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호/1999년9월호]

재벌개혁 문제있다

글 / 崔靑林(최청임 조선일보 논설실장)

재벌 구조개혁의 원칙과 기준

재벌개혁은 당초부터 방향과 원칙이 흔들렸다. IMF(국제통화기금)측으로부터 기업의 지배구조를 개선하라는 압력을 받았을 당시에는 기준과 원칙을 정해 재벌개혁을 단행하려는 정책의지가 강했다.

재벌 구조개혁의 원칙과 기준은 첫째, 기업의 부채비율을 200%로 축소해서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둘째, 재벌계열회사간의 상호출자 및 상호지급보증을 금지하며 셋째, 공정거래질서를 확립하는 한편 넷째, 재벌오너의 독단을 방지하기 위해 기업의 지배구조를 개선하며 다섯째, 부실회사 및 비전문 업종을 정리한 뒤 핵심 역량을 지닌 주력 전문업종 위주로 사업 영역을 단순화시킨다는 것이었다.

이런 원칙과 기준은 대체로 경제부처 장관들간에 컨센서스를 이뤘다.

제도와 원칙과 법에 의해 재벌구조를 뜯어 고친다는 방향이 설정됐던 것이다.

당초에는 김대중 대통령도 경제장관들의 재벌개혁 원칙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대통령 스스로가 재벌그룹의 임의단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 임원진과 회동하고 이와 같은 원칙과 기준을 제시, 합의를 이끌어 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통치이념으로 내건 김 대통령으로서는 은행 등 채권단을 통한 재무구조 개선 약정과 부실계열사의 자율정리 약속을 받아낸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경쟁원리와 흥망법칙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원리에 따라 기업개혁을 유도할 경우 시간이 많이 걸리는 문제가 있다. 김대중 정권과 정치권은 뭔가 가시적 성과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시장원리와 원칙에 의한 재벌개혁을 참아줄 만한 성숙함이 없었다.

현정부는 민주적 시장경제 철학을 포기하고 정부개입에 나섰다. 집권 정치세력도 맞장구를 쳤다. 정치권이 정부개입 정책의 나팔수로 나서서 기업간의 빅딜(업종 맞교환)이 마치 개혁의 상징인 것처럼 떠들기 시작했다.

박태준 자민련 총재가 재벌그룹 관계자들을 만나 업종 맞교환을 강력하게 권유했다. 김원길 당시 국민회의 정책의장도 기업간 빅딜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정작 기업 및 재벌의 구조개혁을 주도해야 할 경제팀은 소외되고 정치개혁에 전념해야 할 집권 정치세력이 정치개혁보다는 재벌개혁을 선도하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기업개혁은 경제논리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는데도 정치논리가 압도하는 해프닝이 벌어진 셈이다.

기업개혁은 실직적으로 차분하고 순리대로 이루어지기는 커녕, ‘구호로서의 개혁’으로 전락했으며 도식적이고 형식적인 성향으로 흘렀다.

일부 재벌과 정치권의 결탁설

정치권이 엉뚱한 방향으로 재벌개혁의 이면 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어느 재벌총수의 종용이 있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재계가 빅딜이라는 명분으로 이득을 챙기기 위해 정치권을 이용했다는 소문이었다.

기업인수 및 맞교환 과정에서 과거처럼 종자돈(시드머니) 및 운영자금 지원, 빚잔치, 융자금의 출자전환 등 각종 특혜를 받으려는 속셈이 작용했는지 모른다.

일부 재벌들이 빅딜을 찬성하면서 정치권의 발언을 지지한 것을 보면 그와 같은 일부 재벌과 정치권의 합작음모론이 사실일 가능성을 보여준 꼴이다.

전국경제인협회 회장과 그룹의 구조조정 본부장들이 필자와 비공식적인 토론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

필자는 그들에게 ‘과잉 중복투자를 해소하고 과당경쟁을 줄이기 위해 업계가 빅딜을 추진한다고 했는데, 과잉시설을 줄이려면 공장을 폐쇄하거나 해외에 매각하는 것이 옳지 다른 회사를 인수하거나 맞바꾸려는 것은 속임수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했다. 그들은 납득할 만한 답변을 하지 못했다.

