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 이전의 한 사람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올 가을, 지역의 시립예술단 일로 바쁘다. 시립 예술단을 홍보하려면 아무래도 그들이 활동하는 여러 공간을 알아야하지 않나 싶어 로케이션 헌팅을 핑계로 그들의 연습실을 보게 됐다.

그렇게 살펴 본 연습실은 생업의 현장이자, 땀에 젖은 공간이었다. 연습실 입구에는 출퇴근 현황표뿐만 아니라 각종 공지사항, 협약을 맺은 각종 병원과 기업의 홍보 전단이 붙어 있었다. 그들도 어느 직장인들처럼 매일 정해진 시간 출퇴근을 했고, 내규에 따라 육아휴직과 연차를 썼다. 연습실 곳곳에 한 명의 아티스트이자 예술 노동자, 한 명의 생활인이자 누군가의 아내와 남편, 아들과 딸, 아빠와 엄마로 살아가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중고생 특별강습하는 발레리나 강수진. (사진=연합뉴스)
중고생 특별강습하는 발레리나 강수진. (사진=연합뉴스)

내가 본 흔적은 표면에 불과하다. 그들의 오늘을 있게 한 진정한 흔적은 내가 볼 수 없는 그들의 몸과 마음에 있을 것이다. 감독의 딸은 예고에서 플루트를 전공하고 있다. 초등학교 때 취미로 시작한 것이 슬슬 업의 세계로 들어서는 단계다. 그만큼 연습량도, 연주의 양도 많아졌다. 때문인지 벌써 손가락이 아프다고 한다. 어디 플루트뿐인가. 모든 악기 연주자들에겐 나름의 직업병이 있다. 대금이나 플루트 같이 한 쪽으로 고개를 치우쳐 바삐 손가락을 움직이는 연주자에겐 손가락뿐만 아니라 목과 척추에도 무리가 온다고 한다. 장시간 등을 구부리고 목을 숙이고 연습을 하고 연주를 하는 피아니스트 중엔 목이나 허리에 고질병을 달고 사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사람의 이면을 아는 사람


발레리나 강수진과 축구선수 박지성의 상처 많은 발과 같이,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을 충실히 사는 보통 사람에게도 타인은 알 수 없는 훈장 같은 흔적이 있다.

이렇게 겉으로 알 수 없는 표면 안의 것을 이면(裏面)이라 한다. 이면(裏面)은 물체의 안쪽 면을 뜻하는데 구체적으로는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 내부의 사정이나 사실을 말한다. 우리말로는 속내평이라 하여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속마음이나 일의 내막을 뜻한다.

이면(裏面)의 한자 이(裏)의 뜻은 받침인 옷 의(衣)자가 담당하고 있다. 옷으로 가려진 그 안쪽의 액면 그대로의 몸뚱이를 이면이라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옷으로 신분이나 관직, 계급을 파악할 수 있던 예전에도 이 말은 은유였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이면은 그렇게 간단히 엿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연을 맺은 사람만이 진정한 한 개인의 이면을 안다. 반대로 말하면 한 사람과 인연을 맺는 것은 한 사람이 세상에 드러내놓을 수 없는 이면을 함께 가려주며 짊어지는 것이다. 그의 고통과 어려움, 인내의 시간을 함께 견뎌주는 것이다. 우린 그런 사람을 가족, 친구, 연인, 동료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이들은, 다시 말하지만, 이면을 아는 사람이다.

단 한 순간의 도약을 위해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는지 아는 사람, 십초도 안 되는 솔로를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 집중하여 연습했는지 아는 사람, 진학과 취업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아는 사람, 얼마나 착하고 성실했으며 보기 드문 효자 효녀였는지 아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수십 명이 함께하는 교향악단과 합창단 연주에서도, 무용단의 몸짓에서도 소중한 사람의 소리와 몸짓을 찾아내어 소리 하나, 몸짓 하나하나 허투루 듣고 보지 않을 것이다. 신병 훈련소의 수백 명의 장정들 속에서도 자기 자식만 유독 잘 보이는 것도, 소풍이나 단체 관광에서의 단체 사진 속에서도 내가 사랑하는 이만 도드라져 보이는 것도, 어린이집과 초등학교 학예회에서 오직 내 자식만 눈에 들어오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당연한 것은 당연해야 한다.


