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호/1999년9월호]

재벌은 왜 개혁 대상인가

글/金喆秀 김철수 편집주간

재벌 협조 없으면 개혁되는 일 없어

한국 재벌들은 왜 개혁대상이 됐는가.

DJ정부 이후 1년 6개월동안 재벌들은 줄곧 개혁의 몸통이 되고 있다. 부채비율을 줄여라, 회계 감사제도를 고쳐라, 내부거래를 없애라, 부실기업 경영진은 물러가라, 총수는 사재를 털어라, 계열사를 처분하라, 빅딜에 응하라... 숨쉴 틈 없이 몰아부치는 정부의 주문에 재벌들은 정신을 못차릴 지경이다.

재벌을 개혁 대상으로 삼은 것은 물론 DJ정권이 처음은 아니다.

전두환 정권은 국보위 시절 재벌을 벌벌 떨게 만들었고 정권 말기인 87년에 공정거래법을 강화, 재벌들의 돈줄과 내부거래를 조였다. 대규모 기업집단 지정제도, 출자총액제한, 상호출자금지 등이 그것이다.

또 노태우 정권도 90년 이른바 ‘5.8 조치’로 재벌들의 부동산 투자에 발목을 묶었다. 91년에는 주력업체 제도를 만들어 재벌 계열사 중 4-5개 업종만 대출을 풀어주는 반(反) 문어발 정책을 추진했다.

YS 정권 역시 ‘신경제 5개년 계획’에서 주력업체 제도와 비슷한 주력업종 제도를 도입했다. ‘역사 바로세우기’에서 재벌도 예외는 아니었고, 재벌만을 겨냥한 것은 아니었지만 금융실명제를 통해 강도 높은 경제개혁을 시도했다.

왜 역대 정권은 재벌을 개혁 대상으로 삼았는가. 쉽게 말하면 간단하다.

한국 사회에서 재벌의 힘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또 그 힘에 비해 도덕성이 떨어져 자칫 사회를 왜곡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재벌을 다스리지 않고는 개혁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고들 한다. 정부가 필요에 의해 사회구조를 고치려면 먼저 재벌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지적도 이 때문이다. 우선 재벌의 협조를 받지 않고는 정권 창출부터가 어렵다. 과거 대통령 선거때면 어느 재벌 총수가 누구를 민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몇몇 유력한 재벌 총수들이 특정인을 밀기로 하면 결정적이란 얘기도 있었다. 재벌이 곧 정치의 돈줄이고 보이지 않는 여론의 주도세력이기 때문이다.

정권창출 뿐만 아니다. 정경유착이나 부정부패, 비리척결 등도 행위 주체와 재벌과의 고리를 끊지 않고는 해결이 안되는 문제들이다. 노사 평화나 중소기업 육성, 수출 확대, 금융시장 안정 등 모든 경제현상도 재벌이 비협조적이면 풀리지 않는다.

과거에 정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재벌들은 으례 복지부동의 전략을 폈다. 재벌이 움직이지 않으면 경제가 위축되고 민심이 흉흉해져 정부가 배겨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의 대부분을 5대 재벌 또는 30대 재벌이 차지한다는 통계가 있었지만 사실은 정치·경제·사회·문화 할 것 없이 재벌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 실로 그들의 영향력이 막강하기 때문에 한 재벌이 위기를 맞으면 나라가 흔들거린다. 계열사·관계사·하청업체·금융기관들이 복잡하게 연계돼 연쇄도산이 일어나고 금융기능이 마비된다. 국민 개개인의 생활까지도 불편해지고 언론은 국가 신용도를 걱정하게 된다.

DJ정부 개혁은 IMF 기회 활용

그래서 경제력 집중은 안된다는 논리가 기본적으로 성립되고 재벌의 무절제한 팽창을 견제하는 것이 정부의 의무이기도 하다. 과거 역대 정권들도 동기야 어쨌든 이러한 논리로 재벌개혁을 시도했다. 개혁의 수단으로는 여신관리나 상호지보, 상호출자 등의 규제를 강화하는 방법이 단골로 동원됐다. 기업의 숨통은 역시 자금이며 재벌의 영향력은 상당부문 문어발 경영에 잠복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DJ정부에 들어서서는 재벌개혁의 당위성과 목표, 그리고 방향이 과거 정권과는 사뭇 다르다. 과거 정권은 팽창을 억제하는 압박 정도였으나 현 정부는 환골탈태를 요구하고 있다. 지금의 재벌구조로는 나라가 안되니 ‘헤쳐 모여’를 통해 뼈대 자체를 바꾸라는 주문이다.

