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시욱 교수, 대한민국 수호 조약평가

한미동맹 탄생비화 북커버
한미동맹 탄생비화 북커버

[배병휴 회장 @이코노미톡뉴스] 올해는 김일성이 스탈린 후원으로 남침전쟁을 일으킨지 70년, 대한민국을 지킨 한․미동맹 체결 67주년. 동아일보 출신 언론인, 학자 남시욱 교수가 ‘한미동맹 탄생비화’를 출간했다. 한․미동맹은 한국이 절박하게 소망했었지만 미국이 부담스럽게 여겨 반대했었다. 이를 미국을 잘 알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이 지혜와 집념으로 이룩한 성과였다.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김일성의 남침에 즉각 대응하여 유엔과 미군의 참전을 결단했다. 후임 아이젠하워는 한국전 종결을 위해 소련과 휴전협정을 추진하다가 이승만의 고집불통에 시달렸다. 이 박사는 통일 없는 휴전, 결사반대를 외치면서 한국군의 단독 북진통일을 외쳤다. 휴전에 앞서 대한민국 방위약속을 조건으로 내 세운 것이다.

미국정부는 이 대통령의 고집을 꺾기 위해 이 정권 전복 ‘에버레디계획’(Plan Ever Ready)을 수립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박사는 ‘죽기살기’식 ‘벼랑끝 전술’로 휴전을 반대하면서 유엔군의 철수 전에 한․미 방위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이 대통령의 휴전 반대는 너무나 고집스런 외통수였다. 견디다 못해 미국정부가 조약체결 기본방침에 동의했다. 그런데도 이승만은 중공군의 동시철수 보장 등 추가 약속을 요구했다. 미국은 폐기했던 ‘이승만 제거, 군사정부 수립’의 ‘에버레디’ 계획을 다시 꺼내 수정 보완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고집을 꺾을 도리가 없었다.

이에 미국이 이승만을 달래고 회유하기 위해 방미초청 전술을 구사했다. 그 와중에 이승만이 반공포로 2만7천명을 석방하는 돌발사태를 저질렀다. 미국으로서는 이승만을 달래고 협상으로 이끌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 로버트슨 국동담당 차관보를 내세워 지루한 협상을 개시했다. 이승만과 로버트슨 간 협상이 무려 12차례를 거듭하고서야 공동성명이 채택됐다. 그 뒤 이승만과 덜레스 미 국무장관 협상으로 한․미방위조약이 가조인 될 수 있었다. 이 박사는 그 후에도 협상절차 도중에 북진통일 카드를 꺼내니 미 군부가 다시 ‘에버레디’ 수정안을 마련하는 곡절을 겪고서야 한․미방위조약은 성사될 수 있었다. 마침내 1954년 1월 양국의 국회가 조약안을 비준하기에 이르렀다.

국회비준 후에도 이승만은 후속 보완협상과 관련하여 틈틈이 ‘독자행동’을 위협하여 의회가 승인한 조약 비준안의 교환을 지연시켰다. 이에 따른 논란과 시비 끝에 1954년 11월 17일에야 미국 덜레스 국무장관과 양유찬 주미 한국대사가 조약비준서 교환식을 가짐으로써 조약이 발효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한․미방위조약 체결의 주역은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 백두진 국무총리, 변영태 외무부 장관, 미국측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덜레스 국무장관, 로버트슨 차관보 등 6명이다. 그러나 실제 한국측은 이승만의 천재적인 벼랑끝 전술 구사에 국무총리와 외무장관은 거의 실무자로 보좌했을 뿐이었다.

미국은 한․미방위조약 체결과정을 통해 이승만의 끝없는 고집불통에 얼마나 시련을 겪었는지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끝내 조약이 체결된 후 미국정부는 이승만을 달래기 위해 미국으로 초청 극진하게 예우했다.

1954년 7월 27일, 이 박사가 아이젠하워 대통령, 닉슨 부통령의 영접속에 백악관을 방문하고 이튿날 미 상․하양원 합동회의 연설로 만장의 박수를 받았다. 8월 2일에는 뉴욕시 브로드웨이 카퍼레이드를 통해 15만 미국 시민들의 열렬환영을 받았다. 미국인들이 이승만을 동양 우방의 거인으로 환대한 것이다. 2020년 10월 도서출판 청미디어 출판, 380페이지, 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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