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호,1999년9월]

金宇中 신화와 경영실패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우리를 여러 번 놀라게 했다. 그는 오랫동안 성공인의 우상이었다.

짧은 기간의 획기적 성공으로 많은 젊은이에게 도전 의욕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김우중 신화는 한마디로 특출한 세일즈 감각이 원천이었다. 그는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저서처럼 세계를 누빈 ‘세계경영인’이었다. 그렇지만 IMF 이후 5대 재벌 가운데 첫 재벌해체라는 충격으로 다시 한번 우리를 놀라게 했다. 이제 김우중의 성공이 실패로 끝나고 말 것인지가 중대한 관심사항이다. 만약 실패로 끝나고 만다면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특유의 돌파력으로 재기하는 경우에도 우리는 놀라게 될 것이다.

글/裵秉烋 대표편집위원

특례로 꼽히는 수출 스타

김우중은 ‘수출제일주의’ 시대가 낳은 영웅이었다. 그는 스스로 시대를 앞당겨 수출을 제일의 가치로 실천하고 번쩍이는 아이디어로 시대 흐름을 타기도 했다. 또한 감각과 행동을 동시에 발휘할 수 있었던 타고난 세일즈맨이었기 때문이다.

김우중은 일제시대를 겪었던 한국의 창업 1세대와는 구분되는 창업인이다. 창업 1세대는 특별한 동기와 배경 때문에 사업에 착수한 사람들이다. 대가족의 장남으로 가계를 책임지기 위해 장사꾼이 되었거나 학벌로 출세할 길이 막혀 사업에 손을 댄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반면에 김우중은 시대가 요구하는 재능 때문에 수출 스타가 될 수 있었던 창업인이다. 이런 점에서 특례로 꼽히고 우상으로 추앙되었다. 70년대 초반 당시 상공부 장관실에서 만날 수 있었던 김우중은 새파란 청년이었다. 감청색 양복에 굵은 검은테 안경을 쓴 그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여비서관의 답변은 냉랭했다.

“한성실업이라든가 대우실업이라든가 잘 모르지만 수출하러 다닌데요.” 별볼일없는 이가 수시로 장관 면담을 조른다는 말투로 답변했다. 그렇지만 실제로 김우중은 그때부터 장관이 환대하는 귀빈에 속했음이 틀림없다. 대통령과 장관이 수출에 목을 매달고 불호령을 치던 시절, 김우중은 예쁘고 귀여운 손님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김우중의 인상은 귀공자 같았다.

그리고 대우의 수출 실적은 콩나물 자라듯 쑥쑥 늘어났다. 그가 해외를 다녀올 때마다 경제기자들이 우르르 쫓아가 취재경쟁을 벌인 것이 상례였다. 그로부터 불과 몇해가 지나지 않은 것 같았는데 화면에 비쳐진 김우중은 완전 백발이 되었다.

젊고 건강만점이라고 믿었던 김우중이 언제 저토록 긴 세월을 살았을까 싶다. 무리하고 과로했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뇌수술까지 받았다니 고뇌가 쌓였으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신화를 창조했던 수출시대 스타가 몰락한다면 우리는 너무 허전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재미와 취미로 일하는 이

섬유수출이 나라경제를 이끌고 있을 때 김우중은 마케팅의 귀재로 소문이 났다. 섬유수출이 쿼터제로 규제될 때 대우는 언제나 가장 많은 쿼터량을 배정받았다. 쿼터는 전년도 실적을 기준으로 배정되기 때문이었다. 수출쿼터는 바로 현금 자산이었다. 팔 수도 있는 권리였으므로 대우의 자산이자 공신력이었다.

어느 해인가 와이셔츠와 스웨터를 얼마 만큼 수출했느냐고 물어봤다. 양으로 환산하면 남산 높이만큼 올라가리라는 답변에 놀란 기억이 남아 있다. 그때도 지금처럼 김우중은 연중 태반을 비행기와 해외에서 보냈다. 일이 재미이자 취미이고 목적이라면서 바이어와 상담 이야기만 자랑했다.

그 무렵, 대우센터 회장실에서 만난 김우중은 면담객이 숨이 차서 대화를 잇기 어려웠다.

