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장인어른은 요새 딸에게 자주 전화하신다. 원래도 큰 딸에게 자주 전화하셨지만 지난 20년 중, 올해 가장 자주 전화하신다. 대학 기숙사에 있을 때도 한 학기에 한번 어머니에게 전화할까 말까 했던 나로서는 신기하기만 하다. 장인어른의 고향이 경상남도 고성이고 반평생을 직업군인으로 사신 걸 감안하면 더 신기하다.

사실 연세가 드실수록 딸에게 전화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요새는 하루에 한번 이상은 하신다. 시시콜콜한 질문부터, 의논, 부탁 등 그 내용도 다양하다. 얼마 전 주말 저녁 에도 장인어른에게 전화가 왔다. 아내는 이런저런 해결책과 함께 앙칼짐과 다정함을 오가며 잔소리를 건넸다. 이날 처음 두 부녀가 부러웠다.
 
이별에 능숙한 사람은 없다.


어머니는 자주 전화하시지 않는다. 나 또한 전화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이민 초기, 내가 부산에 막 살기 시작했던 20여 년 전에는 종종 메일을 썼다. 그러나 이젠 메일도 쓰지 않는다. 손녀가 크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카톡으로 종종 보낼 분이다. 때문에 어머니의 아픔도, 병도, 상처도 한참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된다. 어머니 또한 나에 대해 그러하시다. 부산과 텍사스의 거리는 무기력감을 줄만큼 먼 거리다. 내 아픔도, 어머니의 아픔도 어찌 해볼 수 없는 거리다. 그 무력감을 어머니도 알고, 나도 안다. 무력감은 때론 죄책감으로 이어지곤 했지만 체념이 찾아와 그 죄책감을 덮어버렸다. 서로의 삶을 위해 우리는 침묵을 선택했다. 그렇게 20년이 지났다.

한 십년 전쯤인가, 서면역, 2호선 승강장이었다. 거기선 양방향으로 탈 수 있다. 그날 제자 두 명과 헤어졌다. 해운대 방향이 먼저 와서 내가 먼저 타러 갔다. 두 놈이 먼저 손을 흔들었다. 난 가볍게 손을 들었다 내렸다. "가라." 한마디 했다. 뒤도 안돌아보고 지하철을 타러가자, "교수님은 B형이어서 그래."하며 지들끼리 웃었다. 나도 뒤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B형이어서 그런 건 아니다. 이별에 능숙하지 않아서다. 아니, 이별에 능숙한 사람이 있을까? 몇 년 전 텍사스의 공항에서 헤어질 때, 아내는 시어머니를 안고 울었지만 난 견뎠다. B형이어서가 아니라 그래야할 것 같아서였다.

"H마트에서 울다" 미셸 자우너. (사진=인스타그램)
"H마트에서 울다" 미셸 자우너. (사진=인스타그램)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나는 H 마트에만 가면 운다."
올해 초, 우연히 미국의 유명 토크쇼인 지미 팰런쇼에 나온 미셀 자우너의 인터뷰를 보게 됐고, 이 책도 알게 됐다. 온라인 서점에서 저 첫 문장을 읽은 후, 난 이 책을 읽는 내내 눈물을 참을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읽는 대신 마침 병원 도서관의 새 책과 자신의 책모임에서 읽을 책을 고르고 있던 아내에게 이 책을 권했다. 올 봄, 환우들의 반응도 좋았고 아내의 직장 동료들이 먼저 읽고 너무 좋다는 말을 했다고 내게 전했다.

그 뒤 한참 잊고 있었는데 얼마 전 아내가 책 두 권, 이 책과 김영하 작가의 <작별인사>를 건넸다. 책모임에서 읽을 책을 먼저 읽으라고 준 것이다. 받은 후 읽어야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앞서 말했듯 우연히 이 책의 첫줄을 읽자마자 이건 내 이야기라고 확신했다. 최소한 내가 잘 아는 이야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읽고 싶지 않았다. 읽으면 울게 뻔했기 때문이다. 펼쳐 읽었고, 역시 울컥했다. 읽으면서 한 열 번 정도 책을 놓고 딴 짓을 해야 했다.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읽기를 반복했다.

이 에세이는 가족 이야기다. 가족의 죽음과 그 영원한 이별이 만든 공백을 응시하며 살아야 하는 남은 가족의 이야기며,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완벽하게 채우는 것,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남은 가족들이 안간힘을 내어 사랑을 쏟아내어 그 공백을 메워가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 있는 공백, 불현 듯 찾아오는 꽉 찬 빈자리에 관한 이야기다.