경과를 보더라도 빅딜정책은 실패했다. 삼성자동차와 대우전자를 맞교환한다는 재벌간 빅딜은 엄청난 후유증만을 남긴 채 무산되고 말았다. 각각 부실투성이인 두 회사를 맞교환한다는 발상자체가 애당초 무리수였다.

대우전자는 해외에 엄청난 부실자산을 보유하고 있어서 자산평가 자체도 어려운 실정이었으며, 삼성자동차는 4조가 넘는 빚더미를 안고 있으면서도 자산은 1조밖에 안되는 부실업체였다.

이렇게 골치덩어리 회사를 서로 교환한다는 발상자체가 ‘정치적 쇼’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삼성자동차는 법정관리 신청 상태로 정리절차를 밟게 됐는데, 이건희 회장의 사재출연 과정에서 삼성생명주의 평가차익 특혜 문제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었을 뿐이다. 대우전자도 빅딜이 무산되었고, 해외매각 교섭이 진행중이다.

LG반도체의 빅딜은 현대그룹과 LG그룹간의 인수가격을 둘러싸고 숱한 논란을 겪은 끝에 현대그룹에 넘어갔으나, 각종 정치적 의혹이 불씨를 남겼다.

국민의 정부가 재벌개혁을 추진하면서도 유독 현대그룹에 대해서만은 기아자동차, LG반도체 등 대형 사업 분야를 넘겨줬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YS정부는 ‘국제화’를 추진했고 DJ정부는 ‘현대화’를 추진하고 있다는 비꼬는 말들이 생긴지 모른다.

문제점과 시행착오 줄여야

정부개입에 의한 기업 구조조정은 이번 대우그룹 구제금융 사태를 보더라도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대우그룹은 지난 1년여 동안 구조조정을 하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중견기업과 중소기업을 인수하고 해외사업을 확대했다.

대우는 지난 1년여 동안 재무구조를 개선하기는 커녕 부채를 추가로 17조원이나 더 늘렸다. 투신사 및 종금사 등 제2금융권에서 CP(기업어음) 회사채 등을 남발, 빚을 마구잡이로 증가시킨 셈이다.

채권금융기관들은 대우그룹이 설마 망할까 하는 ‘대마불사론’의 허망한 믿음을 근거로 돈을 무책임하게 빌려줬음이 드러났다.

대우는 결국 사실상의 부도를 내고 지분 및 채권단의 구제금을 받게 되었다. 대우는 그룹해체 과정에 들어갔는데 20조~40조의 손실이 예상돼 공적자금이라는 막대한 국민세금이 들어갈 판이다.

정부가 기업개혁을 주도하면서 대우에 대한 적기 개입기회를 놓쳐 국민부담만 늘려놓았다. 정부개입의 한계를 나타낸 것이다.

대우그룹뿐만 아니라 대기업 구조조정은 실패한 경우가 많다. 대기업의 구조개혁은 절반 가까이가 실패하여 법정관리나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과정에 들어갔다.

기준과 원칙 없는 워크 아웃

전경련이 총자산 1조원 이상인 61개 그룹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9개(46%)가 법정관리, 워크아웃, 화의절차를 밟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채를 동결하고 은행부채를 출자로 전환하는 것이 법정관리 및 워크아웃이다.

그런데 이런 워크아웃에는 기준도 없고 원칙도 없다. 살릴 만한 기업을 살리지 않고 마땅히 죽어야 할 기업을 은행돈을 출자로 전환하여 이자부담을 덜어주고 있다.

채권인은 기업을 도산시킬 경우 부실채권이 갑자기 늘어날 것을 우려해서 밑빠진 독에 물붓기식으로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언젠가는 부실이 눈덩이처럼 늘어날 게 뻔한데도 말이다. 금융기관과 기업의 무책임과 도덕적 해이 때문에 우리나라가 IMF 사태를 겪는 등 곤경에 처했는데도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도 무책임과 도덕적 해이는 아직 고쳐지지 않고 있다.

결론적으로 재벌 구조개혁에는 문제점과 시행착오가 많으나 그래도 개혁은 꾸준히 추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업의 내재적 가치와 국제 경쟁력 향상을 위해서는 효율적인 기업개선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개혁은 정치적 구호로 이용될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절박한 필요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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