면담중에 과장 불러 지시하고 이사에겐 해외출장 독촉하고 외부 전화로 상담도 하니 취재고 뭐고 정이 떨어진다. 그는 중간에 띄엄띄엄 미안하다고 양해는 구했지만 천성이 그러려니 생각하면서도 섭섭했다. 더구나 장관 면담이 급하다면서 전기면도하고 서류 챙기며 야단이니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고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김우중 회장실은 각종 수출탑으로 장식되어 한눈에 수출스타 집무실임을 실감케 했다. 금탑산업훈장에서부터 억불탑을 크기 순서로 진열해 놓았으니 장관이었다. 원래 산업훈장은 금탑이면 끝이다. 정부가 맨입으로 수출드라이브를 강화하기 위한 아이디어로 만들어 낸 것이 억불탑이다. 1억불탑에서 3억불, 5억불 등으로 높이를 키우기만 하면 명예의 도수를 높일 수 있었다.

억불탑은 당시 정밀기기센터를 통해 1천분의 1미리의 정밀가공 기술을 동원하여 아주 번쩍거리게 제작했다. 그래서 첫눈에 금탑보다 높게 보여 종합상사들간에 피나는 상타기 경쟁을 촉발시킬 수 있었다. 국가 번영의 분수령이라 할 수 있는 수출 1백억 달러 달성도 억불탑의 창안이 크게 기여했으리라 관측된다.

김우중 회장이 집무실에 수많은 억불탑을 쌓아놓고 내방객을 맞이한 것도 이같은 시대환경이 작용했을 것이다. 지금이야 수출 실적 몇억불이 대수냐고 할 수 있지만 70년대야말로 억불탑을 수상한 기업인보다 소중한 국가유공자가 없었다. 그러니 김우중은 우리의 우상이자 시대적 영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부실기업 인수와 재건재벌

김우중은 수출 특기로 5대 재벌성에 진입한 유일한 경영인이다. 그리고 재벌성을 쌓기까지는 모태인 주식회사 대우를 제외하고는 스스로 창업한 기업이 별로 없다. 기업인수 재벌이라 부를 수 있고 부실기업을 재건한 재벌이라 평할 수도 있다.

김우중이 수출에서 보여준 탁월한 솜씨를 믿고 몰려 들어온 기업이나 정부가 밀어넣어 준 기업도 있다. 전자산업을 비롯하여 기계, 자동차, 중공업, 조선 등 대우그룹의 골격이 모조리 인수한 기업으로 형성되었다. 부실기업처리가 문제될 때 김우중이 맡으면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세론도 있었다. 정부도 비슷하게 생각한 경우가 있었다고 알고 있다.

70년대 중반 대우가 종합상사 지정을 받고 나서 재계는 김우중을 경계하는 눈초리로 지켜봤다. 워낙 기세좋게 뻗어나면서 김우중이라는 수출 스타의 브랜드 가치가 재벌 영역을 너무나 급속히 침투하기 때문이었다.

이때 김우중은 사재를 문화재단에 헌납하고 오너 아닌 전문경영인으로 활동하겠다고 선언했다. 사재헌납이라는 발표에 대해 재계가 유쾌하지 않은 반응을 보인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김우중의 약속이 여론무마용이라는 일부의 비판도 이때부터 제기되었다.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인수할 때 김우중은 여론 향방에 특별히 신경을 쓴 흔적을 남겼다.

젊은이가 아무데나 치고 들어오느냐고 재계가 경계하는 빛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그는 기자를 초청한 자리에서 불가피하게 대한전선을 인수한 배경을 설명했다. 전자산업을 살리려는 충정으로 인수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으로 기억된다.

아울러 사업 선배이자 전자산업의 경쟁 상대인 호암선생(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에게도 배경을 설명 드리고 양해를 구했노라고 덧붙였다. 김우중은 인수재벌이라는 시중의 평판이 심적인 부담이 되었고 기존 재계의 경계심에도 신경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기업을 인수하면 김우중은 현장에서 침식하며 파고드는 특유의 열정을 보였다. 새한자동차와 옥포조선소를 인수했을 때 현장에서 몇달씩 새로운 사업에 빠져든 경우를 보여 주었다.

수많은 기업인수를 통해 김우중은 수출만이 아닌 어떤 분야이건 내 손으로 재건할 수 있다는 실증을 보여준 점에서도 특례라 할 수 있다.

시운이 빗겨간 세계경영

김우중 신화의 대미는 세계화시대의 세계경영으로 장식되도록 설계되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그의 저서가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세계경영에 대한 기대심리가 작용했을 것이다. 세계화 전략이 발표되었을 때 기업하기 가장 어려운 나라 중의 하나가 우리나라라는 비판이 있었다. 유력 기업인들이 해외에 장기 체류하기를 좋아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냉전체제가 무너진 후 김우중이 동구권이나 러시아를 방문할 때 거의 국가원수급 환대를 받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대우의 세계화경영은 크게 성공할 수 있다는 기대가 생길 만했다. 그러던 것이 IMF 체제를 맞아 급속히 세계경영이 잘못되었다는 소문이 확산되었다. 재벌 구조개혁에 가장 부정적인 자세가 김우중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전경련회장을 맡은 후 정부 방침에 고분고분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들렸다.

