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호/1999년9월호]

금융감독위원회와 李憲宰(이헌재) 위원장

‘예리한 칼’과 ‘강도의 칼’

글/李百萬(한국일보 경제부장)

한국경제 주무르는 경제팀 ‘빅4’

7월 25일 오후 5시 은행회관 대회의실. 한국경제를 주무르고 있는 정부경제팀의 ‘빅4’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대우그룹 구조조정에 따른 충격, 즉 대우 쇼크가 상상외로 컸기 때문이다. 정부는 긴급 경제정책 조정회의를 개최, 대우그룹을 사실상 분리·해체하는 것을 골자로 한 ‘7·25 대우 대책’을 발표했다. 대우는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상징이자 재벌개혁의 마지막 고비로 일컬어져 왔다. 강봉균(康奉均) 재정경제부 장관, 이헌재(李憲宰) 금융감독위원장, 전철환(全哲煥) 한국은행 총재, 이기호(李起浩) 청와대 경제수석 등 소위 ‘빅4’는 대우 쇼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중앙은행 발권력을 동원한 무제한 자금지원이라는 초강수의 대책을 내놓았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금융시스템이 깨지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빅4’는 회의를 마치고 약간의 신경전을 벌였다. 과연 누가 대국민 기자회견을 할 것인가, 즉 누가 총대를 맬 것인가를 놓고 실랑이를 벌인 것이다.

기자들은 경제팀의 수장인 강 장관이 기자회견을 할 줄 알았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을 빗나갔다. 이 위원장이 기자회견장에 나타나 마이크를 잡은 것이다. 금융감독위원회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정부는 당시 시장(증시)이 대우 대책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에 대해 가장 고민했다. 대우 대책의 성공 여부는 시장의 반응에 달렸고, 시장이 거부하면 정부 대책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초강수의 대우 대책을 발표했는데도 증시가 폭락하고 시중금리가 치솟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이 위원장은 이런 점에서 대우 대책 발표자로 가장 적격이다. 시장에 대해 영향력이 가장 크고, 나름대로의 신뢰감을 쌓아두었기 때문이다.

이 위원장은 금융감독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금융감독위원회는 금융감독 정책의 최고기구(금융감독 정책기관)이고 금융감독원은 위원회의 결정사항을 집행하는 기관(금융감독 집행기관)이다. 위원회가 머리라면, 감독원은 몸통인 셈이다.

금융감독위원회는 ‘국민의 정부’ 출범과 함께 실시된 행정조직 개편의 일환으로 98년 4월 1일 탄생한 신생기구다. 위원회는 옛 재무부의 금융감독권을 고스란히 가져왔다. 또 올해 단행된 2차 행정조직 개편을 통해 재정경제부로부터 금융기관 인허가권까지 넘겨 받았다. 금융기관의 생사 여탈권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금융감독위원회의 산하기관인 금융감독원은 권한이 얼마나 막강한지는 통합과정을 보면 그냥 알 수 있다. 금감원은 과거 은행감독원과 보험감독원, 증권감독원, 신용관리기금 등 4개 금융 감독기관을 합한 기관이다. 은감원은 어떤 기관이었던가. 금융계 인사들은 5공시절 이원조 은행감독원장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 씨는 은행감독원장이라는 명함 한장으로 ‘금융계의 황제’ 역할을 했다. 이 씨는 5공 시절 최고 실세 가운데 한 명이었다. 금융에 관한한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모든 은행이 은행감독원의 손아귀에 있었다. 이같은 역학관계는 다른 금융 감독기관에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보험감독원은 보험업계를, 증권감독원은 증권업계를, 신용관리기금은 종합금융.투자금융.신용금고 등을 고양이가 쥐 다루듯 하고 있었다.

지금의 금융감독원은 명실공히 4개의 타이틀을 통합한 것과 같다. 시너지 효과를 감안하면 금융감독원의 파워는 과거 4개 금융 감독기관의 파워를 단순 합계한 것보다도 훨씬 더 클 것이다. 금감위는 ‘경제법무부’, 금감원은 ‘경제검찰’이라해도 지나치지 않다.

재벌공화국이라 하지만 어떤 재벌도 금융감독위원장 앞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기업은 돈을 먹고 산다. 저수지 속의 물고기와 같다. 저수지 물을 빼버리면 어떤 물고기도 생존할 수 없다. 금융감독위원회는 바로 저수지 물을 빼고 넣을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 재벌도 기업이다. 금감위가 마음먹고 여신 제재를 가하면 어떤 기업도 온전할 수 없다. 도저히 불가능하게 보였던 재벌그룹간의 빅딜(대규모 사업교환)도 금감위가 성사시켰다.

