각 '독립서체 윤봉길', '독립서체 한용운'글꼴로 개발해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1932년 10월 11일, 옥중 청위서 내용 요약>

문 : 네가 윤봉길인가?
윤 : 그렇다.

문 : 너는 금년 4월 29일 상해 신공원에서 있었던 관병식(열병식) 식장에서 폭탄을 던지기 이전에 유서를 쓴 일이 있는가?
윤 : 김구의 요구로 나의 약력과 감상 등을 써서 건네준 일이 있다.

문 : 그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진술하라.
윤 : 금년 4월 27일, 내가 상해 신공원의 관병식장 모습을 미리 돌아보고 온 날 오후 6시 반경, 김구가 동방공우(東方公寓)에 있었던 나를 찾아왔었다. 그리고 김구가 말하기를 "이 밤이 자네의 마지막 날이니 자네의 약력과 감상을 쓰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나는 평상시 사용하던 중국제 수첩에 연필로 썼으며, 딴 일을 쓴 것은 찢어 버린 후, 그 수첩을 김구에게 주었다.

문 : 유서의 내용은 어떠한 것인가?
윤 : 나의 이력서와 내가 지은 고향의 '시량리가(枾梁里歌)' 및 나의 자식들에 대한 유서, 그리고 조선 청년에 대한 나의 감상을 수필문으로 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금년 4월 27일 오후 1시경, 내가 상해 신공원의 식장을 미리 돌아보러 갔을 때의 일이다. 내가 밟은 잔디는 그래도 일어나지 못하는 것도 있고 또 다시금 일어나는 것도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인간 또한 힘이 강한 자에게 짓밟힐 때에는 이 잔디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니 대단히 슬픈 감정이 솟아 올랐다. 그때의 기분을 유서로 써 두었다.

문 : 유서 가운데 이력은 사실과 틀림없는가?
윤 : 기구가 갑자기 요구하였기 때문에 쓴 것이므로 연도에 다소 틀림이 있을지도 모른다. 유서를 쓸 때에도 나는 김구에게 그것을 거절했지만, 김구는 "연도쯤은 조금 틀려도 관계 없으니 자신의 이사만 똑똑하게 쓰라"고 말 하였을 정도였다. 그리고 9시 경까지 약 2시간 반이 걸려서 썼는데 꽤 멋없는 글을 썼다.

문 : 너는 시(詩)를 쓸만한 소양이 있는가?
윤 : 나는 서당에 다니고 있을 당시 매일 시 공부를 했으며 또 열심히 공부했었는데 내가 써서 발표한 것 가운데에는 여러 사람에게서 칭찬받은 것도 있었다. 멋있게 된 것은 지금까지도 잘 기억하고 있어서 당시 지은대로 틀림없이 쓸 수 있다.

문 : 네가 고향의 '시량리가(枾梁里歌)'를 쓴 것은 누구인가가 부탁해서 쓴 것인가?
윤 : 누구에게도 부탁한 것이 아니고, 순전히 혼자서 자작한 것이다. 그러나 곡은 당시 유행하던 노래의 곡조를 썼다.

문 : 너의 유서를 김구가 세상에 발표하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윤 : 그러한 말은 하지 않았다. 만일 발표하겠다고 미리 말했더라면 나는 충분히 생각한 연후에 상세한 자구로 좀 더 훌륭하게 썼을 것이다. 그러나 김구는 내가 갑작스럽게 쓰고 있는 것을 보고 "자네는 정말 소양이 풍부하군 그래"라고 말하였다. 한 가지 빠트렸지만, 유서의 내용 가운데 김구에 대한 유서도 동시에 썼다.

문 : 이상과 같이 진술한 유서 이외에 따로 또 쓴 것이 없는가?
윤 : 그것 뿐이다. 더 없다.

문 : 너의 유서 문제에 대해서 그 밖에 진술할 것은 없는가?
윤 : 없다!

진술인 : 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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