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0월호]

경부고속철도 논쟁 그 뒤

2004년 4월 개통

글 / 陰盛稷 (음성직 중앙일보 전문위원·공학박사)

언제쯤 TGV열차 타나

2년째 창원공장에서 쉬고 있던 TGV열차가 오는 12월 1일 경부고속철도 시험선구간에 뜬다. 92년 6월 착공한 이래 7년 반만이다. 한국고속철도공단은 “만반의 준비가 돼 있다”며 자신감을 보인다. 지난 7월말 현재 경부고속철도 시험선구간 공사는 89%가 끝났다. 천안∼대전간은 74.5%. 사업구간 전체로는 35.8%의 공사진척률이다.

그러나 천안∼대전간 공사를 먼저 끝내 봐야 효과가 별로 없다. 34%진척에 불과한 서울∼천안간 공정이 끝나야 비로소 TGV는 시속 3백km를 달릴 수 있다. 서울∼대전간엔 터널이 10곳. 교량은 22개소에 이른다. 특히 상리터널 우회노선 건설이 제때 끝나야 한다. 공단은 2001년에 노반(路盤)시공을 끝내고. 2003년 3월까지는 궤도와 전기시설을. 그 후 시운전을 통해 2004년 4월 개통한다는 목표다.

대전∼대구간은 진척률이 7월말 현재 24.9%다. 특히 터널(16개소. 34km)·교량(26개소. 30km)등 난공사 구간이 많다. 개통목표는 역시 2004년 4월이다. 아직도 4년반이 지나야 TGV를 탈 수 있다는 얘기다.

공사 차질 없다지만 웬지...

경부고속철도 공사현장을 97년 1월 이후 3만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녀갔다. 주로 전문가들이다. 4km터널을 일직선으로 뚫은 현장에 이들은 압도당한다. “굉장하구나”하는 탄성이 절로 나오고. 현장 작업반원들의 “아무 문제 없다”는 이구동성 목소리에 절로 고개를 끄덕인다.

언론도 요즘은 좀체 비판을 안한다. 전문가들도 조용하다. 그 동안 국민들이 잘나가는 고속철도를 ‘부실철’로 너무 오해를 했다는 투다. 요즘 고속철도 공사현장은 그만큼 잘 나간다. 97년까지 5년동안 총공정률이15%였는데 98년 한해에 13%의 공사를 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웬지 씁스레 한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뭔가 고치겠지 기대하며 YS정권때 시끄러울 정도로 전문가들은 다양한 의견을 냈다. 당시 경부고속철도 얘기만 나오면 누구나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들었고. IMF위기로 경제상황까지 악화되자 고속철도 사업은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문제로 전락했었다.

그런 전문가들이 체념조 분위기다. “말을 해봐야 소용없더라”며 새 정부의 경부고속철도 사업·추진시스템이 못마땅해 한다. 새 정부가 새로 결정한 사업계획은 과거의 잘못을 고치기 보다 개통날짜를 늦추는 정도였고. 결국은 지금 대전·대구에는 지상·지하에 2중으로 정거장이 들어서고 그 동안 그럴듯하게 진행되던 대구∼부산간 직선화 논쟁도 물거품이 되면서 전철·고속철도를 함께 놓는다. 그러니 시험선에 TGV가 올라선다고 대수인가. 공사도 차질없이 진척된다지만 불안하기는 이전과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말을 안한다는건 좋은 징조가 아니다. 불씨는 분명 남아 있다. 혹시 또 폭풍우처럼 한꺼번에 몰아치는건 아닐까.

과거의 실수를 짚어보자

다시 과거 잘못을 짚어 보자.

87년 12월 민정당 노태우(盧泰愚)후보는 경부고속철도사업 추진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다. 당선 후 노대통령은 89년 7월 ‘고속전철추진위원회’를 발족하며 본격 추진의 시동을 걸었다. 84년 국토개발연구원의 ‘경부축 장기 교통투자 및 고속철도 건설 타당성 조사’후 학계에서 논의되던 고속철도가 잉태된 순간이었다.

노대통령은 무리를 거듭했다. “내가 없으면 추진이 안된다. 내가 있을 때 공사 착공과 차량 선정을 마치라”고 성화를 했고. 정책결정 과정에 제대로 된 제동장치를 갖추지 못했던 6공 정부는 89년 9월 철도청과 교통개발연구원에 기술조사 용역을 발주한지 1년도 못돼 90년 6월 노선·통과역·기술 등 기본계획을 발표했다(김창식 교통부장관).

