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초등학생의 첫 등교

[최영훈 칼럼@이코노미톡뉴스] 3월 14일, 이탈리아 나폴리의 돈 밀라니 공립학교. 전교생과 전교직원의 열렬한 환영 속에 두 명의 우크라이나 피난민 어린이가 첫 등교를 한다. 이탈리아 말을 한마디도 못하는 아이들은 처음엔 당황하지만 이내 미소를 머금고 천천히 학교 안으로 들어간다. 얼마 전 본 영상이다. 열흘 쯤 뒤 이와 비슷한 장면을 지역 뉴스에서 봤다. 대선과 전쟁 뉴스 속에서 잊힌 중요한 뉴스가 있었다. 우리에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고, 그 일은 현재 진행형이다.

울산광역시 동구에는 아프가니스탄 특별 기여자와 그 가족 및 자녀들이 정착했다. 그 사이 여러 말이 오갔다. 특히 그 자녀들의 학교 문제는 지역 사회의, 소위 뜨거운 감자였다. 여러 보도 자료를 보면 2월 7일 울산에 도착한 이후 울산광역시 교육청과 지역 사회가 아이들의 교육 기관 배치에 대해 오래 고민했음을 알 수 있다. 울산광역시 교육청과 동구의 선생님들이 한 달여를 준비한 끝에 총 17개교, 85명의 학생이 배치될 수 있었다. 이 뉴스를 이정표 삼아 하나의 답을 찾아 나서려 한다. 일전에 칼럼에서 다뤘던 <그랜토리노>에서의 노병이 마지막으로 투쟁에 나섰던 이유, 그리고 오늘 다룰 영화 <블라인드 사이드>에서 백인 가정이 흑인 소년을 가족으로 받아준 이유를 찾아보려 한다. 그들은 왜 남을 도왔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해보려 한다.

영화 "블라인드 사이드(The Blind Side, 2009)" 스틸컷.
영화 "블라인드 사이드(The Blind Side, 2009)" 스틸컷.

 

사각지대의 의미


<블라인드 사이드>는 논픽션 작가 마이클 루이스의 동명의 논픽션을 원작으로 한다. 줄거리는 간단한데, 미국 남부 테네시주 멤피스 빈민가를 전전하던 한 흑인 소년이 백인 중산층 가정의 도움으로 미식축구 선수로 성공하는 이야기다.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블라인드 사이드, 즉 사각지대의 함의를 숙지해야만 한다. 미식축구는 쿼터백이 공을 건네받아 던지면서 시작한다. 투수가 공을 던져야 플레이가 시작되는 야구와 같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른손잡이가 많은데 오른손 투수가 그렇듯, 오른손잡이 쿼터백이 공을 던지기 위해서는 왼쪽 어깨가 전방을 향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상체의 전면이 두시에서 세 시 방향으로 틀어질 수밖에 없는데 이 때 아홉시에서 열한시 방향은 시야 밖의 사각지대가 된다. 결국 쿼터백이 볼을 들고 잠시 머뭇거리면 그 방향에서 야수처럼 덤벼드는 상대편 수비수한테 무방비 상태로 기차에 치이듯 치일 수밖에 없다. 이 야수 같은 수비수의 돌진을 막아내는 공격 팀의 포지션이 바로 레프트 태클, <블라인드 사이드>의 주인공 마이클 오어의 포지션이다.

이 단어의 의미는 필드 밖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일상 속 사각지대는 내 주변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지만 그 사건이 보이지 않는 영역이다. 사건이 시야 밖에 벌어지는 것일 수도 있고, 등을 돌렸기 때문일 수도, 바쁘게 지나가서 일수도 있다. 은유적으로 얘기하면 그 사건의 중요성을 알아차리기에는 내 시야가 좁거나 성숙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실재적으로든 은유적으로든 한 개인과 사회에 이 블라인드 사이드가 없다는 건 시야가 넓거나 그런 시야를 가질만한 위치에 있다는 걸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그런 위치에 있는 사회와 사람은 필드의 레프트 태클처럼 그 본 것을 외면해선 안 되는, 그런 존재라는 걸 의미한다.

블라인드 사이드 스틸컷.
블라인드 사이드 스틸컷.

