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호/1999년9월]

불신 사회문화 어쩌나?

글/金潤坤 김윤곤 편집위원(전 조선일보 논설위원)

재벌이 불신의 상징인가

일본계 미국인 평론가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최근 저서 「트러스트(TRUST)」에서 미국·독일·일본은 ‘고(高)신뢰사회’이고, 프랑스·중국·이탈리아는 ‘저(低)신뢰사회’라고 분류하고 있다.

그는 민간경제에 있어서 비교적 대규모 기업그룹이 발달한 전자(미국·독일·일본 등)에 있어서는 역사적으로 시민의 자발적 사교성이 충만한 결과, 가족이나 씨족 등의 친족관계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닌, 중간적 커뮤니티가 여러 가지로 탄생, 존속하여 이로부터 생겨난 높은 신뢰에 의해 동족 경영에만 머물지 않는 대기업이 창출되었다고 한다.

중간적 커뮤니티로 미국에 있어서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에 입각한 자선단체와 협회, 독일에 있어서는 길드제도, 일본에 있어서는 이에모토(家元) 제도나 다이묘(大名)에 충성을 맹세하는 사무라이 제도 등을 가리키고 있다.

한편 후자(프랑스·중국·이탈리아 등)에 있어서는 대개 황제, 군주 등에 의한 강력한 중앙집권화 시대를 거친 결과, 중간적인 사회조직은 파괴되고, 믿을 수 있는 것은 혈연관계를 중심으로 한 친족밖에 없어, 그들을 중심으로 사업을 하다 보니까 대기업이 탄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후쿠야마는 한국 사회의 신뢰에 대해서도 특별히 검토하고 있다. 그는 유교 중심의 한국은 중국형 사회에 가깝고, 따라서 동족 경영에 의한 기업이 많은 ‘저신뢰사회’라고 지적했다. 우리로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이론을 전개하고 있으나, 우리는 그를 비난하기 앞서 우리 스스로 반성할 점이 많은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이 ‘저신뢰사회’라면 소규모 기업이 난립하는 상황을 상정할 수 있으나, 현실은 ‘5대 그룹’ ‘10대 그룹’ ‘30대 그룹’ ‘50대 그룹’하는 식으로 대기업 중심이 되어 있는 점에 대해,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산업화 정책에 따른 인위적 형성이라고 말한다.

즉 한국은 과거 일본의 재벌을 모방한 거대 기업그룹을 정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데 성공한 나라라는 것이다. 정부에 의한 조성, 보호 ,규제, 기타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한국 재벌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그는 보는 것이다.

한국의 재벌들이 관치금융의 특혜 속에서 성장하여 오늘날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 사실인 이상, 후쿠야마의 그 같은 지적을 반박하기는 어렵다.

굳이 후쿠야마의 견해를 빌리지 않더라도 한국 재벌의 탄생과 성장은 기업인의 능력, 정부의 지원, 임직원들의 열성, 그리고 국민 사랑의 합작품이라는 점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재벌의 소유와 경영은 오로지 혈연을 중심으로 한 대주주에 귀속되어 있다.

재벌의 세대교체에서 거의 예외없이 드러났지만, 혈연 가운데서도 심지어는 동생까지 배제하고 아들들에게만 소유와 경영을 상속하는 양상이 정착되어 있다. 철저한 ‘저신뢰사회’의 특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 보니 경영능력이 부족한 아들에게 재벌 회장직을 맡긴 나머지 불과 몇년만에 도산하는 사례도 비일비재했다. 산업화 정책에 따라 탄생, 성장한 한국 재벌들이 세계의 다른 대기업처럼 자립적으로 발전할 수 없는 전통적, 문화적 한계를 스스로 입증한 셈이다.

국민의 정부에 들어서 추진되고 있는 구조조정은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하다. 과거 일본의 재벌을 모방하여 인위적으로 만든 재벌이 ‘저신뢰사회’의 사고 범주로부터 탈피하지 못함에 따라, 이제는 정부가 주도하여 미국 모델로 전환시키려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재벌이 전후 맥아더 사령부에 의해 해체되었던 것처럼, 한국의 재벌은 IMF(국제통화기금)에 의해 ‘구조조정’을 당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점이 간과되고 있다. 한국의 ‘저신뢰사회’ 문화를 그대로 놔둔 채 미국모델을 지향하며 구조조정을 강행했을 때 과연 국제화·세계화 시대에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재편될 수 있을 지 의문이다.