“당시 용역팀은 33개 노선 대안중 대구∼밀양∼부산 또는 대구∼울산∼부산 2개를 최적안으로 건의했습니다. 경주노선도 검토했지만 경제성이 낮아 제외했지요. 그런데 최종 기술보고서에는 ‘정부방침’이라며 경주노선으로 바뀌었습니다.” 기본계획?수립에 참여 했던 한 전문가의 실토다. 우회노선 37.3km 연장. 9천 8백억원의 추가 공사비가 소요되는 경주노선 결정은 결국 96년 6월 화천리계획 결정까지 6년여의 지루한 문화재 보호 공방. 계속해 대구∼부산 노선 직선화 공방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일본기술에서 벗어나보자는 철도맨들의 분위기도 사업을 부추겼다. 철도청은 고속철도 운행 시속이 3백㎞는 넘어야 한다는 생각을 밀어붙였고. 88년 12월 철도청장에 오른 김하경(金夏經) 당시 청장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고속철도를 만들어야 한다’ 는 친필 부기를 기본계획 결재서류에 남길 정도였다. 기본계획 용역의 기술자문을 맡았던 루이스 버저사 맥도널드는 “당시 기술적 노선 선정을 하고 있는 와중에 한국측 파트너들이 갑자기 지도에 자를 대고 직선을 긋기 시작했지요. 이유를 물었더니 ‘속도가 3백50㎞로 결정됐다. 상부지시다’ 라더군요” 라고 증언했다.

기술적 검토보다 정치적 판단과 졸속 추진 의지가 우선했다는 사실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이렇게 의욕과 소신이 어우러진 고속철도사업은 노건일(盧健一)교통부장관·김종구(金鍾球)고속철도공단이사장 재임 당시인 92년 6월 시험구간 공사 착공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차량선정보다 1년반이나 앞서 설계도 없이 터파기를 시작해 시공∼설계변경∼재시공의 악순환이 거듭됐고. 최저가 입찰방식으로 건설회사를 고르다보니 무경험 업체가 다수 참여해 부실이 속출했다.

차량도입 계약은 94년 6월에야 체결됐다. 91년 8월 차량 선정작업이 시작돼 6차에 걸친 협의가 계속됐지만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 시비에 휘말린 6공으로서는 사업자 선정을 늦출 수밖에 없었다.

당시 청와대 비서관 출신 B씨의 회고.

“노대통령은 재임기간중 차량을 선정하겠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눈덩이처럼불어난 공사비를 줄이기 위해 최적의 금융조건을 제안한 TGV선정이 불가피했습니다만 정치자금 수수 시비가 두려워 결정이 늦어진 겁니다.”

사업비규모등 논쟁 일곱가지

경부고속철도 사업을 둘러싼 그동안의 논쟁거리는 대략 일곱가지였다. 4배로 늘어난 총 사업비 규모가 그 첫째고. 잦은 설계·사업 변경으로 무한정 늘어난 공기가 둘째다. 대구∼부산간 직선화 여부 등 노선문제와 평균운행시속 논란. 중앙역 선정이 그 뒤를 잇고 대전·대구구간의 지상·지하화 논쟁도 있다. 마지막으로는 사업을 추진할 재원 및 경제성에대한 재무·수익성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최초 사업비 산출이 엉터리였다. 임인택(林寅澤) 교통부장관 시절마무리된 ‘경부고속전철 기술조사’는 91년 2월 총 공사비를 5조 8천억원으로 계산했다. 그러나 기술과 경험이 모자란데다 시간까지 촉박한기술진들은 기존 철도 건설비의 1백30∼1백50%를 기준으로 노반공사비를 계산하는 등 웃지 못할 주먹구구식 계산법을 썼다.

“당시 사업비는 기술적 계산이라기보다 정치적 계산이었지요. 부끄럽지만 애초 사업비 수정을 전제로 발표된 수치라고 봐도 틀리지 않습니다.” 보고서 작성에 관여했던 실무책임자의 실토다.

김영삼 (金泳三) 정부가 출범한 뒤인 93년 6월 공사비는 10조 7천 4백억원으로 수정됐다. “10조원대를 지켜야 했습니다. 기술적으로는 14조원대로 나왔는데 사업 축소를 통해 사업비를 줄였던 거지요.”