올 가을, 사람이 죽었다. 일하러 나갔든, 공부하러 나갔든, 놀러 나갔든 집을 나선 사람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든 없든 그래야만 한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부연이 필요 없다. 그 당연함은 국가와 사회의 시스템으로 보장 된 것이다. 속된 말로 나라와 사회가 잘 돌아간다는 것은 그 시스템이 당연하게 작동되어서 그것을 누리는 사람이 눈치 못 챌 정도로 그것을 누리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거대한 유람선의 승객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엔진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이 탄 거대한 쇳덩어리가 대양을 가로질러 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엔진이 고장 나면 그 어떤 대형 선박도 좌초되고 침몰 되듯, 국민이 누려야할 당연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으면, 사회가 좌초되고, 그렇게 집에 돌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사람이 죽게 된다.

우리는 그 죽음의 숫자와 그 현상을 알거나 볼 뿐, 그 개별 죽음의 이면을 알지 못한다. 연주자와 성악가, 무용가의 연주가 있기 위해선 긴 연습의 시간뿐만 아니라 그 예술가를 키워주고 후원해온 가족의 시간이 있다. 오늘을 사는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의 구실을 하기까지 그를 키우고 후원하고 응원해준 가족의 시간이 있다. 더 나아가 교향악단과 합창단, 무용단에겐 함께 호흡을 맞추고 연습하는 동료들이 있다. 다른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동료, 동문, 친구, 선후배들이 있다.

이태원 ㅊ마사 이후 이태원역 1번 출구 모습. (사진=연합뉴스)
이태원 ㅊ마사 이후 이태원역 1번 출구 모습. (사진=연합뉴스)

 

남겨진 사람, 무너진 세계


빵을 만들다 죽은 스물셋의 여성에게도, 낯선 나라의 공사 현장에서 죽은 먼 나라 노동자들에게도 이와 같이 그들의 이면을 아는 사람과 그 사람과 함께 보낸 시간이 있다. 수십, 수백 명의 시간과 추억이 있다. 그 중첩된 시간의 무게를 가슴에 안고 있는 이들은 죽은 이를 보내지 못한다.

결국 한 사람의 죽음은 수십 명의 세계를 무너뜨린다. 한 사람의 이면을 아는, 그 이면과 관계한, 관계된 사람들의 세계를 무너뜨린다. 그 무너진 세계는 복원 될 수 없다. 무너진 채, 허물어진 채, 때론 폐허가 된 채 살아간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오랜 된 유적, 그 유적으로 남은 삶을 살아간다. 생명 그 자체의 소중함과 함께 그 생명과 엮인 수많은 이들의 아픔, 그 이면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이유다.

이제 우린, 자신의 세계가 무너진 수천 명의 남겨진 사람들의 삶을 떠 맡아야한다. 그 남겨진 사람들의 삶의 이면에 대해 숙고해야만 한다. 산 사람들, 죽은 이의 이면을 아는 사람들이 그 무너진 자신의 세계를, 어느 정도 수습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한다. 우리의 도움이 그들의 세계를 복원해주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살아낼 수 있도록 해볼 건 해봐야 하지 않을까?

나이 탓인가? 요 근래 부쩍 밖에 나가면 식구들이 보고 싶다. 내가 집에 있고 아내는 회사에, 딸은 학교에 가 있어도 보고 싶긴 매한가지다. 볼 수 있는 사람도 이렇게 보고 싶은데, 볼 수 없는 사람은 얼마나 보고 싶을 건가. 난 살아남은 사람이 평생 간직할, 그 그리움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헤아릴 수 없는 타자의 아픔엔 침묵하는 것이 도리일 텐데 이렇게 가벼운 글을 남긴다. 할 수 있는 것이 이것 밖에 없었다. 무기력하지만, 이게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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