삼성그룹 이건희(李健熙) 회장도 이 위원장의 끈기 앞에서는 손을 들고 말았다. 바로 삼성자동차 처리와 관련한 사재출연문제다. 전경련과 삼성은 최고경영자의 사재출연은 시장경제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완강히 버텼지만 ‘실질적 권한을 행사한 최고경영자’가 경영실패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이 위원장의 주장을 거부할 수 없었다. 삼성은 결국 삼성생명 주식 4백만주(2조8천억원 상당)를 삼성차 처리비용으로 내놓기로 했다.

이 위원장은 바로 이같은 막강한 금융감독권을 쥐고 지난해 5개 은행의 퇴출을 포함한 금융개혁을 추진했고 올해에는 재벌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말이 개혁이지 내용을 뜯어보면 엄청난 대수술이다.

‘은행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은행불패(銀行不敗)의 신화가 깨졌다. 굴지의 은행이 문을 닫고 짝짓기를 통한 합병이 이루어질지는 IMF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재벌개혁도 마찬가지다. 30대 재벌그룹 가운데 17개가 부도처리되거나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상태에 있다. 바둑에 ‘대마는 죽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는 것처럼 경제학에도 ‘덩치가 너무 크면 죽이지 못한다(Too Big To Fail)’는 대마불사론이 있다. 대우그룹이 바로 대마불사론의 중대한 실험대에 놓여 있다.

칼날은 적재적소에만 쓰여야

그러나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대우그룹이 결국 해체되고 말 것으로 보고 있다. 대우 대책이 발표된 7월 25일은 IMF프로그램이 공식적으로 확정된 97년 12월을 연상케 했다.

대우의 목줄을 죄기 시작한 이 위원장은 한국의 IMF 통치를 선언한 캉드쉬 IMF총재와, 대우 자구 노력을 발표한 김우중 대우 회장은 캉드쉬 총재의 정책 파트너였던 당시 임창열 경제부총리와 너무나 닮아 보였다. 캉드쉬 총재가 ‘병든 국가경제’의 주치의 노릇을 하고 있는 것처럼, 이 위원장은 ‘병든 금융기관과 재벌’을 수술하고 있다.

이 위원장의 파워에 대한 해외 언론기관의 평가는 가히 파격적이다. 미국의 가장 영향력있는 경제전문 통신사인 「블룸버그」는 이 위원장을 ‘한국금융계의 짜르’로 지칭했다. 짜르는 제정 러시아시대의 황제다. 미국의 경제주간지 「비지니스위크」도 지난 6월 ‘아시아의 스타 50명’을 선정, 발표하면서 한국인으로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함께 이 위원장을 꼽았다. 장하성 고려대교수, 남상구 SK텔레콤 사외이사, 영화감독 강재규도 ‘아시아의 스타’로 선정됐지만 이 세 사람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았다. 그러나 김대통령과 이 위원장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었다.

김대통령은 국난을 극복한 국가 지도자로서, 이 위원장은 IMF형 경제수술을 가장 훌륭하게 해낸 경제행정가로 평가했다. 「비즈니스위크」는 이 위원장에게 ‘베테랑 해결사(Veteran Troubleshooter)’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홍콩에서 발행되는 시사주간지 「아시아위크」는 지난 4월 ‘아시아의 파워맨 50인’을 선정, 발표했다. 서열이 흥미있다. 김대중 대통령과 주룽지 중국 총리가 공동 1위를 차지했고, 3위는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 4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5위 리등휘 대만 총통, 6위 고척동 싱가포르 총리, 7위 추안릭파이 태국 총리, 11위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 14위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 16위 이헌재 위원장 ….

금감위가 언제까지 지금과 같은 파워를 과시할 수 있을까. 행정조직론에는 ‘고무풍선의 원리’가 있다. 고무풍선은 풍선을 부는 사람의 폐활량에 따라 크기가 달라진다.

조직이 고무풍선이라면 조직의 장(長)은 풍선을 부는 사람이고, 풍선의 부피는 파워의 크기다. 한국적 행정 풍토에서는 고무풍선의 원리가 정확히 적용된다. 사람에 따라 자리의 파워가 달라진다는 얘기다. 금감위와 금감원이 아무리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더라도 이헌재라는 독특한 통솔력을 가진 리더가 아니었더라면 외국 언론이 평가하는 것과 같은 무시무시한 파워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금감위의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금감위가 갖고 있는 권한은 ‘예리한 칼’과 같다. 제대로 사용되면 병든 사람을 살리는 수술용 칼이 되겠지만 자칫 잘못 사용하면 금융기관과 기업을 괴롭히고 착취하는 ‘강도의 칼’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