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호/1999년9월호]

범법자 영웅시 풍토 문제 있다

글 / 盧癸源 노계원 편집위원(전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탈옥수 신창원이 남긴 것

탈옥수 신창원의 일기가 화제다. 2년 반의 도주와 재범행의 불안한 세월 동안에도 그는 틈틈이 정신을 가다듬어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정리하는 글을 써왔다.

대학노트 3권 분량에 이르는 이 일기에서 탈옥수 신은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과, 그가 관계했던 여인들에 대한 애틋한 정한의 심정, 위기의 순간들에 대해 격정적으로, 때로는 원망에 찬 기억들을 서술하고 있다.

경찰의 비리와 비겁함, 권력과 언론의 부패와 무능을 비아냥대고 질타하면서 반성을 촉구하는가 하면 교도행정의 불공평성과 비인간성을 고발하고, 나름대로 우리 사회에서 범죄가 계속 증가하는 원인을 진단하기도 한다.

“인간이 망가지면 얼마만큼 망가질 수 있는가를 똑똑히 보여 주겠다. 그들의 힘, 억압, 모욕으로 사람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길 바란다. 죽어야할 사람은 누구였는가? 그들이었는가? 아니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속죄의 삶을 살고자 했던 사람들이었는가?”고 반문하면서 (권력을) 쥔 자와 (재력을) 가진 자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는 데서 일기는 끝난다.

신창원이 오랜 수형생활을 체험한 강도치사의 범죄인이고, 탈옥과 도주, 재범행의 질곡이 연속된 인생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사회를 보는 시각이 부정적이고, 원망과 저주에 가득차 있으리라는 짐작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의 사회인식이 범법자 공통의 뒤틀린 시각 때문이라고만 치부해버리기에는 너무 절실하고, 대부분 정곡을 찌르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래서 그를 ‘영웅시’ 혹은 ‘의적시’하는 중론이 부분적으로나마 형성됐다고 생각된다.

공직사회를 비롯 사회 전반에 창궐하는 부정과 비리, 법규 집행의 비형평성, 심화되는 빈부의 격차로 고달파지기만 하는 민초들의 삶, 갈팡질팡하는 교육정책, 극한으로 치닫고 있는 황금만능주의적 물질숭배, 타인의 입장은 배려하지 않는 자기중심적 이기주의, 향락과 퇴폐의 풍토화 현상 등이 한낱 잡범에 불과한 신의 탈주와 범죄행각을 영웅시하고 의적시하는 중론을 야기시킨 토양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탈옥수 신창원의 일기는 이러한 개탄스런 세태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개선을 촉구하는 그 나름대로의 순수한 항변이요 절규였을까.

아니면 그가 자신을 쫓는 경찰에 의해 잡히거나 사살당했을 때 공개되기를 기대하고 의도적으로 작성한 자기 변명과 자기 미화를 노린 것일까.

이 일기에서 신은 시종일관 자기변호에 급급하다. 재소자들의 심정을 적은 부분에서는 ‘사형을 몇번씩 당해도 할 말 없는 죄인’이라는 반성과 후회를 고백하기도 한다.

그러나 유년시절부터 그가 탈선하게 된 동기를 어머니의 죽음과 가난, 계모의 편애, 학교에서의 냉대, 아버지의 매질 등 불우한 가정환경 탓으로 돌리고 있다. “영웅도 악마도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환경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가정환경이 나쁜 아이가 모두 범법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탈옥 후 무려 1백건 5억원에 가까운 강도·절도 및 강간(경찰 발표) 등 거듭했던 범행에 대해 양심의 가책이나 후회 같은 것이 엿보이는 구석은 전혀 없다. 가진자와 쥔 자에 대한 저주와 원망만 즐비하다. 대신 그가 탈옥 후에 겪어야 했던 쫓기는 자로서의 극한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매우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도주와 은신의 과정에서 만난 여인들에 대해 후한 선심을 베푼 것을 강조하고 있다. 다방과 술집에서 빚을 지고 수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여자들에게 4백~5백만원씩을 주어 빚을 갚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도왔다는 것이다.

돈을 준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도망다니는 탈옥자로서 인지자의 입을 봉하고 은신처를 확보하기 위한 자기보호 수단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는 일기에서 불우한 유년시절의 가정환경 때문에 범죄자가 됐으며, 교도소의 비인간적 교도행정 때문에 탈옥을 했다고 밝힘으로써 자신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유도하고 있다.

도주행각 중에 맞닥뜨린 경찰의 무능과 비리를 폭로하고, 문란해진 사회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무소불위한 권력과 재력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다고 호언하는 것은 그가 단순한 범법자가 아니라 ‘의적’이요 ‘영웅’이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한 세심한 배려인듯 싶다. 어느 외국신문이 신을 가리켜 ‘현대판 로빈 훗‘이라고 했다 하지 않던가.

그런 용의주도한 목적이 있어 그 황망한 도주 상황에서도 틈틈히 일기를 쓰고, 그 일기장을 갖고 다닌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탈옥 후의 행적에서 의로운 행동 따위는 눈을 씻고 보아도 발견되지 않는다.

‘글’과 ‘사람’ 사이

그러나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신의 일기를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어휘의 선택, 맞춤법과 문장, 사회현상에 대한 통찰력, 적절한 비유, 묘사력 등이 중퇴라는 학력에 비하면 거의 완벽하고 논리가 정연하다는 점이다.

글씨 자체도 흘림이 없이 정연하다. 강도치사에 탈옥을 하고, 강도와 절도를 일삼아온 흉악한 범법자의 글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글은 곧 그 사람의 성품과 인격을 나타낸다는 말은 헛소리란 말인가.

고려말 학자 김구용은 저서 ┌척약제집┘에서 ‘옛 사람의 말에 도덕을 갖춘 사람은 반드시 문장에 능하나, 문장이 능한 자가 꼭 도덕을 갖춘 것은 아니다. 문장은 있으나 도덕을 갖추지 못하면 문인에 지나지 않은 것이니, 그들이 지은 글은 꼭 세상에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고 했다.

한편 중국의 루쉰 연구가인 왕스진은 그의 저서 ┌루쉰전(魯迅傳 - 申榮福 역)┘에서 ‘루쉰은 병적인 사회의 불행한 사람들 가운데서 글의 소재를 많이 취했는데, 그 목적은 병의 원인을 드러내어 치료에 주의하도록 각성시키기 위해서였다’고 지적했다.

탈옥수 신창원은 그의 일기를 통해 가정과 학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교도행정의 비인간성과 경찰의 무능과 비리를 질타함으로써 병든 사회의 일면을 고발하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행적이 범죄의 수렁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하는 데는 실패했음을 입증함으로써 우리에게 ‘글’과 ‘사람’ 사이의 괴리에서 오는 환멸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한다. 우리 주변에는 말과 글은 번지르하면서도 행동은 음흉하고 이기적인 그런 정치인, 그런 지식인들이 너무 많다.

사진캡션2 : 탈옥수 신창원은 검거 직후에도 당당한 표정을 보여 일그러진 사회 가치관의 단면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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