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아마 이 칼럼을 송고할 때쯤이면 안이 확 바뀐 집에 다시 들어가 있을 것이다. 이 원고는 창밖으로 금련산이 보이고 백오십 미터쯤 떨어진 아파트 단지에선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해가 질 때까지 정겹게 들리는 처남 집, 작가의 서재라기보다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처남에게 딱 어울리는 책상 위에서 쓰고 있다.

처음 가본 파란 매장


인테리어 때문에 아내를 따라 생전 처음 가보는 곳 몇 곳을 가 봤다. 인테리어 사무실에서 두 시간이 넘는 회의도 몇 번 했고 타일을 고르러 전문점에도 가 봤다. 그러나 가본 곳 중 가장 압도적인 곳은 단연 이케아다. 동해선을 타고 울산의 작업실로 갈 때마다 보이던 그 커다란 파란색 창고에 들어갈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아내를 따라 그 복잡한 미로를 걷고 있었다.

이케아 동부산점. (사진=이케아 홈페이지)
이케아 동부산점. (사진=이케아 홈페이지)

혹시라도 그곳에 가본 적 없는 독자를 위해 간략하게 그곳만의 고유한 쇼핑 동선에 대해 알려드리겠다. 쇼핑몰과 백화점에서의 쇼핑이 일반적으론 건물의 저층부터 시작하거나 특별히 어느 층부터 쇼핑하라는 안내나 조언이 없는 것과는 달리 이곳은 가장 높은 층부터 쇼핑하라고 안내한다. 가장 높은 층이래야 3층이지만 어찌 됐든 지시에 따라 그곳에서부터 쇼핑을 시작해야 한다.

가장 높은 층엔 쇼룸이 있다. 가정집의 주요 공간이 취향별로, 콘셉트별로 꾸며져 있다. 아파트 견본 주택처럼 거실, 안방, 작은방, 욕실과 같은 주요 공간이 하나씩만 꾸며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각각의 공간이 다양한 톤과 분위기에 따라 범주화되어 여러 개씩 꾸며 놨다는 것이다. 이 층에선 소비자의 취향에 맞는 공간을 찾아 들어가 그곳에서 맘에 드는 제품을 발견하면, 그 이름과 번호 등을 메모해야 한다.

이후 제품 전시장에선 제품의 실물과 그것의 다양한 조합은 물론이고 미쳐 전시되지 않은 다양한 소품들도 구경할 수 있다. 카트나 장바구니에 담을 수 있는 제품은 직접 담고 그렇지 못한 제품은 1층에 있는 창고에 가서 본인이 직접 찾거나 직원이 갖다주는 곳에 가 순서를 기다려 수령 해야 한다. 쇼핑의 절차가 이렇다 보니 이것저것 꼼꼼히 둘러보는 아내 같은 사람과 동행하면 쇼룸이 있는 3층에서 벗어나는 데만 한 시간이 넘게 걸리고 그 파란색 창고 밖으로 나오는 데 족히 서너 시간은 걸린다.

없는 게 있다.


없는 게 없는 것 같은 그곳에도 없는 게 있다. 그곳에 있는 공간과 제품이라면 모든 사람의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럴 수는 없다는 말이다. 소비자가 그 범주 안에서 고를 뿐이다. 그 범주와 폭의 상대적 넓음과 자율적인 선택과 조합이 가능하기에, 소비자 취향껏, 스스로 집을 꾸미고 가구를 만든다는 착각이 들 뿐, 어디까지나 정해진 범주 안에 운신의 폭이 있을 뿐이다. 마치 자연을 흉내 낸 커다란 동물원의 사파리 영역에서 뛰어노는 사자가 누리는 자유와 같다고나 할까?

사실 인테리어 미팅 과정 전체가 그랬다. 인테리어 회사의 지점장은 미팅 때마다 많은 대안을 제시했다. 먼저 인테리어 한 집들을 보여주며 최신 인테리어 트랜드를 소개하고 그에 맞는 제품들을 권했다. 그러나 그 대안들은 결국 요즘 유행하는 디자인·소재·색상 안에서 고른 것이었다. 그렇게 여러 집을 번갈아 보다 보니 그 집이 그 집 같길래 농담처럼 한마디 했다. “술 취해서 다른 집에 들어가도 잘못 들어갔는지 모르겠네요.” 점장은 얼떨결에 “그렇죠.”하고 대답하며 웃었다.

