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경영인 외길 55년사
延萬熙고문, 창업주 면접 발탁유일
‘柳一韓이념’ 계승 전파

유일한 경영정신을 이어오고 있는 연만희 유한 양행 고문
유일한 경영정신을 이어오고 있는 연만희 유한 양행 고문

[배병휴 회장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이톡뉴스)] 국내 제약 제1위인 유한양행 연만희(延萬熙) 고문은 토종 유한맨으로 창업주 혈맥이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은 유한의 ‘사원대표’ 역할을 맡는다. 연 고문은 유한의 전 구성원 1,600여명 가운데 유일하게 유일한 박사가 직접 면접을 거쳐 채용한 ‘맞춤형 인재’로 창업 이념을 계승하고 전파하는 주역이자 감독자의 위치에 비유된다.

총무과장 승진 후 경영이념 착착 전수받아


연 고문은 고려대 경제과를 나와 전공을 살려 금융권(고려무진)에 입사했다가 “혈족경영의 횡포를 못 참겠다”며 항변하다 퇴사한 타고난 반골기질이었다. 잠시 실직자 신분이던 1961년, 유일한 박사가 소문을 듣고 면접을 거쳐 평사원으로 채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총무과장으로 발탁했다. 유 박사는 업무 관련 미국을 자주 방문하여 귀국 시마다 연 과장에게 궁금한 사항을 물어보면 즉각 딱부러지게 응답하면 좋아했다.

창업주는 수시로 연 과장에게 관심사항을 지시하더니 어느 날은 “경제학을 공부했다니 기업공개를 잘 알겠구나”라고 말씀하니 곧 기업공개 업무를 맡기겠다는 뜻이었다. 알고 보니 증시에 상장된 기업이라야 경방과 해동화재 단 2개사에 불과했다. 연 과장은 이곳저곳 인맥을 찾아 물어가며 상장을 실현하고 보니 회사의 지명도가 급히 올라가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당시 일반인들에게는 증시가 생소했지만 주식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유한양행 주식이 최고 인기였다. 이 때문에 기업가치도 금방 올라가는 효과가 나타났다. 창업주가 미국식 경영 안목을 지녔기에 이토록 빨리 기업공개를 추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유한이 국내 제약 제1위로 성장할 수 있었다. 유한은 창립 89주년을 맞아 매출액 1조원을 돌파했다. 이는 국내 제약사의 기본 시장바탕이 취약하기 때문에 겨우 1조원을 기록했을 뿐이다.

연 과장은 일어에 능통하여 입사 초기부터 창업주의 일본 출장을 수행하면서 창업 이념과 경영 목표를 반복적으로 듣고 귀에 익힐 수가 있었다. 이 때문에 과장에서부터 사장, 회장까지 고속 승진할 수 있었다는 해석도 나온다. 특히 유한 89년사에 회장직은 유일한 박사 외에 연 고문이 유일한 기록을 세웠다.

연 고문은 창업주의 경영 이념 외에 그의 애국․애족정신도 감명 깊게 받았다고 회상한다. 어느 날 유 박사가 신문에 난 박정희 대통령 관계 기사를 읽고 나서 “박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답변하기가 조심스럽다고 생각하면서 “5.16 쿠데타는 비난받을 수 있겠지만 경제개발 지도력은 뛰어난 것 같다”고 대답했다.

유 박사가 “그래요, 그가 나랏일 하는 것을 보니 국가의식이 투철하고 추진의지가 강력해요. 잘하면 국민이 박수를 쳐 줘야죠”라고 자신의 뜻을 밝혔다. 유 박사는 당초 박 대통령을 미국식 잣대로 ‘테러두목’이라고 혹평했지만 그 사이 배고픈 국민을 밥 먹여주는 정치를 보고 높이 평가하게 된 모양이다.

제1회 유재라 봉사상 시상식에서의 연만희 고문 (오른쪽에서 두번째). (사진=유한양행)
제1회 유재라 봉사상 시상식에서의 연만희 고문 (오른쪽에서 두번째). (사진=유한양행)

1988년, ‘사원대표’ 명의로 사장 취임


연 고문은 황해도 연백 태생으로 개성 송도중학을 나와 ‘민족고대’ 경제과에 입학했다. 입학동기 가운데 현대자동차 정세영 회장과 LG그룹의 구두회 회장과 절친했다. 대학 2학년 때 6.25 피난길에서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됐다가 육군소위로 임관됐다. 새파란 소위시절 군수과 선임 장교들이 GMC 트럭을 이용, 쌀가마니를 실어내는 광경을 보고 초급장교 등 112명의 연명을 받아 상부에 고발했다.

한창 전쟁기간에 질서가 없다지만 연 소위를 군기문란, 상관불복죄로 영창에 1주일이나 감금시켰다가 석방했다. 당시 임관 동기가 KD운송그룹 허명회 회장으로 이를 증언해 준다. 그 뒤에도 연 소위는 용맹기상을 꺾지 않고 전투지휘에 나서 화랑무공훈장을 받고 전역했다. 군 복무를 마친 후 곧장 대학에 복학하여 졸업 후 무진회사에 취직했다가 얼마 안 되어 경영진에게 항거하다 퇴사하여 유한양행을 만나 평생의 천직을 맡았다는 이야기다.

연 고문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스승으로 모시는 유일한 박사는 ‘위대한 선각자’로 불린다. 1895년, 평양의 기독교 가문 9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9세 때 미국 유학으로 미시간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식품회사 사업가로 출발했다. 그러다가 태평양전쟁 때는 미 육군전략처(OSS)에서 한국담당 고문 역할도 수행했다.

젊은 시절의 연만희 고문(가운데 앞줄). (사진=유한양행)
젊은 시절의 연만희 고문(가운데 앞줄). (사진=유한양행)

이 무렵 일제 식민지하에 배고픈 동포들을 보고 건강해야 독립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유한양행을 설립, 모국발전에 헌신하다가 1971년, 77세로 별세하면서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빈손으로 돌아가셨다. 창업주가 가장 신임한 연 고문은 이때 방제회사로 밀려나 있었지만 창업주의 경영 이념을 가장 잘 알고 있다는 의미로 본사 부사장으로 복귀했다.

사장으로 승진한 것은 입사 27년만인 1988년으로 ‘사원대표’라는 이름으로 사장직에 취임했다. 이때 유한의 경영체제에 창업주 혈통은 전무했다. 창업주 동생인 유명한 사장, 유특한 사장도 임기를 마치고 퇴사했다. 외아들 유일선 미국 변호사는 미국에 상주하고 있고 딸 유재라 씨도 유한동산이나 가꿀 뿐 경영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연 고문은 사장을 마치고 회장, 고문에 이르기까지 지금껏 창업주의 기업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감독이자 증언자 역할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유일한 박사의 사후 유언장이 공개되면서 국가, 사회에 많은 감동이 미쳤다. 유언장 요지는 △손녀(7세)에게 대학 졸업 시까지 학자금으로 1만 달러 지원 △딸 유재라는 유한공고 부지 내 묘역 관련 땅 5,000평만 △나머지 모든 주식은 한국의 사회, 교육 지원 신탁기금으로 환원한다. △미국에 있는 아들 유일선은 대학을 졸업했으므로 자립해야 한다.

이 같은 내용의 유언장은 당시로서는 처음 듣는 혁신이었다. 유 박사 사후에 나라에서 국민의 절대적인 성원아래 국민훈장과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경제풍월 창간 16주년 기념, 제6회 한국의 기업가정신 대상 수상,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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