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 칼럼 @이코노미톡뉴스] 올해 들어 알게 된 후배 S는 일이 들어오면 친분이 없는, 심지어 본 적도 없는 여러 지역의 여러 사람을 수소문해 진행한다. 후배에게 물어보니 업계의 많은 이들이 이런 식으로 일을 한다고 한다. 일을 여러 조각으로 쪼개어 전문가 플랫폼에서 적당한 사람을 찾아 분배한 뒤, 그 조각을 모아 조립하여 납품하는 것이 흔하다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후배는 이런 낯선 일꾼을 “팀”이라 부르고 “함께” 일한다고 표현한다는 것이다. 후배가 쓰는 “팀”과 “함께”라는 단어는 내 의미와는 다르다. 내가 볼 때 이런 식으로 일하는 건 팀이 함께 일하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를 이용한 분업에 불과하다. 공유하는 일의 철학이 부재하는 분업, 인간적 소통 없이 그저 최소한의 능력 확인만으로 일의 조각을 맡기는 21세기형 분업에 불과하다.

지그문트 바우만. (사진=위키피디아, 저자=Forumlitfest)
지그문트 바우만. (사진=위키피디아, 저자=Forumlitfest)

네트워크 시대를 사는 이들


요즘은 많은 이들이 직업과 직장은 있는데 출근이 없고 마주하는 동료가 없는 삶, 자택 근무가 뉴 노말인 시대, 비대면 회의가 일상인 시대를 살고 있다. 동료와 얼굴을 마주 보고 일하지 않아도 재능을 가진 사람이 독립적으로 일하고 생계를 꾸려가는 것도 문제 삼지 않는다. 이런 현상들을 보다 보면 후배 S 같은, 소위 MZ 세대들이 독립적인 삶과 흔한 말로 혈혈단신의 삶을 동일시하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곤 한다. 네트워크에 연결만 되어 있다면 그 삶은 고독하지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도 한다.

이런 걱정과 의심을 하다 보면 네트워크와 관계를 혼동하는 현대인을 걱정했던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생각난다. 바우만은 <리퀴드 러브>에서 “네트워크는 연결하는 동시에 연결을 끊을 수 있는 망(網/matrix)”이라고 지적하며, 그렇기 때문에 네트워크는 “상호 관여됨을 부각시키는 ‘관계’, ‘연대감’, ‘파트너 관계(partnerships)'” 같은 개념들과는 다르다고 했다. 왜냐하면 네트워크는 연결하기와 연결 끊기가 동등하게 적법한 선택이며, 동일한 지위를 누리고 동일한 중요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영화
영화 "캐스트 어웨이(Cast Away, 2000)" 스틸컷.

바우만이 걱정한, 이런 혼동을 갖고 있는 후배와 함께 보며 다시 생각하고 싶은 영화가 <캐스트 어웨이>다. 줄거리야 워낙 유명하니 간단하게 요약해도 무리는 없으리라 본다. 배송 전문 업체 페덱스의 직원으로 언제나 바쁘게 사는 “척”은 연말연시엔 더 바쁘다. 그야말로 초단위로 시간을 쪼개 산다. 다들 파티로 바쁜 연말에도 모스크바까지 날아가서 배송 업무를 처리한다. 연인과의 로맨틱한 크리스마스 파티도 역시 회사의 호출로 간단히 끝난다. 그 후 비행기 사고로 인해 무인도에 홀로 남게 되고, 그곳에 무려 4년 가까이 혼자 살게 된다. 그러다 결국 탈출을 감행하고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구조된다.

조난자와 조난당함


세상을 연결해주는 물류 회사의 중심에서 일하던 남자가 모든 연결과 단절된 채 무인도에서 4년을 보낸 이야기를 이 시점에 왜 다시 봐야 할까? 일단 제목부터 살펴보자. 영어 Castaway는 “조난자”라는 뜻으로, 고유명사다. 반면 cast away는 “~을 물리치다. 낭비하다.”라는 뜻이다. be cast away라고 쓰면 “조난당하다.”라는 뜻이 된다. 영화는 이 단어를 어떤 맥락으로 썼을까? 일단 포스터를 보면 줄을 나눠 썼다. cast를 윗줄에, away를 아랫줄에. DVD도 그렇다. 아마존에서 대본을 찾아봤다. 나눠 쓴 것과 띄워 쓴 것, 두 버전이 있다. 결론을 내기 위해, 영화 오프닝을 다시 봤다. 오프닝 크레디트는 두 글자를 띄워 썼다. 그것도 대문자로 CAST AWAY라고. 결국 이 영화는 조난자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조난이라는 사건, 그 사건으로 발생한 의미에 관한 영화로 봐야 한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으로부터 조난을 “당한”것일까? 그가 신봉하던, 미국의 멤피스에서 보낸 물건이 러시아의 모스크바에 도착하는데 87시간 22분 17초밖에 안 걸리던 시스템으로부터 조난당했다. 그의 바쁜 일상을 이해해주었던 연인이 있었기에 지탱될 수 있었던 사랑으로부터 조난당했다. 무인도와는 달리 바비큐 화덕에 불을 피우는 방법을 모를 때 물어볼 사람이 있었던 공동체로부터 조난당했다.