전전 일본의 재벌은 해체되었지만, 전후에도 옛 재벌의 상호를 그대로 간직하며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고신뢰사회’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물론 일본에도 끼리끼리 모이는 풍조가 강하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심한지 모르며, 우리가 그것을 일본으로부터 배운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일본에서는 끼리끼리 모일 때도 일을 중심으로 모인다. 예를 들어 정치 파벌을 보아도 유력 정치인이 대장(大臧)대신이 되었을 때, 그때 국장, 과장, 비서관 등을 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아 훗날 정치인으로 입신하여 같은 파벌의 일원이 된다던가 하는 것이다.

우리처럼 혈연, 지연, 학연을 먼저 따져 사람을 발탁하고 늘 그러한 사람만 끼고 돌지 않는다. 남을 믿을 수 있는 사회와 남을 믿지 못하는 사회의 차이이다.

믿을 수 있는 경제풍토 절실

역시 ‘고신뢰사회’라고 하는 미국에 있어서는 신뢰가 어쩌면 일본보다 더 중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인들에게는 대화할 때 혼네(本音, 본심)와 다테마에(建前, 방침)가 다르고, 또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建三郞)가 지적한 ‘애매한 일본’의 태도로 훗날 빠져나갈 구멍을 미리 마련해놓는 습성이 있다.

한편 미국인들은 만우절을 제외하고는 농담할 때도 거짓말을 삼간다.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클린턴 대통령의 여성관계 스캔들 사건에서 보았듯이, 법과 여론의 심판은 당사자의 개입 여부보다도 거짓말을 하고 있느냐 아니냐에 더 초점을 맞춘다. 미국인들은 상대방이 한번이라도 거짓말을 하거나 납득할 만한 이유 없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그 다음부터는 상종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번 거짓말쟁이나 약속위반자로 찍히면 영원히 매장되는 일이 일반적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부정을 저지르고도 사람뿐만 아니라 부정 자체까지도 용서받는 경우가 너무 많다. 부정을 저지른 기업인이 형을 살고 나왔어도 전과 똑같이 부정한 방법으로 특혜를 누리며 사업을 계속하는 경우도 흔하다.

부실공사로 인해 엄청난 인명과 재산상의 손실을 가져온 사고가 잦았지만, 그 처리는 다시는 그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가게 규명된 일이 드물다. 당국의 수사는 누가 뇌물을 얼마나 먹었느냐에 초점을 맞출 뿐, 부실의 원인을 철저히 밝혀내 앞으로는 신뢰할 수 있는 공사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수사의 철학이 결여되었다.

최근 일련의 부정·비리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것 하나 투명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대통령은 투명하게 철저히 밝히라고 엄명하지만, 국민의 궁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정도에는 까마득히 미치지 못해 오히려 불신이 조장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풍토에서 미국 모델을 도입하는 기업 구조조정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경제풍토의 변화 없이 제도만 이식한다 해서 우리 기업이 잘 성장한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 미국 모델의 한 사례인 연봉제를 보자. 연봉제는 연공서열제의 비능률을 타파하고 개인별 능력을 제고한다는 장점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연봉제가 성공하려면 기업문화와 경제·사회 제도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직원의 업무성과에 대한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가 보장되어야 한다. 인사고과의 공정성과 객관성이 불신 받으면 기존 연공서열제보다 나을 게 없다. ‘일한 만큼 받는 것이 아니라, 받는 만큼 일한다’는 풍조가 되어버릴 우려도 없지 않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인사제도가 아직도 혈연, 지연, 학연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판에 유독 기업만은 능력 위주로 정착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특히 앞으로 기업도 ‘주인 없는 사회의 기업’이 늘어날 것이고 보면, 연봉제 도입에 있어서야말로 불신 제거가 무엇보다도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 나라는 기업의 구조조정과 관련하여 ‘고신뢰사회’구축이 중요한 과제이지만, 그것은 경제분야에만 국한시켜 단기간에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가, 사회 전반에 걸친 신뢰가 착실히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정치 지도층부터 모든 일을 투명하고도 공정하게 처리함으로써 신뢰를 받도록 앞장서 노력해야 한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신뢰사회가 구축된다. 정치인이라 해서 여기서 예외가 되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모범을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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