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당시, 지평리전투 기념비 제막식 행사(1966년). (사진=국가기록원)
6.25전쟁 당시, 지평리전투 기념비 제막식 행사(1966년). (사진=국가기록원)

[김무일 (파리1대학 국제정치학박사·(前)한전KDN(주)상임감사·(前)주 프랑스국방무관)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이톡뉴스)] 지평리 전투는 1951년 중공군 2월 공세 당시 미 제2사단 제23연대와 이 연대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의 통합 5,600여명이 지평리에서 중공군 제39군 예하 3개 사단 3만 명의 집중공격을 막아낸 방어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미 제23연대와 프랑스 대대는 좌우 인접부대가 중공군에게 밀려 철수하게 됨에 따라 중공군 제39군의 사면포위 하에 놓이게 됐으나 중부전선 교통 요충지인 지평리를 고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병력을 1,6km의 원형 사주방어태세로 배치해 중공군의 파상공격을 고립 상태에서 제23연대에 배속된 3성 장군 출신인 몽클라르 중령이 지휘하는 프랑스 대대와 부상당한 파울 프리맨(Paul L. Freeman) 연대장을 비롯한 전 장병이 3일에 걸쳐 근접전투와 백병전으로 적의 집요한 공격을 물리침으로써 중공군 참전 이후 유엔군에게 첫 승리의 기쁨을 안겨주었다.

이 전투를 기점으로 중공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2월 공세에 실패했으며, 이 전투 후 5일 뒤에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비행기로 북경으로 날아가 모택동에게 더 이상의 중공군 남침공격은 너무나 희생이 크기에 중지해야 한다고 건의하여서 남침을 중단하게 되었다.

반면 유엔군은 중공군에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이를 계기로 재 반격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미 제23연대의 지평리 이동은 미 8군 전체의 이동과 관계되는 것으로, 2월 11일 밤 중공군의 반격에 의해 일단 저지되었으며, 2월 13일 저녁 프랑스대대 정찰대는 대대의 저지선 앞에서 교전을 벌였다.

적군은 약 2시간 동안 맹공을 퍼부으며 아군을 괴롭혔다. 그다음날인 2월 14일 새벽 3시에 중공군은 나팔과 피리를 불면서 다시 돌격해 왔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누군가가 고안한 수동식 사이렌을 울려서 적의 신호를 방해하고 사기를 꺾고 우군의 사기를 높여가면서 수류탄으로 반격했다. 예기하지 못한 이 반격 앞에 중공군은 혼비백산해 도망쳤다.

그러나 14일 밤부터 15일까지 중공군 4개 사단 규모의 기습은 또다시 이어졌고, 15일 낮에는 포위된 아군 병사들을 구출하기 위해 유엔군 공군기가 동원됐다. 4대의 폭격기가 중공군 진지에 폭탄을 투하하면서 긴급 보급과 함께 헬리콥터로 부상자들을 후송했다.

이어 셔먼 경전차로 구성된 크롬베즈(Crombez)대령의 미 제5기병연대가 구출작전에 성공할 때 까지 3일간 밤낮으로 혈전을 벌여 마침내 대군의 적을 격퇴했다. 이렇듯 중공군은 2월 13일에는 미 제8군 공격작전의 발판이 될 지평리에서 이곳에 배치된 미 제23연대를 포위망에 가둬 놓고 섬멸하려고 하였으나 중공군 4개 사단과 맞선 지평리의 방어 작전은 유엔군이 저지선을 사수하는데 성공했다.

결과적으로 중공군의 4차 공세는 두 연합군 지휘관, 즉 제23연대를 이끈 프리맨 대령과 프랑스대대를 지휘한 몽끌라르 중령을 영웅으로 부각시키면서 중공군에게는 첫 패배를 안겼다. 이 전투에서 쌍방의 전과 및 피해는 다음과 같았다.

아군 전사 52명, 부상 259명이 발생한 반면에 중공군은 5천여 명이 전사하였다. 지평리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몽끌라르 중령의 탁월한 지휘덕분이었다. 또 프랑스군 모두가 단순한 지원병이 아닌 자유 십자군으로서의 용기와 신념으로 똘똘 뭉쳐진 결과였다.

역부족으로 중공군이 진내에 들어와 근접전이 벌어졌을 때 프랑스군은 모두 철모를 벗어버리고 머리에 빨간 수건을 동여맨 채 총검과 개머리판을 휘두르며 백병전으로 용감하게 싸웠다.

필자 김무일 전 주프랑스 국방무관
필자 김무일 전 주프랑스 국방무관

그 모습에 중공군들은 모두 겁을 먹고 달아났다. 프랑스군이 이처럼 용기 있는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불굴의 완고함, 명령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 공산주의에 대한 천성적인 혐오감, 그리고몽끌라르라는 전설적인 인물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프랑스 대대는 지평리 전투에서 험난한 지형과 영하 -20도의 혹독한 추위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인 정찰로 적의 공격을 지연시켰고, 눈보라 속에 펼쳐진 적의 대공세를 분쇄하는데 공헌함으로써 그 강인함과 용맹을 전 세계에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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