건교부 실무자로 1차 수정작업에 참여했던 관계자는 지상-지하화 논쟁을 촉발한 대전 18.5㎞구간 및 대구 35.3㎞구간 지상화 계획도 10조원대를 맞추려 공사비 4천 3백 36억원을 줄이려는 노력이었다고 밝혔다. 중앙역 문제가 여전히 미정인 상태에서 편법으로 용산역∼남서울역(시흥) 간 2조원에 달하는 공사비를 2기 사업으로 슬쩍 미뤘고 93년 수정계획시 개통 후 건설한다며 제외한 차량정비창 시설비용 3조원도 사실상 누락시켰다.

그러나 대전·대구역 지상화 계획은 결국 2년반만인 95년 4월 지하건설로 되돌아갔고 총사업비는 다시 97년 9월 17조 6천 2백 94억원으로 98년 4월 22조 2백 92억원(감사원 추정)으로 늘어난다. 지상-지하화 논쟁을 지켜본 고속철도공단 임원은 “당초 지하화 계획은 기존 철도용지를 활용해 고속철도·일반철도·지하철·버스의 입체 환승역을 건설한다는 계획이었기 때문에 어차피 지상화는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사업비 논쟁으로 기본개념이 사라져버린 것이지요.” 라고 아쉬워했다.

고무줄처럼 늘어난 사업비는 사업초기부터 잉태된 문제였지만 이를 털어놓고 국민과 함께 해결방안을 찾기보다 비밀행정 속에서 편법 계산을 동원해 눈가림을 해온 셈이다. 역대 정부는 경제성을 입증하려 장래 수요를 부풀리고 국민적 공감대 없이 억지춘향식으로 사업비를 누락시켰다.

잊을만하면 터지는 시비들

그러는 동안 “왜 고속철도를 건설하는가”에 대한 기본철학도 불분명해졌다. 정치적 인기를 위해. 부처간 주도권 다툼 속에서 사업을 다루는 와중에 고속철도사업으로 국가가 추구할 이익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됐다. 노선 논란·차량선정 지연·재무성 결여 등은 모두 철학 부재가 양산한 문제다. 차량 도입 계약을 한 지 5년이 지났고 창원에는 TGV 2호가 벌써부터 들어와 있지만 당초 이전받겠다던 고속철도 기술은 넘어온 게 별로 없다. 독자기술로 해외로 진출하겠다던 당초 포부는 사라졌으며 실적위주의 부실공사로 애써 해외건설에서 쌓은 신인도만 갉아먹었고 잊을 만하면 한번씩 터지던 잦은 시비는 호남·동서 고속철도로 연계되는 종합교통망 구축은 아예 엄두도 못내게 해버렸다.

20년후 투자비 회수가 막연한 상태에서 사업초기부터 눈덩이처럼 불어날 사업 적자를 누가 부담할 것인지도 논의도 안됐다. 루이스 버저사의 맥도널드 책임연구원은 97년 국회 증언을 통해 2차 수정계획대로 고속철도가 건설돼도 개통 초기 수익은 약 3조원대로. 2조원대의 운영·정비비와 2조 5천억원대의 이자·원금 상환에도 못미치는 수치라고 밝혔다.

이렇게 고속철도가 매년 약 1조 5천억원씩 적자를 내면 결국 4인가족 기준 가구당 7만원씩 추가부담을 지거나 서울∼부산간 편도요금을 40만원대 이상으로 책정돼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게다가 97년말 닥친 IMF위기로 경영형편은 더욱 나빠질게 분명하다.

사업주체도 책임미루기 일색이었다. 주체가 불분명하다보니 당시 예산을 쥐고 있는 재경원과 통산부·건교부·과기처 등 관계부처에 철도청·고속철공단까지 주도권을 다투다 문제가 생기면 서로 네탓으로 치부해왔다. 고속철도 추진조직은 출범초기 관리직이 전체 인력의 53%를 차지, 전문성이 결여됐음에도 오히려 기술자 이탈만 가속화됐다.

공단 조직의 전문성이 없다보니 자문을 맡고 있는 외국 회사만도 벡텔사 등 5개사나 됐지만 역시 책임소재가 불명확하기는 마찬가지다. 벡텔사의 경우 사업자문을 했음에도 사업비·공기 변경에 대해 어떤 역할이나 책임도 지지 않았고, 불란서 시스트라사는 도면을 본국으로 보내 검증하는 체제다보니 사업을 지연시키는 요인이 됐다.