재벌개혁의 사령관격인 금감위의 이헌재 위원장 입에서 대우를 지적하는 말투가 슬금슬금 나오기 시작했다. 이 위원장은 김우중을 사석에서는 형님이라 호칭하며 신뢰하는 사이이다.

왜 형님이라 부르느냐고 힐난하면 고교선배이자 한때 대우에서 회장으로 섬긴 사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런 형님 아우 사이지만 최근의 대우그룹 해체 과정을 둘러싸고 김우중의 퇴진론을 강력하게 밀어부친 이가 이헌재 위원장이라는 소문이 뜻밖이다. 김 회장이 좀더 명예롭게 퇴진하고 싶다고 간청했지만 들어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왜 김우중이 재벌개혁 과정에서 비판받고 강제퇴진 압력을 받는 수모를 겪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앞으로 김우중이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시한은 고작 6개월이다. 정부와 채권단이 허용해준 이 시한내에 대우그룹의 유동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김우중의 사재는 처분된다. 비록 경영정상화를 이룩한다 해도 2년 뒤에는 완전 퇴진해야만 한다. 정부가 공개적으로 확인한 이같은 방침에 따르면 김우중은 실패한 경영자로 단정되었다.

지난 32년간의 성공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김우중은 국가유공자가 아닌 죄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왜 이토록 비참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을까. 재벌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평가가 최악일 때지만 재벌경영의 실패는 특정 기업인의 실패이기 전에 국가와 국민의 실패가 아닐까 싶어 비통한 심정을 숨길 수 없다.

김우중은 팽창경영을 잘했다고 평가된 적이 있었지만 빚을 너무 많이 끌어들인 것이 잘못이라는 결론이다. IMF가 아니었다면 그냥 굴러갈 수도 있고 어느 시점에선 획기적인 세계경영이 큰 결실을 가져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운이 빗겨나갔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죽기로 작정한 기회

실로 총부채가 60조원이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다.

게다가 해외에서 빌린 돈이 얼마인지 알 수 없다는 소문도 있다. 적어도 1백억 달러는 넘고 3백억 달러까지 이를 수 있다고도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김우중의 세계경영은 현실적으로 실패라고 볼 수 있다. 긴급 유동성부족이란 대우와 김우중에 대한 신용평가가 떨어져 당장 결재자금을 메울 수 없다는 뜻이다. 소문이 나쁘고 구조개혁이 부진하다는 평가 때문임은 물론이다.

그러니 채권 금융기관에서도 4조원의 신규 여신을 결단하기가 쉽지 않고 10조원의 만기연장에 반대하는 이도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긴급 유동성 위기를 모면하고도 6개월내에 초고강도 자구노력이 성공하여 명예를 회복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무엇보다 대우라는 큰 옥호를 지켜온 김우중 브랜드가 실패한 경영자로 낙인 찍혀 국내외로 전파된 사실이 가장 치명적이다. 정부는 해외 부채는 현지에서 책임지라고 하지만 가능할는지도 알 수 없다. 모기업이 지불을 보증하고도 책임을 안진다면 그냥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 동안 세계경영의 사업장이 현지법인 3백96개소를 포함하여 모두 5백89곳에 이른다고 보도되었다. 그리고 총 고용인원 15만명에 연간 매출액이 7백억 달러라고 한다. 이같은 통계를 그대로 믿는다면 IMF가 오지 않았다면 세계경영이 가능했었다는 아쉬움도 남는다.

이제 대우와 김우중에게는 죽기로 각오한 초고강도 구조개혁에 실낱 같은 기회가 있을 뿐이다. 모든 사재를 담보로 제공하고 주식포기 각서와 처분위임 각서까지 제출했으니 김우중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또한 정부가 요구한 퇴진도 수용했다니 시한부로 전문경영인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만이 우리 시대 영웅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솔직히 우리는 애써 키운 영웅의 추락을 원치 않는다. 우리 사회에 끝까지 추앙받는 국가유공자가 없는 것이 서글프고 후회스럽다. 실패한 경영자는 너무 많고 존경받는 경영자는 너무 적다는 사실에도 속이 상한다. 그래서 김우중이 죽기로 각오한 초고강도 구조개혁이 그의 명예회복과 우리의 기대심리를 함께 충족시켜 주길 진심으로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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