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호/1999년9월호]

기업도 수명이 있는가

기업에는 수명이 있는가 없는가. 기업은 영원한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경영실패와 퇴출사례를 보면서 기업도 제 수명이 있는 법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기업은 국가와 사회와의 유기체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기업이 존재하는 국가와 사회의 규율 속에서 발전하고 소멸하는 생명체일 수밖에 없다. 아울러 기업의 수명도 생명관리와 직결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짐작된다.

글 / 裵秉烋 대표편집위원

평균 수명 30년의 의미

제일주의 기업철학을 자랑해온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는 기업수명론을 신봉한 기업인으로 기억된다. 고인은 생전에 경제기자를 만났을 때 기업은 영원할 수 없다고 가르쳐 주었다. 다만 기업이 영속적으로 번영하며 천수를 다하자면 조건이 있노라고 했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기업이 천수는 고사하고 30년 안팎의 단명으로 몰락하는 사실을 지적했다.

고인이 인용한 객관적인 자료가 일본기업들의 흥망사였다. 일본경제를 흠모했던 이병철 회장이 일본기업들의 평균수명이 고작 30년이라는 사실에 놀란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창업기를 겨우 넘기고 있는 한국기업들이 미리부터 평균수명론을 경계하고 대비해야 한다고 일러주고 싶어했다.

고 이 회장이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명치(明治) 29년부터 소화(昭和) 57년까지 계속 우량기업 1백대사에 랭크된 회사는 3개사 뿐이다. 과거 일제시대 우리나라에도 상륙했던 ‘오오시(王子제지)’‘가네보(鍾紡)’‘고노다(小野田시멘트)’가 그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우량기업들은 평균 30년만에 랭킹에서 탈락되고 새로운 회사들이 등장한다는 뜻이다.

이 자료만을 믿으면 기업도 흥망의 운명을 타고 났기에 30년 정도 빛을 내면 수명을 다한 셈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비록 수명이 있다 해도 왜 하필이면 30년일까라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짐작하기로는 창업과 수성을 승계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

30년이라면 한세대로 불리는 세월이다. 창업자가 자신의 집념과 취향을 마음대로 기업경영에 적용하고 지배할수 있는 기간이 30년이다. 창업자가 생전에 기업을 승계시킨 경우에도 자신의 색깔을 지우기 어려운 것이 동양 문화의 특징이다.

일본과 비교해서 우리의 혈통문화가 다를 것이 없다. 오히려 더욱 진하고 절대적이라고 보면 한국기업의 평균수명은 30년에도 미치지 못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의 기업사를 대강 훑어봐도 번창하는가 싶다가도 순식간에 몰락한 사례가 너무나 많다.

재벌성을 모래성에 비유할만한 상황이 바로 지금이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거대재벌의 허무한 붕괴과정을 보면서 대마불사라는 거짓 신화를 잘못 믿었노라고 한탄할 노릇이다.

기울면 재건 어렵다

로마제국 멸망 이후 세계사도 국가의 흥망성쇠의 연속이었다. 건국기를 지나 한창 번영하는가 싶다가도 나라가 기운 경우가 역사의 기록이다. 나라가 망한 경우나 기업이 망한 경우나 근본이 크게 다를 수 없다. 국가나 기업이나 모두 인간이 만든 조직이니 인간이 변하지 않는 한 조직이 그냥 영원할 수는 없는 이치다.

고 이병철 회장이 인재경영을 부르짖으며 사람이 기업의 흥망을 좌우한다는 논리를 편 배경이 바로 이 점이었다. 고인은 일본 스즈게쇼땡(鈴木, 상점)의 실패 사례를 예로 들며 설명했다. 스즈게쇼땡의 도산은 독일의 스텐레스 재벌, 스웨덴의 크로이카 재벌과 함께 전후 세계 3대 기업실패의 표본으로 꼽힌다.