전문가들은 새 정부가 뭔가 고칠 줄 알았다.

때 맞춰 감사원이 나섰다. 감사원은 98년초 경부고속철 건설사업 집행실태를 감사해 무려 1백 1개에 달하는 ‘부실’을 지적했다. 감사원은 경부고속철 추진과 관련 사업계획·조직·인사·예산·계약·설계·시공·차량·보상·기관업무협조등 9개분야별 부실실태를 구체적으로 지적한 감사결과를 건설교통부등 관련부처에 통보하고. 관련자 징계·변상등 사후조치를 요구했다. 이 때 분위기로는 고속철은 이미 날라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공단이 미 벡텔사 봉 노릇

감사결과는 그 동안의 문제점을 망라했다. 감사원은 한승헌(韓勝憲)감사원장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에게 “경부고속철이 사업비 4조 5천264억원을 축소·누락했고, 편익등을 잘못 계산했다. 경부고속철은 더 이상 경제성은 물론 채산성이 불투명하며, 재원조달은 더욱 불가능하다”고 보고했다. 감사원은 그 외에도 ▶공단이 미국 벡텔사의 ‘봉’노릇을 했다 ▶공단의 사업관리능력이 없다 ▶건설교통부도 제일을 안했다 ▶지자체는 지역이기로 ‘딴지’만 걸었다 등과 함께 예산낭비·설계부실 사례들도 구체적으로 나열했다.

다음은 감사원이 밝힌 공단의 벡텔 봉노릇 사례다.

“공단이 미국 벡텔사와 93년 4월 이후 97년 9월까지 사업관리자(용역비 5천 5백만달러)를 받는 과정에서 공단이 벡텔측 기술자 52명중 49명이 고속철건설 무경험자인데도 고용을 승인했고. 활용하지도 못할 기술시방서를 납품받아 용역비 1억 5천여만원을 낭비했으며, 벡텔사 기술진에게 교량상판형식 자문을 받지 못해 프랑스 시스트라사등과 이중으로 계약(2백 25억원) 사업비를 낭비했다. 또 벡텔사 자문인력중 리드(F.W.Read)는 2년 6개월동안 총자문건수가 12개 사항에 불과했고. 자문결과는 현실에 부적합해 보완이 필요했는데도 공단이 방치해 인건비를 낭비한 사례도 지적했다. 공단은 벡텔사 직원에게 지급한 1인당 월인건비는 미화 29,400달러에 달한다(월 25일 근무기준)”.

뒤늦게 공단은 벡텔과의 사업관리 자문계약을 책임계약으로 전환했다. 감사원은 이것도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감사원은 국제통화기금(IMF)구제금융 협상이 진행되고. 고속철 사업의 계속추진여부가 국민적 관심사로 대두돼 수정계획이 확정되지 않는등 긴급한 계약체결사유가 없었는데도 공단이 97년 11월말 벡텔과 ▶높은 계약단가로(우리나라에 진출한 다른 외국건설용역업체 인건비 단가의 1.4∼1.9배)▶인원도 많게(최소 23명. 최대 47명만 필요한데도 최대 120명까지)▶수의계약을 체결했다고 지적했다. 감사원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공단이사장을 인사조치할 것”을 건교부장관에게 통보하기도 했다.

감사원은 공단의 고속철 건설사업관리능력에도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고속철 건설은 일반 토목건설과는 달리 노반·궤도·차량·신호·전기·기계등 15개 공정이 함께 가는 복합프로젝트. 공단은 이 프로젝트를 관리할 머리(頭腦)인 사업관리전산시스템을 운영하지 않은채 주먹구구식 사업추진을 해왔다는 것이다. 공단 기술자들은 다른 부문은 어찌되든 내 부문만 열심히 끌고 나가는 ‘초보’ 기술자였던 것. 사업관리 담당직원은 기능·일용직 포함해 14명뿐이었고. 그나마 순환보직으로 2년이상 근무한 직원은 2명. 컴퓨터 프로그램 운영교육을 받은 사람도 2명뿐이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감사원은 이외에도 공사를 필요없이 서두르다 낭패를 본 사례, 불필요한 자재를 사들이며 낭비한 사례등 사업관리 잘못을 여러개 지적했다. 그 동안 한 곳이 터져 그를 메우면 또 다른 곳이 연쇄적으로 터지는 ‘고속철혼선’ 원인을 일부 밝혀낸 셈이다.

