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0월호]

선택과 합의가 필요한 ‘한국적 경제체제’

글 / 李允鎬 (이윤호 LG경제연구원 원장)

국민의 정부는 출범과 함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국정이념으로 내세웠다. 여기에 김대중 대통령은 8·15 경축사를 통해 ‘생산적 복지’라는 새로운 이념을 추가하였다. 민주주의, 시장경제, 복지국가라는 세 축은 선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예외 없이 지향하고 있는 이념이자 국가 운영의 기본 원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 축은 서로 맞물리는 관계에 있어 상호보완적이면서도 끊임없는 긴장과 갈등을 빚어내기도 한다. 이 세 축간의 관계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지, 무엇을 보다 중시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국민의 생활에 직·간접으로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한 국가의 현재는 물론 미래의 모습까지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중대한 국가적 이슈라고 하겠다.

세 축을 동시에 균형 있게 발전시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서구 선진국의 경우에도 복지를 강조하다 경제의 활력을 잃은 나라가 있는가 하면 지나치게 시장경제를 강조하여 빈부격차 등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한 나라가 있다. 또 시장을 가급적 통제의 범위에 넣어 관리하려다 낭패를 본 국가들도 많다.

민주주의나 시장경제, 그리고 복지체제에 대한 해석이나 부여하는 중요성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적으로 일치된 의견을 이끌어 내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경영해 나가고 만들어 나가는데 있어 세 이념의 정의와 세 개념간의 관계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루어 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국가발전의 지향점이자 비전을 설정하는 것이며, 에너지를 결집할 매개이자 집중시킬 초점을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국민의 정부가 설정한 세 개의 기본 축과 관련하여 다음의 점들을 보다 명백히 하여 국민적 동의를 얻을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첫째,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어떻게 정의하고 양자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에 따라 나오는 정책이 달라지게 된다. 지난 1년 6개월 동안 국민의 정부가 펼친 정책을 보면 영미식 신자유주의적 관점과 유럽식 질서자유주의적 관점이 혼재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신자유주의적 입장에서는 민주주의를 시장경제의 원활한 작동을 위한 절차적 규칙으로 파악하고 민주적이란 의미를 자유경쟁, 공정경쟁을 강조하는 개념으로 쓰고 있다. 또 시장경제도 결과보다는 절차의 정당성을 중시한다.

이에 비해 질서 자유주의는 정부가 주도적으로 경제의 질서를 만들어 나가야 하며 노동조합이나 대기업과 같은 독점적 지위를 갖기 쉬운 경제적 권력 집단을 해체하거나 그 기능을 제한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또 민주주의는 단순히 절차의 공정성뿐만이 아니라 복지, 사회적 참여, 형평성 같은 실질적 내용도 중시해야 함을 강조한다. 신자유주의와 질서자유주의 가운데 어느 노선을 더 중시하느냐에 따라 정부의 역할과 기업의 모습이 달라지고 경제의 체질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현재 강력히 추진되고 있는 대기업정책은 질서자유주의적 관점이 크게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생산적 복지라는 개념과 시장경제를 어떻게 조화시킬까 하는 문제다. 생산적 복지의 강조는 노동시장의 유연화, 규제완화, 시장개방, 외자유치 등 IMF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신자유주의적 처방이 중산층의 몰락과 부의 불평등을 심화시켰다는 비판이 정책에 수용되고 있는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생산적 복지는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시장경제를 전면에 내세운 나라라 할지라도 소외되고 불우한 국민들, 실업자들을 위한 복지시스템을 무시하고 있는 나라는 없다. 단지 시혜적 복지제도가 갖는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복지혜택을 받는 사람들을 가능한 생산적인 활동으로 유도하기 위해 애쓰고 있고 이를 생산적 복지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복지제도를 도입하거나 확충하기 전에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은 생산적 복지든 시혜적 복지든 간에 막대한 돈이 필요하다는 것, 복지 제도에 필요한 돈은 생산적인 용도로 쓰일 수 있는 돈을 돌려쓰는 것이기 때문에 성장기반을 잠식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 복지제도를 강화할수록 일할 유인이 줄어든다는 점, 일단 도입한 복지 제도를 없애기는 어렵다는 점등이다. 특히 복지재원은 결국 국민 자신들이 부담해야 한다. 복지시스템을 강화하고 이에 대한 국민들의 동의를 얻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국민들로부터 복지재원을 끌어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정부가 꾸려나가는 복지 시스템이 과연 얼마나 효율적이냐, 정부가 유한한 자원을 끌어다 민간에 비해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용하느냐, 하는 것도 심각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앞에서 제기한 질문들은 궁극적으로 정부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답을 요구하고 있다.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대전제로 하는 시장경제에서 정부의 간섭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이며 정부가 국민들의 주머니에서 어느 정도의 돈을 세금으로 떼어내 정부사업을 벌리고 복지 제도에 사용하도록 용인해 줄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는 경제체제의 선택 문제이자 정부의 역할결정이라는 문제와 직결되기 마련이다.

경제체제는 자유방임 경제와 중앙관리 경제의 양극단 사이에 무수한 변형이 있을 수 있다. 홍콩식 모델, 미국식 모델, 일본식 모델, 독일식 모델, 스웨덴식 모델, 네덜란드식 모델, 동아시아 모델, 중국식 모델 등등이다.

적어도 60년대 이후 얼마전 까지만 해도, 동아시아에 공통된 모델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소위 동아시아 모델이 각광을 받았다. 70∼80년대에는 일본식 모델이 탁월한 듯 했다. 90년대 들어 최근까지는 미국식 모델이 압도적인 성과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모든 모델이 장단점을 지니고 있어 어떤 특정 모델이 가장 우수하다고 일률적으로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 경제가 처한 환경과 문화적 배경 그리고 경기 순환의 큰 사이클을 무시하고 모델의 우열을 이야기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어느 국가든 그 나라가 지향하는 모델이 제시되고 그 모델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이다.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진 경제모델의 추구는 갈등을 최소화하고 발전에너지를 집약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합의된 경제모델이라도 상황과 여건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수정·보완되어야할 것이다.

우리 국민들도 이제는 모든 일에 정부가 만능 해결사이길 기대하는 습관에서 벗어나 정부의 역할을 어떻게 규정하는 것이 국가적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특히 정부의 능력과 청렴도, 정부의 행태를 함께 고려하여 정부 역할의 강화 또는 축소가 긍정적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부정적 폐해를 증폭시킬 것인지 가늠해 보아야 한다. 서구의 역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발전은 정부 권력과의 투쟁의 산물이며 정부 권력의 축소와 맥을 같이 해왔다는 것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정부에 의한 경제력 집중에 대한 감시와 견제 못지 않게, 정부 권력에 대한 국민의 감시와 견제도 중요한 것이다.

정부는 두루뭉실한 시장경제, 엉거주춤한 복지국가가 아니라 우리가 처한 상황과 역사, 문화를 감안하여 우리에게 맞는 '한국적 경제체제' 가 어떤 것인지를 진지하게 모색하고 국민적 합의를 이루어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보수와 진보간의 논쟁, 복지정책·재벌정책 및 산업정책을 둘러싼 시비, 체제를 둘러싼 색깔논쟁을 완화시킬 수 있는 커다란 지침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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