400% 이상인 부채비율을 200% 이하로 낮추고 계열사간 상호지급 보증을 없애라는 게 기본 주문이다.과거 정권의 재벌개혁이 기껏 여신관리를 강화하고 상호지급 보증을 줄이라는 정도에 비하면 기업으로서는 엄청나게 충격적인 요구이다. 부실한 계열사는 거래은행이 가려내 아예 처분토록 했고 덩치 큰 수조원짜리 기업을 서로 맞바꾸도록 강요하고 있다.

결합재무제표를 작성해 제출하고 사외이사를 두는 등 경영의 내부를 밖에서도 볼 수 있도록 투명하게 해 줄 것도 의무화 했다. 부실경영을 한 재벌총수를 물러나도록 했는가 하면 사재까지 헌납하도록 압박을 가했다.

재벌총수 1인의 기업지배구조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해 재벌해체론까지 나오고 있다. 과거에는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도 못한 개혁조치들이 쏟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DJ정부가 이처럼 재벌에 대해 특별히 단호한 것은 개혁의 시발점이 과거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재벌개혁은 DJ정부가 IMF와 IMF의 실질적 관리자인 미국에 한 약속이다. IMF와 외환위기 협상 때 합의한 조항에는 금융과 함께 기업(재벌)을 개혁한다는 조문이 들어 있었다.

개혁의 범위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IMF가 파견한 구조조정 자문단이 재벌기업에 재무제표와 구조조정 계획서까지 제출하라고 압력을 넣을 정도이니 상당한 수준인 것으로 관측된다.

IMF를 계기로 그동안 묻혀있던 재벌의 부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도 DJ정부가 재벌개혁의 강도를 높일 수 있었던 배경이다.

재벌의 자금줄은 다양하다. 은행이나 제2금융권을 통해 빌리기도 하고 증권시장에서 직접 조달하기도 한다. 또 스스로의 신용을 담보로 어음을 발행해 돌리기도 하고, 해외에서 차입을 일으키기도 한다. 재벌은 그동안 이 다양한 채널과 로비로 돈을 빌려 사업을 확장시키고 부동산을 사모았다. 모래성 위에 앉아 큰소리를 쳐온 것이다.

한보 기아에서 볼 수 있었듯이 문제는 그 모래성이 무너지면 국민들이 피해를 본다는 데 있다. 몇몇 대기업이 무너지면서 초래된 외환위기로 국민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는 모두가 지켜봤다. 당장의 고통 외에도 기업부실을 정리하는데 드는 비용이 2백조원에 가깝고 자칫 이 돈 중의 상당 부분은 세금으로 충당해야 할 판이다.

그래도 모 재벌의 총수였던 사람은 기업부실을 추궁하는 국회 청문회에서 “머슴이 어떻게 주인의 심중을 알겠느냐”며 미안해 하는 얼굴빛이 전혀 없었다. 남의 돈으로 문어발 경영을 하는 빚 많은 기업의 기형적 팽창을 막아야 한다는 데는 IMF를 계기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라는 DJ정부의 개혁정책도 대다수 국민들의 지지를 얻고 있고 기업들도 이에 승복하는 눈치이다.

중복투자 고질병 이번에 고쳐져야

DJ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이밖의 몇몇 굵직한 재벌개혁 정책에는 이론들이 많다. 대기업 빅딜이 그렇고 부실경영을 한 재벌총수의 사재출연, 단기간에 인위적으로 해결하려는 총수 1인의 기업지배 구조 등은 각각의 장단점을 안고 있는 과제들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부의 개혁정책이 무모하다는 지적이 늘고 있지만 그 지적의 반대논리도 만만치는 않다.

된다 싶으면 너도나도 뛰어들어 결국 모두가 부실을 끌어안아야 했던 한국 재벌의 고질병인 중복투자. 총수 한사람의 독단으로 기업과 종업원이 멍들고도 총수는 책임을 지지않는 불공평에 대한 국민의 반감. 국가나 사회에 정해진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몰래 이루어지는 부와 경영권의 세습 등등은 이제 한번은 정산하고 넘어가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과제들은 외국과 더불어 살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글로벌시대의 의무이자 에티켓이기도 하다. 이런 의무와 에티켓을 지키지 않고는 선진국과 1:1의 대등한 관계를 누리지 못하는 쪽으로 세계 추세가 흘러가고 있다.

다만 개혁의 성격에 따른 완급이나 국익에 대한 정확한 계산이 없이 너무 졸속으로 흐르고 외국의 말에 귀가 너무 얇다는 지적에는 정부도 귀를 기울여야할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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