이 영화는 그래서, 조난자와 조난지에서의 경험보다는 조난 발생 전과 조난에서 구출된 후에 초점을 두고 봐야 한다. 조난당하기 전의 그와 구조된 후의 그는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 어떻게 달라졌을까? 포스터의 메인 카피에 그 힌트가 있다. 영문 포스터의 메인 카피는 “At The Edge Of The World, His Journey Begins.”다. 직역하면 “세상의 끝에서 그의 여행이 시작됐다.”이다. 그럼, 도대체, 그 여행은 뭘까? 어쩌면 그 여행은 그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효율성과 전문성, 프로젝트의 완수와 완벽한 네트워크만으로는 성립될 수 없는, 그것만으로는 절대로 꾸려나갈 수 없는 인생이라는 여행 아닐까? 그렇다면, 이 영화는 인생의 소중한 것으로부터 인생이 조난당하지 않으려면 삶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묻는 영화다. 더 나아가 홀로 외딴섬에 고립된 조난자로 살지 않아도 삶에 중요한 뭔가가 없으면 그 삶은 조난자의 삶과 다를 바 없음을 말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또 그래서, 톰 행크스 주연의 <터미널(2004)>과 함께 봐야 그 의미가 도드라진다. 하루아침에 조국이 사라져 다른 나라의 공항에서 여권의 효력이 사라진 탓에 국제적 미아가 됐지만, 그 공항의 어느 누구보다 많은 사람과 부대끼며 친구와 이웃을 만들고 결국엔 그들의 도움으로 인생이라는 여행을 공항에서도 계속 지속할 수 있었던, 조난당했지만 조난자로는 살지 않았던, 뉴욕 시내에서 재즈를 듣는 대신 수많은 사람들과 인생이라는 재즈를 합주한 그 사람의 이야기와 말이다.

"동사의 맛 - 교정의 숙수가 알뜰살뜰 차려 낸 우리말 움직씨 밥상" 차례 일부분.
"동사의 맛 - 교정의 숙수가 알뜰살뜰 차려 낸 우리말 움직씨 밥상" 차례 일부분.

독립과 독립적인 삶


영화 마지막 장면처럼, 사람에겐 삶에서 길을 잃었을 때 친절하게 다가와 길을 가르쳐주는 이, 삶을 지탱해주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낱말처럼 말이다. <동사의 맛>에서 김정선은 낱말에 대해 "사전을 보면 모든 낱말이 분명한 제 뜻을 갖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모두 다른 낱말에 기대고 있을 뿐 그 자체로는 이도 저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정선이 이어 말했듯 삶 또한 그렇다. “낱낱의 삶은 어차피 다 이도 저도” 아니다. 낱말 혼자선 제 구실을 할 수 없듯, 사람도 그러한 것이다. 인류학자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에서 사람에 담긴 의미는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도덕적 공동체-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래서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하며, 이것이 “사람과 인간의 다른 점”이라고 했다. 그래서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하고,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줘야 한다고도 했다. 이 사회는, 그래서 “각자의 앞에 펼쳐져 있는 잠재적인 상호작용의 지평”이고 “이 지평 안에서 타인들과 조우하며 서로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신호를 주고” 받으며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며 사회적 성원으로 자리매김한다고 했다.

이런 맥락에서, 독립은 주거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홀로 있는 시간을 받아들이는 성숙한 삶의 다른 차원이다. 고독, 외로움, 혼밥, 침묵과 고요 같은 독립의 후유증을 받아들이고, 때론 그것을 긍정하는 삶이다. 세상의 구성원으로서 일 인분의 책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다른 존재와 관계하면서 타자를 소유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 앞에 전시되지 않아도 충분히 잘 살고 있다고 자기 확신을 갖는 것이다. 비교가 아니라 차이의 가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더 나아가, 진정한 독립은 가상의 네트워크에서 떨어져 나와 진짜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면서 독립적인 사람 간의 연대를 도모하는 것이다. 살아오면서 얻게 된 학연 지연 혈연에서 잠시 빠져나와 스스로 나만의 연대의 서사를 써나가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조금 더 성숙한 사람으로 도약하는 것이다. 이것이 독립적인 삶이라면, 그렇다면 그 독립은 주거의 독립 없이도 가능하다. 조난의 맥락에서 말하면, 영어 cast away의 맥락에서 말하면 어느 누구도 제거되지 않고, 어느 누구도 함부로 낭비되지 않으며 한 사회에서 홀로 조난당하지 않아서 조난자로 살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람이며, 사람다움이고, 사람다운 사회다. 독립해서 혼자 산다는 건 조난자의 삶이 아니다. 조난당하는 삶도 아니다. 네트워크에만 연결된 삶도 아니다. 그것은 조난당하지 않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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