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호/1999년9월호]

한국은행 총재의 과욕

글 / 權和燮 권화섭 편집위원(전 문화일보 논설위원)

이코노미스트들의 패배

경제정책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무엇인가? 성장과 안정은 양립 불가능한 것인가? 이 두 가지가 충돌할 때는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 신문지상에서 경기과열과 금리인상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한번쯤 생각하게 되는 질문들이다.

1990년대에 들어와 미국경제는 놀라운 기적을 실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지난 91년 이후 지속적인 경제성장으로 실업률이 이른바 ‘NAIRU(비인플레적 실업률)’ 한참 밑으로 떨어졌는데도 물가마저 이례적으로 낮은 수준을 유지함으로써 성장과 안정의 양립성을 실증해 보인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이코노미스트들은 이를 결코 일반적 현상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세출의 경제전문가인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탁월한 통화정책 운용과 세계경제의 흐름이 미국에 유리하게 전개된 특별한 행운의 결과로만 치부하려고 한다.

여기에서 필자는 이코노미스트들의 고집스러운 패배주의를 재차 확인하게 된다. 미국경제의 기적으로 이제는 시대적 유물이 되었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의 상반성(相反性)을 주장했던 필립스 곡선의 망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망상이다. 왜냐하면 이코노미스트들이 그처럼 걱정하는 인플레이션은 미래에 닥칠지도 모를 개연적 위험일 뿐인데 반해 실업률은 현재를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너무나 현실적인 문제로서 전혀 성격이 다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면 그것은 사후적으로 관찰되는 것일 뿐이지 인플레 억제를 위해 사전적으로 실업률을 높여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설령 경제학적으로 그것이 성립된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사고방식은 너무나 비인도적이다.

그렇지만 이코노미스트들은 이러한 비판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경제학적으로 너무나 순진한 주장이어서 전혀 언급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점에서 필자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인 케인즈의 응원을 청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923년 그는 동료 경제학자들의 경직된 사고방식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장기적 관점은 현실 문제의 올바른 지침이 아니다. 장기적으로 우리 모두는 죽는다. 이코노미스트들이 어려운 문제를 피해 쉽고 쓸모 없는 과제만을 다루려 하는 것은 폭풍우가 몰아칠 때 그것이 지나면 파도가 다시 잔잔해질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흡사하다.”

케인즈는 결코 인플레이션 찬양론자가 아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통화론자들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폭풍우가 몰아칠 때는 통화론자들의 장기적 관점 보다는 폭풍우 그 자체를 직시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케인즈가 우려했던 바로 그 폭풍우는 1929년 10월의 주가폭락으로 나타났다. 그 뇌관은 경기과열을 우려한 FRB의 금리인상이었다.

잠시 그때의 상황을 살펴보면 1925-28년 사이에 FRB는 재할인율을 3.5%에서 4.0% 수준으로 유지했다. 그러다가 4차례의 금리인상을 단행, 1929년 여름에는 재할인율을 6%로 높였고 그 충격으로 뉴욕주가는 9월 고점에서 11월 저점 사이에 35%나 하락했다.

물론 이것은 1930년대 대공황의 서막에 불과했다. 그것이 진짜 무서운 기세를 띠게된 것은 1930년 6월 스무트-홀리 관세법이 미국의회를 통과하고 이를 계기로 각국이 경쟁적인 보호무역의 회오리에 휘말려든 결과이다.

당시 FRB는 31년 중반까지 재할인율을 1.5%까지 내리면서 기업도산과 금융경색을 막으려고 했으나 역불급이었고 32년 6월까지 뉴욕주가는 무려 78%나 하락했다.

이러한 얘기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상식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60여년이 지난 1990년대에 아주 유사한 사태가 우리와 인접한 일본에서 재연되었다.

지난 1987년과 88년 일본은행의 재할인율은 2.5% 수준이었고 이러한 저금리를 바탕으로 80년대 후반에 일본에서는 1920년대의 미국과 유사한 투기적인 증시붐과 거품경제가 연출되었다. 이에 자극 받아 일본은행은 89년부터 90년 8월 사이에 재할인율을 6%까지 올렸고 그 충격으로 닛케이 지수는 92년 8월까지 63%나 하락했다. 일본판 소(小)공황이 촉발된 것이다.

1930년대 대공황이나 일본의 장기불황을 통화당국의 금리정책 탓만으로 돌리는 것은 억지이다. 그러나 뉴욕 도이체방크증권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에드워드 야데니의 이러한 분석에서 우리는 통화당국의 금리정책이 경제적 대재난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정책의 선택과 발표는 신중해야

우리나라의 통화신용정책은 한국은행의 책임으로 되어있다. 97년 말의 한은법 개정은 한국은행의 독립성과 통화신용정책의 책임소재를 좀더 분명히 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이에 관한 시비는 별개로 하고 지난 5월 이후 우리는 전철환 한은총재로부터 “선제적 통화신용 정책”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들어왔다. 그린스펀 의장이 즐겨 쓰는 말로서 물가가 오르고 난 이후에는 금리정책을 펴봐야 효과를 보기 어려우므로 미리 예방조치를 취하겠다는 말이다. 또한 7월 이후 경기회복이 빨라지고 증시 붐이 일면서 한은 관계자들이 금리인상을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한국경제신문 7월12일자)

중앙은행 총재의 한마디 말은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 사람이 FRB의 그린스펀이면 더욱 그렇다. 이번에는 전절환 총재의 발언도 비슷한 파장을 일으켰다.

한국은행측이 7월13일 “현단계에서 금리인상을 검토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해명했지만(중앙일보 7월14일자) 이후 시중금리가 한때 9%대로 반등하고 그 여파로 7월23일 주가폭락 사태가 빚어졌다.

이 과정에서는 언론도 톡톡히 한 몫을 했다. 경기지표가 조금이라도 고개를 들고 증시가 오름세를 타면 항상 물가불안을 들먹이며 안정기조의 정책전환을 주문하는 것이 우리 언론의 변함없는 행태이기 때문이다.

경제가 정상적인 주기적 변화의 과정에 있을 때는 이러한 신중론이 현명한 처사일 수 있다. 그러나 일본경제의 장기불황과 95년 멕시코 위기에 이어 97년 동아시아 위기가 터지고 다시 러시아와 브라질로 위기가 파급되는 것은 결코 예사로운 상황이 아니다. 그것은 경제적 격변의 위기상황인 것이다.

경제상황이 이러할 때에는 케인즈의 말처럼 장기적 관점의 선제적 통화정책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당장의 폭풍우로 인해 기업들이 쓰러지고 새로운 금융패닉이 촉발되는 것을 막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것은 무작정 팽창적 통화정책을 써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또한 경제개혁과 기업 구조조정을 늦추자는 말도 아니다. 그보다는 인접한 일본의 장기불황과 최근 공식적으로 디플레이션 진입을 인정한 중국의 상황을 면밀히 살펴 그 파장의 확산에도 경계해야 한다는 말이다.

최근 연간 대비 1% 이하의 이례적인 안정세를 보이는 소비자 물가동향을 행여 우리의 경제정책 운용능력의 성과로 생각하면 큰일이다.

미국과 우리의 정책환경은 천양지차이다. 미국식 미세 조정의 통화정책을 당장 차용하려는 것은 과욕이 아닐까?

사진캡션2 : 지난달 한은이 금리인상을 검토한다는 보도 직후 시중 금리가 9%로 급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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