그런데 일본 경제사상 획기적인 성공표본이던 스즈끼가 왜 망했느냐는 진단이 좋은 교훈이다. 이 회장에 따르면 가네꼬 나오요시(金子直吉) 지배인의 원맨 독주로 급성장했지만 초다각화 전략을 무리하게 추진함으로써 막대한 자금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던 점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원맨 독주를 사내에서 막을 힘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가네꼬는 인재들을 우대했지만 자금난에 경영을 축소하자 금방 내부 조직은 붕괴되고 가네꼬 신화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평소 가네꼬는 재주를 믿고 세론을 무시했으며 정치와 여론에 무방비했었다. 그래서 말기에는 악덕기업인으로 규탄받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이같은 사례에서 보듯 우량기업이라 해도 한번 무리수에 덜미가 잡히고 여론의 지탄을 받게 되면 무너지고 만다는 사실이다. 또한 경영자가 아무리 두뇌가 뛰어난 수재라 해도 기울고 있는 기업을 되살리기는 창업보다 어렵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 회장은 기업의 영속번영을 위한 조건으로 지도력, 사풍, 위험관리, 변화의 발상, 앞을 내다보는 진취력 등을 꼽았다.

기업의 지도력이란 앞을 내다보는 안목과 결단력을 뜻한다. 사풍은 기업이 축적한 개성으로 조직과 구성원의 에너지원을 뜻한다. 위험관리란 호황이나 불황을 가리지 않고 사전 투자로서 가능하며 변화의 발상이란 현상유지를 거부하고 혁신하고 변신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진취력이란 미래의 영역에 한발 앞서 투자하라는 뜻이다.

이같은 조건들은 위에서부터 발상돼야 할 것이며, 아래로부터의 발상을 억제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그리고 이는 기업병의 예방책이자 기업 수명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조건이라는 해석이다.

李秉喆(이병철)은 어떤 인물인가

이 회장 생전에 그의 이름 앞에는 돈 자가 붙어 다녔다. 돈병철이란 말이 결코 불명예나 비하를 뜻하지는 않았다. 금년들어 쟁점으로 부각된 삼성자동차의 투자실패와도 아무런 상관없는 그 시대의 속어였을 뿐이다.

이 회장은 스스로 부실기업을 남기지 않았다고 자부한 창업가였다. 당시 최고 권력자의 당부가 있어도 사업성이 없는 투자는 할수 없노라고 답변했던 이야기가 있다. 그는 자신을 상인이라 불렀기에 남는 것이 없는데는 투자할 수 없다는 지론이었다.

오늘의 삼성전자는 세론의 비난을 무릅쓰고 강행 투자했던 사업이다. 삼성이 전자에 투자함으로써 망하는 길로 접어들었다는 악평을 수없이 들었지만 지금은 우리 경제의 성장축을 담당하고 있다. 삼성자동차가 그룹사상 최대의 실패로 꼽히고 있을때 이 회장이 생존해 있었다면 어떠했을까를 짐작해 본다.

오늘의 이건희 회장은 고인이 장남과 차남을 제쳐두고 후계자로 지명한 그의 3남이다.

생전에 꼼꼼하고도 철두철미하게 양성한 후계자가 어느 부분을 승계하고 어느 부분을 망각했을까를 생각해 보게 한다.

기자가 주요 기업인들의 취재록을 묶은 「재계비화(財界秘話)」라는 책자를 출판한 적이 있었다. 79년 초로 기억하지만 동경에 머물던 이 회장이 어느 편에 재계비화를 읽으신 모양이다.

귀국하자마자 만나고 싶다는 전갈이 있어 태평로 빌딩 28층에 있는 이 회장실을 방문했다.올챙이 기자 시절 세칭 사카린 밀수사건이 났을 때 기자회견에서 뵙고 처음이었다. 이 회장은 재계비화의 첫머리에 편집된 ‘이병철과 정주영의 전면전’을 펼쳐놓고 나를 맞아 주었다.

“배 부장은 나를 한번도 만나보지 않고 어찌 내 속을 들여다 본듯이 글을 썼오이까.” 당시 이 회장과 정 회장은 사업상 불꽃 튀는 싸움을 벌였다. 두 분의 거동 때마다 수많은 카메라가 추적하고 신문경제면에는 그들의 표정이 연일 대서특필 되었다. 현대건설이 시공하던 어느 공사가 말썽이 되어 중앙일보가 크게 보도했을 때 두 재벌간의 전면전이 표면화되었다.