건교부와 지자체도 적당히

건설교통부도 할일을 안했다. 우리나라 최대의 국책사업을 추진하면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지원을 못해 야기한 손실이 1천 3백 85억원, 사업시작 6년후에야 건설기획단을 구성했고, 업무지원을 위해 직원을 파견하면서 승진시험대상자를 보내 출근조차 안했으며, 총괄주무과장을 평균 7달 주기로 바꾸고, 공단이 차량명칭·로고·색상결정을 제때 결정치 않아 손해배상금을 무는등 공공연한 비용부당집행에도 건교부는 가만히 있었다는 것이다.

지자체도 비협조적이었다. 당연히 협조해야 할 사항도 미루고 툭하면 트집을 잡으며 지역이기 챙기기에 바빴다는 것. 감사원은 영동군수(상촌고가교 업무협의 미흡), 육군참모총장(탄약저장고 안전대책협의 지연), 대전광역시장(역사건축물 건설협조 안함), 안산시장(행위허가지연), 고양시장(차량기지 보상심의회 개최지연),안양시장(도시계획시설결정 지연), 아산시장(지적공부정리지연), 대전광역시 대덕구청장(개발제한구역내 행위허가 할 것), 광명시장(기존도로 이설공사 조속추진)등에 “잘 협조할 것”을 통보했다.

예산낭비사례도 지적됐다. 남서울역 외에 대전·동대구·부산역 신축설계 용역을 발주하며 이미 시행한 천안역사 설계성과품을 활용치 않아 2억 3천만원 상당의 용역비를 낭비했고. 천안∼대전구간 라멘교량·암거등 구조물 안전진단용역을 W. J. E사와 대한토목학회에 일부 중복 발주하기도 했다.

공단은 상리터널·조남 1터널 설계부실에 대한 조치를 하지 않고 있다가 감사원의 추궁을 받았다. 천안역사는 1일 7천 126명에 불과한 수요를 5만 5천 446명으로 늘려 설계해 267억원을 낭비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됐다. 이외에도 팔곡고가교·둔대제 3구교등의 교량구조물의 설계부적정등 19건의 설계부실도 함께 밝혀냈다.

부지매입과정에도 문제가 많았다. 불법형질변경된 토지를 이전가격으로 감정하지 않고 현재용도로 감정평가해 보상비를 과다지급했고, 사업지구 밖 토지를 매입하는등 사업비를 낭비한 사례가 36건이나 됐다.

전문가들은 “그 것봐라”하며 다양한 제안을 보탰다. 미봉책으로 누더기가 된 고속철도 사업이 더이상 시행착오 없이 진행되기를 고대하며 ▶사업비 축소를 위해 경유 노선 조정과 대전·대구역 등 역사의 경제적 건설 방안 ▶구간별 단계적 시공방안 ▶고속철도 추진체계를 아예 범정부 차원의 강력한 추진사업단 구성으로 탈바꿈시켜 주인의식을 갖게 하고 ▶철도전문가 조직인 철도청의 사업내 역할을 재조정하는 방안등을 선결과제로 내놨다.

이외에도 여러 제안이 있었다. 노선 문제는 대구∼부산간 직선화 문제나 상리터널 우회여부. 중간역을 많이 만들되 필요에 따라 일부역사를 통과(바이패스)하는 설계방안 등 미시적 관점과 국가종합교통망 구축이라는 거시적 안목을 조화시켜 최적화 설계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점이 지적됐다.

전문가들의 다양한 제안들

역사문제는 역세권 개발이라는 지자체 욕심이 곁들여져 과다하게 설계되지 않았는지 꼼꼼히 살피고. 단계적 건설로 결론낼 경우 역사건설 속도도 이에 맞춰 투자비를 분산해야 할 것으로 봤다.

스페인 고속철도처럼 여객·화물수송을 겸용해 수익을 빨리 회수할 수 있는 방법의 일환으로 여객 전용 경부고속철도를 화물 겸용으로 활용, 24시간 이용하는 방안도 제안됐다.