없는 이의 공백은 음식, 엄마를 닮은 사람, 푸드 코트에서 한식을 시켜 먹는 사람, ‘엄마라면 이럴 땐 잔소리를 하겠지’생각하는 순간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 공백의 존재감은 예고 없이 떠오르는 엄마와의 수많은 추억들로 인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자주, 더 크게 느껴진다. 그 공백은 채울 수 없는 상실감이기에 무슨 짓을 해도 치유 될 수 없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하기에 앞서 말했듯 남아 있는 가족들은 서로의 사랑에 의지하며, 그러나 추억은 추억대로 끌어안은 채 살아간다. 이 책은 그런 이야기다.

"H마트에서 울다" 미셸 자우너(지은이), 정혜윤(옮긴이)/ 문학동네 / 2022-02-28 / 원제 : Crying in H Mart: A Memoir
"H마트에서 울다" 미셸 자우너(지은이), 정혜윤(옮긴이)/ 문학동네 / 2022-02-28 / 원제 : Crying in H Mart: A Memoir

빈자리는 비어 있다.


사람의 빈자리는 비어 있지 않다. 부재는 빈자리를 남기지만 그 빈자리는 메워지지 않는다. 1인분의 공백이 잔존한다. 그 사람이 죽었든 떠났든 비어있는 자리는 대체 될 수 없다. 그렇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의 빈자리는 비워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부재 뒤 그가 원래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마다 이 공백을 안고 살아간다. 그렇게 살다가 종종-명절이나 생일 같은 날-그 공백으로 그리움의 바람이 들이닥쳐 풍경 소리처럼 마음을 흔들어 울리면 치유의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다. 빈자리의 주인을 아는 다른 이와 그에 관한 추억을 나누거나 혼자서 술을 마실 수밖에 없다. 저자가 H마트를 서성이고 재료를 사와 김치를 만들어 먹고 결국엔 잣죽까지 만들어 먹었던 것처럼.

사람의 공백과 함께 그 공백의 사건이 남긴 상처와 아픔은 남아 있는 이들의 사랑으로 서서히 아문다. 자우너의 큰 이모는, 결국 두 동생을 암으로 먼저 보냈다. 그전엔 그녀의 어머니이자 자우너의 외할머니를 먼저 보내야 했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만 살아서 한국말 밖에 못하는 이모와 영어만 할 줄 아는 한국계 미국인 조카는 말이 안 통하지만 각자가 갖고 있는 공백을 안다. 알기에 사랑으로 메워주려 갖은 노력을 한다. 이들의 필사적이며 애쓰는 사랑이 살아있는 사람을 살게 한다.

나이 듦과 타인의 공백


자리에 없는 사람은 없는 자리를 만든다. 그 자리는 그의 몫이고, 그 자리를 응시하며 어떻게든 남은 이의 사랑으로 그 자리의 공허함을 메우며 사는 것은 산 자의 몫이다. 결국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진다는 것을, 아니 어떻게든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나이가 들수록 더 자주 접하게 되는 이별을 통해 알게 된다. 그 앎에도 불구하고 아는 이, 모르는 이 할 것 없이 죽음이라는 이별은 매번 무겁게 다가온다. 그 죽음과 그 이후의 공백이 예고된 것도 예정된 것도 아니기에 그럴 것이다. 남은 이들이 서로를 위해 얼마나 전력을 다해 사랑에 힘쓰고 애쓸 것인지 예감되기 때문일 것이다. 때론, 어떤 이의 공백은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 크게 느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추석 명절 연휴 때 또 싸웠는가? 고스톱을 치다가, 전을 부치다가, 누가 자식을 더 좋은 대학에 보냈는지 자랑하다가, 누가 더 고생했는지 푸념하다가, 술기운에 결국은 하지 말았어야 할 말까지 해서, 긴 시간 마음에 담아뒀던 말까지 해서 싸우고 말았는가? 앞에 누가 있으니까 싸움도 하는 거다. 있어야 될 사람이 있기에 다투기도 하는 것이다.

비어 있는 자리를 향해 던진 말은 반향(反響)되어 내 마음으로 들어와 박힌다. 그걸 알기에 빈자리를 향해선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다. 그저 그 자리를 생각할 뿐이다. 귀성객으로 가득 찬 고속도로 상황을 보고하는 리포터의 뉴스를 남의 일로 여기며 말을 삼킬 뿐이다. 그 침묵 속에 빈자리는 커진다. 누구나 겪지만 경험할 수는 없는 죽음이 더 많은 빈자리를 만들기 전에, 그 자리를 메우고 있는 이에게, 그 메움에 대해 감사를 보내자.
 
*이 에세이는 아직 영화화 되지 않았다. 저자가 직접 시나리오 작업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남기는 건, 이 낯선 이야기가 우리 곁에 있는 이에 대해 깊은 감사를 갖게 하기 때문이다.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키워드

#삶 #최영훈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