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호/1999년9월호]

노숙자가 오히려 늘고 있다

글 / 李斗石 편집위원(전 문화일보 논설실장)

경제대란이 낳은 사회구조적 희생자

노숙자. 이름도 성도 없다. 있지만 잊어 버렸다. 말하고 싶지도 않다. 한여름, 찌는 듯한 삼복더위 속에 서울역 대합실이나 지하도, 공원을 배회하는 노숙자의 삶은 고달프기 짝이 없다. 단란한 가정과 삶의 의욕을 버리고 ‘죽은 목숨’처럼 살아 온지 벌써 한 해가 지났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할 뿐이다.

노숙자는 일찍이 겪어보지 못했던 외환위기 - 경제대란의 부작용으로 생긴 사회구조적 희생자이다. 지난해 느닷없이 닥친 IMF 회오리 바람에 직장에서 쫓겨난 월급쟁이, 부도로 쓰러진 중소기업인, 일선 건설현장에서 일거리를 잃은 막노동꾼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노숙자를 신체적, 정신적 결함으로 활동능력이 결여된 정신착란자나 알코올중독자로 백안시하는 사회의 냉대에 분통이 터진다.

더욱이 올들어 이미 경제대란의 위기를 넘기고 경기가 되살아났다면서 정부나 일부 언론이 떠벌리지만 노숙자의 처지에는 그림의 떡이다.

주식투자로 떼돈을 번 ‘가진 자’들이 백화점의 외제 사치품을 싹쓸이하는가 하면, 여름 바캉스철 해외여행객이 김포공항 대합실을 메우는 등 흥청망청 하지만 노숙자에 대한 사회의 관심과 구호의 손길은 시들하기만 하다.

한 술 더 떠 정부나 서울시 당국은 노숙자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손을 놓고 있으니 부화가 돋고 속이 끓는다.

게다가 노숙자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고 있으니 어떻게 된 영문인지 통 알 수가 없다. 지난해 말 노숙자는 4천5백명 선이었으나 실직자가 계속 양산되면서 올들어 6천2백명으로 37.7% 가 늘어났다(99년 3월 말 복지부 집계).

이처럼 늘어난 노숙자 중 5천7백여 명은 정부나 사회단체가 보호시설로 마련한 ‘자유의 집’이나 ‘희망의 집’ ‘노숙자 쉼터’ 등에 수용돼 있으나 나머지 5백여명은 서울역이나 지하철 역사, 지하보도, 공원 등에서 여전히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다.

노숙자는 서울이 가장 많다. 전체의 71%인 4천4백명이나 된다. 지방 대도시인 부산(8백10명), 대전(1백20명)에도 노숙자가 있지만 서울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들 대부분은 일자리를 못 구한 건설현장의 막노동꾼(38%)이나 중국음식점의 ‘철가방’, 요리사 보조들이며 화이트 컬러인 월급쟁이나 중소기업 사장님도 더러 있다.

이처럼 노숙자가 줄어들지 않고 늘어나는 이유는 노숙자 정책이 제대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발행되는 한 종합일간지는 현장 취재를 통해 노숙자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밑빠진 노숙자 정책 - 70% 이상이 번 돈, 술·도박으로 탕진’했다는 내용의 이 고발기사의 리드는 이렇게 시작된다.

“노숙자를 위해 마련된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 ‘희망의 집’에 묵고 있는 김 모(55) 씨는 쓰레기 분리수거 작업 등 공공근로를 꾸준히 해 월 60만원씩 벌고 있다. 하지만 희망의 집에 들어가기 전 거의 매일 꼭 ‘한 잔’을 걸치다 보니 통장에 남는 것은 별로 없다.”

한마디로 공공근로사업 등으로 번 돈을 저축하기보다는 술과 노름 등으로 탕진하는 노숙자들이 많아 기초생활을 할 수 있는 일자리와 숙식을 제공하며 자립기반을 마련해 주기 위한 노숙자 정책(서울시 경우 올 예산 54억원)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마저도 중단할 경우 희망의 집 등에 수용중인 노숙자들의 대부분이 다시 거리로 몰려나올 것이 뻔하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이 정책을 계속 시행하고 있다고 한다.

노숙자는 이 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이나 유럽·일본 등 잘 사는 나라에도 노숙자가 적지 않다. 하지만 미국이나 서구의 노숙자는 시쳇말로 우리와 번지수가 틀린다.

홈리스(homeless)라고 부르며 밤에 잠잘 수 있는 고정적인 야간 주거지가 없거나 거처를 마련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노숙자로 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서구 사회에서는 노숙자를 우리처럼 부랑자나 걸인 등 사회적 낙오자로 부정적인 인식이나 낙인을 하지 않고 자본주위 사회의 구조적 희생자로 간주, 이들을 감싸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사회도 노숙자를 보는 시각이 서구와 비슷하다고 한다. 이를테면 일본 신주쿠 역에는 노숙자들이 아예 골판지로 집을 짓고 사는데 이를 집으로 볼 것이냐 쓰레기로 볼 것이냐를 놓고 지난해 3월엔 재판이 벌어지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일본재판부가 이를 쓰레기가 아닌 ‘집’이라는 쪽에 손을 들어주었다는 것이다. 또 우에노 공원 등에는 노숙자들이 1인용 텐트를 치고 장기 노숙을 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노숙자라고 하지만 그들의 차림도 텐트도 깔끔하기만 해서 처음 본 사람은 일반시민들이 캠핑을 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고 한다. 이들은 유명 음식점에서 남긴 음식을 골라 먹으며 TV도 시청하고 핸드폰으로 고향의 가족들에게 안부를 묻는 유복한 노숙자도 있다고 하니 부러워 할만도 하다.

행정편의적 해결 발상 버려야

노숙자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새로 늘어나는 노숙자들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계층간 소득격차에 대한 위화감과 실직에 대한 절망감, 사회와 정부에 대한 배신감으로 폭발 직전에 있다. 이들을 방치할 경우 집단화된 돌출행동이 자칫 새로운 사회불안 요소로 등장할지 모른다.

이제 노숙자의 이름으로, 노숙자 문제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 우선 지금처럼 노숙행위를 전면 금지하고 이들을 보호시설에 수용하는 방식으로는 문제해결이 어렵다.

한마디로 행정편의주의가 아닌 노숙자의 입장에서 해법을 찾는 발상 전환이 필요하다. 그런 해법의 하나로 노숙자 문제를 실업대책과 연계해 종합적으로 접근해야 하며 이를 책임지는 통합기구가 필요하다.

이와 함께 공공기관, 민간 시민단체, 종교기관 등에서 산발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노숙자 보호 및 지원업무간에 서로 정보를 나누고 업무협조를 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

특히 노숙자 문제를 정부만이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며 민간단체의 협력이 매우 중요하다. 이미 선진국에서 널리 활성화된 민간 노숙자 숙식, 훈련센터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제도를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영국이 1970년대 IMF 구제금융 당시 실직자와 노숙자를 위한 주거안정을 목표로 새로운 주거법(1977년)의 제정 및 직업훈련 등 종합적 접근으로 난국을 극복한 사례를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가난문화’라는 사회학 개념이 있다. 희망과 의욕의 상실, 그리고 게으름이 가난문화의 대표적 특징이다. 가난에 젖은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도,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는다.

가난 그 자체를 숙명으로 여기는 듯 철저히 가난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일단 이런 상태가 되면 아무리 좋은 일자리를 주고 복지후생을 강화해 주어도 그들은 종전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나라 노숙자들이 이런 가난문화에 빠져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이들에게 따뜻한 사회의 손길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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