당시 전문가들 사이에 공감대를 이룬 고속철도 재조정 방안은 프랑스 TGV 노선 및 연계 전철망 형태였다. 프랑스는 파리∼리옹간 동남선을 83년에 건설했지만 리옹∼발랑스 구간은 94년에 연장했고 발랑스에서 마르세유∼리스간은 전철화를 통해 TGV 가 다닐 수 있도록 했다. 또 파리∼르망·투르간 대서양선은 90년에 건설했고 파리∼릴리간 북부선 건설은 93년에 이뤄졌다. 이같은 연계망으로 프랑스 TGV 동남선은 고속철도 구간이 5백 38㎞지만 서비스 구간은 총연장 2천 6백 40㎞ 달하고 장래에는 4천 5백㎞까지 된다.

물론 우리나라는 프랑스에 비해 면적이 작고. 지형조건은 다르다. 그러나 IMF체제라는 경제적 상황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도 Y자형의 남서울∼대구구간과 청주∼익산구간만 시속 3백㎞대의 고속철도로 건설, 고속철도 구간을 최소화함으로써 사업비를 줄이는 방안이 설득력이 있었다. 이 대안은 고속철도 구간으로부터 대구∼경주·울산·부산간이나. 익산∼전주·광주 등 전국 주요도시간 연계는 시속 2백㎞대의 전철로 연결하자는 안이다. 고속철도망에서 전철 연결지점은 노선 수요에 따라 점진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 철도청도 최근 이 같은 간선(고속철)-지선(전철) 시스템을 제안하고 있다.

최초 사업단계에서는 시흥∼대전 구간을 최소한의 건설비로 최대한 빨리건설, TGV 운행을 가능케 하면서 노선·역사 등을 재검토할 시간을벌자는 의견도 있었다. 이후 경제상황을 고려해가면서 대구∼부산간 고속철도와 호남고속철도를 단계적으로 연장해나가자는 안이었다.

“고속철도를 재정적으로 타당성있게 추진하기 위해 더 경제적인 설계기준 아래 전체 선형·역사위치를 재디자인하되 TGV와 기술적으로 조화돼야 한다”. “고속전철을 국토 전체의 교통망과 연계해 고속철도의 영향범위를 가능한 한 분산시키고 최대한의 인구가 고속전철을 이용할 수 있도록 일반철도와의 연계망을 구축하는 동시에 고속도로로 철도망의 기능을 보완할 것”. “최단시간 안에 TGV를 움직이게 해줘야 하고 한꺼번에 많이 수송하기보다 빈도를 늘리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웬만한 곳은 전철화를 서둘러야 한다”. ”수정안을 마련하기 위해 공정하고 투명한 재검토가 될 수 있는 환경을 우선 조성하라”등 전문가들의 제안이 빗발쳤다.

서울-대구 구간 수정안 의결

그러나 새 정부 결정은 의외였다. 98년 4월 8일 김종필(金鍾泌)국무총리서리 주재로 열린 경제부처장관 회의에선 경부고속철도사업을 “시발역을 서울역으로 하되, 서울∼대전 또는 서울∼대구 구간을 2003년 2월 까지 개통한다”는 수정안을 의결했다. 그리고 대전·대구 역사(驛舍)지상화 방안과 대구∼부산간 노선 직선화 등 예산 절감 방안을 98년 7월말까지 건교부 주관으로 검토해 최종안을 확정한다는 방침도 확인됐다.

건교부는 서울대 행정대학원 김동건(金東建)교수등 민간전문가 6인에게 경부고속철도의 사업성평가 작업을 의뢰하는 한편 30여명 전문가로 ‘경부고속철사업 평가자문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金교수등의 평가작업은 한계가 있었다. 사업비는 공단이 제공한 수치를 그대로, 수요도 과거 추정내용을 그대로 활용해 경제성을 재평가했다. 이 같은 작업결과에 일부 자문위원들은 강하게 반발했고, “타탕성이 의문시된다. 수요를 재검토해야 한다. 하더라도 서울∼대전간만 하자”고 주장했다. 金교수도 최종보고서에 서울∼대전간을 1단계로 제안했다. 정부는 그러나 “서울∼대구간을 1단계로, 대구∼부산간 및 대전·대구역 지하화는 2단계로 건설하는 안”을 기습적으로 밀어 부쳤고, 그렇게 결말이 났다. 민간작업반·평가자문위원회는 요식행위였던 셈이다.

TGV가 경주를 꼭 경유해야 하는가. 문화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대전·대구역을 꼭 지하에 건설하는게 옳은가. 서울의 중앙역은 어디로 할 것인가등 아직도 문제가 산적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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