 

환대, 의무가 아닌 권리


답을 쓸 시간이다. 중산층 백인 가정은 왜 무명의 흑인 소년을 도왔을까? 집의 공간을 내줬을 뿐만 아니라 침대와 책상과 같은 가구도 사주고, 성적을 위해 개인 교사까지 붙여준 이유가 뭘까? 전미대학협회(NCAA)의 조사관마저 아무 사심 없는 후원은 있을 수 없다는 가정 하에 조사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이 비상식적인 도움의 이유는 도대체 뭘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답은 의무감이다. 마태복음 7장 12절에 담긴 황금률인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해주어라”하는 명령에 기원을 둔 의무감이다. 미국은 개신교 국가이고 투오이 가족 또한 독실한 크리스천이기에 이 답은 설득력 있다. 그러나 이 답만으로 만족스럽지 않다. 영화 <블라인드 사이드>를 몇 번이나 봤지만 부유한 백인 중년 여자와 그 가정이 덩치 큰 흑인 사내아이를 양자까지 삼아 돌본 까닭을 기독교 정신만으론 설명할 수 없다. <그랜토리노>를 몇 번이나 돌려 봐도 백인 할아버지가 동양인 소년과 그 가족을 위해 나선 근본적 이유를 속 시원히 알 수 없었던 것과 같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미국인들, 특히 백인 중산층의 생각과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두 영화를 진지하게 봐야한다. 그렇게 곰곰이 보다보면 하나의 답이 서서히 드러난다. 두 영화의 주인공은 도울 권리가 있기 때문에 도운 것이다. 투오이 여사가 흑인 소년을 도운 건 도울 권리를 갖고 있는 그녀가 추운 거리를 배회하던 소년을 목격했기 때문에 그리 한 것이다. 가난한 타자를 재울 수 있고 먹일 수 있고 입힐 수 있는 여력이 있을 때, 그럴 때 누군가를 도와야만 하는 “의무”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비로소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는 것이 이 영화에 담긴 미국 백인 중산층의 진정한 정신이다. 그렇다. 다시 말하지만 의무가 아니라 권리다. 그런 지위와 위치에 있기 때문에 비로소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세계 시민의 완성


이런 투오이 가족의 환대는 칸트의 세계 시민적 권리에 입각한 환대, 즉 주권자의 허용이 전제되는 환대보다 한발 더 나간 환대다.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윤리에 입각한, 데리다가 말한 무조건적인 환대와 가까울지 모른다.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에서 주체성은 타자를 맞아들이는 것으로써, 즉 환대로써 완수 된다고 말한다. 자기만을 보는 고독한 상황에서 벗어나 타자의 얼굴을 마주할 때 주체성의 무한의 관념이 완수된다고 말한다. 이 칼럼의 맥락에서 말하면 세계 시민이라는 가능성은 시민이 그 영역 밖에서 온 타자와 마주하는 삶을 긍정할 때 무한히 열리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열림은 글로벌이라는 외래어의 반복으로는 완수될 수 없는, 그야말로 글로벌 시민, 선진국의 국민이라는 주체성을 획득하고 자각하는 실질적이고 전환기적인 순간의 도래를 의미한다.

다른 광역시에서 이슬람 사원 건립 반대로 시끄러운 사이 울산광역시 동구에선 이런 일이 있었다. 물론 불안의 불씨는 아직 남아 있다. 종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다. 학부모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마음이 놓이지 않을 수 있다. 지역 기업이 원했고 정부가 보냈기에 받아줄 수밖에 없었고 공부해야 될 아이들을 공부시킬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지리적 정착은 끝났지만 서로가 서로의 마음에 정착하기 위해선 긴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래도 어찌됐든 받아줬다. 올 한 해 울산 동구의 그 교실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울산광역시 동구의 이야기는 현재 대한민국 곳곳에서 진행 중이 이야기이고 결국엔 해피 엔딩으로 끝나야만 하는 이야기다. 2020년 11월 기준, 우리나라에는 약 215만 명의 외국인이 살고 있고, 외국인 주민의 자녀수는 25만 명이 넘는다. OECD는 거주 외국인의 비율이 5%이상인 국가를 다문화·다인종 국가로 분류하는데 현재 우리나라의 비율은 4.3%다. 세계가 인정하는 다문화·다인종 국가가 될 날이 멀지 않은 것이다. 그날이 오면, 아니 지금부터라도 이들이 더 이상 우리 시야 밖에 존재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이들은 서로 마주보고 함께 공동체를 꾸려가야 될 이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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