집의 외관이 됐든, 내관이 됐든 한 명의 소비자를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범주는 없다. 이것이면 좋겠다 싶은 것이 물론 있겠지만 그것이 꼭 내가 원했던 것, 나에게 꼭 맞는 것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소비자 대부분은 범주 안에서 선택한다. 자신의 적당한 범주를 찾아 들어간다. 사회와 시장이 소비자와 대중에게 바라는 점이기도 하다.

카피라이터 작업 현장. (사진=필자)
카피라이터 작업 현장. (사진=필자)

마케터와 광고하는 사람은 소비자를 분석하여 대중 속에서 일부의 무리를 구별하여 호명한다. 교과서적인 말로 시장 세분화에 따른 표적 시장 선정이다. 세상에 나오는 상품과 그 상품의 브랜드, 슬로건, 카피는 모두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범주 안에 있는 이를 향한다. 그래서, 일전에도 말했듯이 어떤 광고나 카피, 슬로건이 도대체 이해가 안 간다면 그건 내게 오는 메시지가 아닌가 보다 여기면 된다. 사실 소비자와 대중도 자신이 어느 범주에 속하는지 아는 걸 좋아하고, 심지어 그걸 알게 되면 안도하기도 한다. 과거 혈액형별 성격 유형과 현재의 MBTI 열풍도, X세대 MZ세대니 하는 것도, “태극기 부대”와 “문빠”도 어찌 보면 이와 같은, 특정 범주에 속하지 않으면 자신을 설명할 길이 없는 사람들이 하나의 범주에 속할 때 찾아오는 안도감을 얻기 위한 선택한 범주화 여러 사례 중 하나에 불과할지 모른다.

범주 밖에서


물론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크든 작든, 주류든 비주류든 나름의 범주에 들어 있다. 그러니 이 글에선 범주에 저항해서 독립적인 주체가 되라거나, 범주 밖에서 독립적인 존재로 살아가라는 이상적인 구호로 결론을 낼 생각은 없다. 다만 그 범주가 자신과 타자를 규정하고 해석하는 유일한 틀이라 결론 짓는 어리석음을 피하길 바랄 뿐이다. 더 나아가 특정 범주를 중심으로 세상의 흐름이 흘러간다고 불안하여 그 흐름에 허겁지겁 올라타는 일도 없길 바랄 뿐이다. 물론 세상의 흐름에 발 빠르게 대처하고, 그 흐름에 뒤처져선 안 되는 사람도 있고, 그런 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분야도 있다. 그러나 때로는 그 흐름 밖에서 남에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 스타일을 고수하는 부분이 한두 개쯤 있어도 되지 않을까?

인테리어의 반대말은 당연히 익스테리어다. 우리말로 하면 전자는 내경, 또는 내관이고 후자는 외경, 또는 외관이다. 그러나 안이든 밖이든 누가 봐야 의미가 발생하긴 매한가지다. 인테리어가 끝나면 집에 친구들을 초대하겠다는 딸 역시, 변화된 집이 의미를 발생시키기 위해선 타인의 시선이 있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바뀌기 전의 집과 바뀌고 나서의 집이 다르다고 딸에 대한 친구의 평가가 달라질 리 없고, 또 그래야만 마땅히 친구 사이랑 부를 수 있겠지만 딸은 벌써 집의 안과 밖을 누가 어떻게 봐주는 것에 신경 쓰는 나이가 됐다.

헌터 The Hunter, 1980
헌터 The Hunter, 1980

 

이렇게 세상의 시선에 신경 쓰는 나이가 되면 유행에도 민감해지는 모양이다. 요즘 부쩍 광고에 나오는 새 겨울 점퍼를 입에 올린다. 딸의 말을 귓등으로 넘겨 들으며 채널을 돌리다 보니 스티브 맥퀸이 전철 지붕 위에서 고군분투 중이다. 1980년에 개봉한 그의 마지막 영화 <헌터>의 한 장면이었다.

스티브 맥퀸은 이 영화에서 오직 MA-1 Bomber 점퍼와 청바지만 입고 나온다. 촌스럽지 않다. 올해 홈쇼핑에서 밀고 있는 겨울 아이템이 바로 이와 거의 같은 디자인의 점퍼고 나나 젊은 친구들이 입고 있는 청바지와 스티브 맥퀸의 청바지엔 별 차이가 없으니까.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이 초등학교 4학년 소녀의 귀에 들어올 리가 없을 것이다. “힙”하고 “핫”한 십 대 소녀의 범주에 들길 원하는 딸과의 협상이 11월 내내 이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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