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정치가의 교훈

▲ 1878년 수상당시의 벤자민 디즈레일리. (사진=위키피디아)
▲ 1878년 수상당시의 벤자민 디즈레일리. (사진=위키피디아)

[이동희 오성연구소 이사장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우리의 민주시민사회에서 미래의 다양한 꿈을 품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또는 아직도 70여 년 동안 그대로 남아있는 휴전선에서 군대복무를 하고 있는 영원한 공인들에게 그리고 실제로 한국 정치현실에서 어려운 문제를 풀고 있는 정치인들에게도 내가 존경하는 정치가의 한 인생교훈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왜냐하면 우리조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앞으로 위대한 정치가가 많이 배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나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명재상 벤자민 디즈레일리(Bebjamin Disraeli)를 소개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영국, 신사 정치의 멋을 찾아서〉라는 1993년도 나의 학술적인 영국순례의 기행문을 발췌하여 게재하고자 한다. (기자주)

(4)에 이어서…

위대한 정치가의 교훈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1804.12.21~1881.4.19)가 영도하는 보수당과 그래드스톤이 이끌게 되는 자유당으로 양당제도가 자연적으로 형성되어 그 후 50여 년 동안 1916년 로이드조지(Lioyd George)의 연립내각이 설 때까지 의회정치의 전성기를 유지했다.

디즈레일리는 긴긴 세월 인내와 용기와 그래도 꿈을 가지고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1874년 그가 70세가 되던 해에 보수당의 내각을 구성하여 7년간 집권하여 오늘날의 대영제국을 만들어 영국인의 자랑인 빅토리아 전성시대를 창조해 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정치가로서 몸 써 지킨 교훈을 너무나 많이 남겨 놓았다.

첫째, 그는 의회인으로서 성실하고 근면했다. 성근시보(誠勤是寶)의 표본이었다. 그는 의회에 충실하여 의사록 법규 등을 빼놓지 않고 읽었다. 그가 밤에 어디서 저녁을 했는지 아는 의원이 얼마 없었다. 그가 사랑하는 12세 연상의 부인인 마리안느가 밤참을 마차에 싣고 왔다. 그 부인이 마차를 탔을 때 손가락이 끼었으나 옆에 않은 남편이 국회발언을 구상하고 있으니 참고 국회까지 피를 흘리면서 갔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다.

둘째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다. 객관적인 학벌은 없었지만 많은 책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정치경험을 소설로 쓸 수 있었던 문인이었다. 그는 문학사상 으뜸가는 '정치소설'의 원조이기도 하다. 그리고 웅변가였다. 평생 원고 없이 악센트 하나 틀리지 않게 발음하면서 청중을 설득하는 연설은 영국에서 제일가는 의회웅변가로서 기록되어있다.

셋째, 그는 정치가로서 원칙과 도덕성에 충실하였다. 돈과 여자에 관해서는 아무리 정적이라도 한마디도 흠잡을 수 없이 결백하였다. 1867년 제2차 선거법이 보수당의 디즈레일리의 힘으로 통과 됐을 때 그 승리의 기쁨을 보수당의 젊은 국회의원과 나누지 않고, 그는 곧바로 아내 마리안느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달려갔다. 과연 찾아가 보니 연상의 부인은 샨데리아의 환한 불빛과 화려한 꽃다발로써 그를 맞이하였다. 그래서 그는 "오늘은 멋있는 기생보다 더 예쁘다"고 하였다.

그가 1868년 첫 번째 수상이 됐을 때가 64세이고, 마리안느가 76세였다. 그녀가 위암으로 아플 때 외무성에서 파티가 열렸다. 그 병약한 할머니를 계단 하나하나를 올려가면서 부축하는 디즈레일리 수상을 보고 모든 외교관, 젊은 의원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이것이 원로 정치가의 산교육이고, 정치도덕과 윤리의 근본을 보여 준 것이었다.

그녀는 이미 유서를 써놓고 남편의 손톱, 머리카락, 편지 등을 그대로 보존하였고 병석에서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해 1868년 보수당이 그래드스톤(자유당)에게 패하고 다우닝(Downing)가 10번지에서 물러날 때 디즈레일리는 빅토리아 여왕의 귀족작위수여를 사양하고 그 대신 아내 마리안느에게 자작부인(Viscountess)의 작위를 받아주었다.

이때 정적인 그래드스톤 수상이 가장 먼저 축하를 해주었다. 이런 것이 바로 '신사정치의 멋'이다. 민주주의는 제도나 법률을 빌려온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멋을 움트게 하는 위대한 인품, 인격, 교양, 그리고 용기와 사명과 비전이 한데모여 이루어지는 정치문화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것을 영원히 보존하고 선양해 나가는 민족적인 기운이 움터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국회엔 언제나 이러한 멋과 품위가 풍기기 시작할까? 이조 초기의 찬란한 법제사를 창조했던 세종 조 15세기의 '선비정치의 멋'도, 18세기의 정조대왕의 규장각문화와 더불어 앞으로 21세기 한국정치에서도 300년 마다 일어나는 정치의 문화부흥을 우리의 새로운 민주적인 각도에서 오늘날부터 새롭게 준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21세기의 우리 국회의사당의 문화와 멋을 새로운 국운과 더불어 어울리게 하는 21세기 정치의 문예부흥운동으로 승화시켜야 할 것이다. 아무튼 이와 같이 디즈레일리와 그래드스톤이 창조해 놓은 영국의 정치문화는 그 후 50년 동안 리오드 조지가 세계 제1차 대전을 위해 구성했던 전시 내각이 있을 때까지 영국의 정치제도에서 보수당과 자유당의 양대 정당으로 잘 정돈된 의회정치의 모범을 이루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과격했던 노사운동 등 사회변동의 과격한 욕구를 의회 내에서 토론과 양심으로 흡수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래서 더욱 영국정치가 위대하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이 만든 양당정치제도는 세계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우리는 영국의 정치적 고전을 모르고는 진정한 민주정치의 정치학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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