언론사를 갖지 못했던 정주영 회장이 당시 이명박 현대건설 사장에게 호령하여 신문광고로 맞섰었다. 중앙 매스컴의 과장보도를 규탄하는 현대그룹의 광고전 자체가 빅 뉴스였다. 두 재벌 싸움은 경제계를 진동시키듯 들썩거렸다. 당시 최규하 대통령께서 우려를 표명하고 김종필 공화당 총재가 싸움을 말리려 나섰다.

그러니 ‘이병철과 정주영의 전면전’이 경제기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회장은 정 회장과의 피할수 없는 숙명적 결전을 쓴 이야기를 그대로 수긍했던 것이다. 그때 이 회장은 밖에서 듣기보다는 솔직하고 담백했다는 소감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無敗(무패)와 完勝(완승)의 막상막하

이병철과 정주영, 두 거물이 일군 재벌성이 기업의 평균수명을 넘겼다는 사실을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두 회장이 축조한 황금성을 ‘돈세계’의 장원(壯元)이라 평가하는데 주저하고 싶지 않다. 어느 벼슬가나 세도가에 비해서도 명예나 권위가 부족함이 없다고 볼수 있다.

재계비화가 출판될 때(1978.8) 현대그룹의 외형은 6조원에 종업원 13만명이고, 삼성그룹은 5조3천억원에 10만명의 종업원이 뛰고 있었다. 개인소득으로 보면 정 회장이 연간 16억 6천만원을 벌어 9억3천만원의 세금을 납부했고, 이 회장은 4억8천만원을 벌어 2억3천만원의 세금을 물었다.

외형상으로 보면 현대그룹이 앞서고 삼성그룹이 그 다음이었다. 그러나 이 회장은 현대그룹의 재계 정상에 승복하지 않는 성미였다. 토목공사로 번 돈이 제조업으로 번 돈과 같은 성질이냐는 자부심이 있었을 것이다.

반면에 정 회장은 이미 중화학 공업시대를 맞아 승부는 벌써 나지 않았느냐고 자신했을 것이다. 주판알을 굴리고 저울을 달기만 하는 삼성식 승부수는 안중에도 없다는 배짱이 생기고도 남았을 것이다. 당시 기자는 두 회장을 돈과 명예의 막상막하로 표현했다. 그러면서 철저하게 차별되고 비교되는 두 그룹의 기업문화도 나름대로 해석해 봤다. 정 회장을 억센 일꾼으로 표현한다면 이 회장은 가냘픈 선비형이다. 성장 과정과 기업을 일으킨 배경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 회장이 부잣집에서 태어나 서당공부를 마치고 서울서 중학교를 다닐 때, 정 회장은 두메산골에서 화전을 일구고 있었다.

그리고 이 회장이 정미업을 할 때 정 회장은 쌀장수를 시작했다. 사업에 성공하면서 이 회장이 수출입국에 정진했다면 정 회장은 중공업 입국에 앞장섰다. 기자의 안목으로는 이 회장이 소프트웨어라면, 정 회장은 하드웨어로 비쳐진다.

당시 정 회장은 전경련 회장을 연임하고 있었으니 재계의 제왕이었다. 반면에 이 회장은 초대 전경련 회장이었으니 전직 제왕인 셈이다. 이렇게 생각이 미치는 어느 항목으로 비교해도 두 회장간에는 차별이 있고 색깔이 다르다는 결론이다.

그렇지만 결론은 무패와 완승이라는 막상막하로 저울질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껏 현대와 삼성은 선두를 다투지만 두 창업자가 지닌 권위나 그룹의 브랜드가 갖는 유무형 자산가치를 차이나게 계산하기는 어렵다. 기업은 라이벌간 경쟁의식 때문에 성장한다는 소감도 생긴다.

좋은 맞수 때문에 피곤할 수도 있겠지만 지치지 않고 도전과 응전의 무한한 에너지를 분출시키는 작용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기업에도 수명이 있다면서 일찌감치 체념해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수명은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캡션 : 한국의 대표적 장수기업을 일으킨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왼쪽)과 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이회장 생존시 만나 환담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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