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0월호]

용감한 사람들

글 / 李淸洙 (이청수 순천향대 교수·전 KBS워싱턴 총국장)

여론의 인기와 오류

민주정치는 다수결정치이고 그것은 곧 여론정치이다. 때문에 여론에 따라 정치를 하면 잘하는 정치라고들 한다. 여론은 민심의 반영이고 민심은 곧 천심인데 이를 거역해서도 또 거역할 수도 없다는 데 있다.

세계 역사상 주요 혁명이나 정권교체에서부터 한 개인의 정치적 몰락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두가 이 여론으로 나타나는 천심을 거역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따라서 여론정치를 하면 인기가 있게 되고 아무리 나빠도 안전은 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여론이 반드시 정론이 아닐 수 있고 여론정치가 곧 바른 정치가 아닐 수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중우정치(衆愚政治)의 경우가 그렇고 대중인기주의-포피얼리즘(Populism)정치가 그렇다. 소크라테스는 고대 그리스의 민주정치(Democracy)가 무식한 사람들의 중우정치가 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 대안으로 철학공부를 많이 한 두 세명의 과두정치(Oligarchy)를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여론과 권력을 거스르는 반체제적인론이었다. 그는 당시 어리석기 짝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여론에 영합하거나 권력 앞에 변절하느니 차라리 독배를 들겠다면서 장렬하게 마시고 갔다. 〈악법도 법〉이라는 말을 남기고. 반대로 아르헨티나의 독재자 페론 대통령은 노동자 대중의 인기와 여론을 사기 위해 돈을 마구 뿌렸다. 결국은 나라 경제를 거덜 내고 쫓겨났다. 페론니즘이라는 말을 남기고.

예루살렘 여론의 예수배척

여론이라는 미명아래 저지른 역사적 오류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예수의 죽음이라고 할만하다.

AD 29년 그 유명한 예루살렘의 로마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구속중인 예수와 마라바라는 한 강도범을 내세워 놓고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만 경축일 특사를 할 수 있는데 누구를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예루살렘시민들은 뜻밖에도 강도범을 사면하고 예수를 처형하라고 외쳤다. 그들은 예수가 진정 하나님(하느님)의 아들이고 구세주라며 로마총독이나 황제는 물론 현세의 모든 악을 물리치고 선을 세우는 기적을 일으켜 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예수는 당시 일반사람들로서는 알 길이 없는 다른 큰 뜻을 이루기 위해 그런 기적을 끝내 증거로 보여주지 않았다. 때문에 예루살렘시민들의 여론은 예수를 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여론이 곧 정론이 아니고 다수결 정치가 곧 바른 정치가 아닐 수 있다는 대표적인 역사적 사례가 아니고 무엇인가. 따라서 여론에 가장 민감하고 여론을 먹고사는 민주정치 시대의 정치인들도 때로는 여론정치가 아니라 여론을 거스르는 정치를 하는 때가 자주 있다.

또 그것이 오히려 더 위대하고 올바른 정치로 평가받는 경우가 많다. 다만 그런 평가가 당대에서보다는 사후에야 이뤄지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

케네디 대통령의 여론거역

그러나 여론정치를 가장 잘 한다는 미국에서조차 이러한 여론 거스르기 정치를 하는 정치인물이 상당히 있다. 그것을 가장 극명하게 묘사한 책이 바로 케네디 대통령의 〈용감한 사람들〉(Profiles in Courage)이다. 케네디가 55년 상원의원 때 쓴 것이다.

이 책은 미국역사에서 8명의 국회의원들이 각각 보다 큰 대의와 정의 그리고 정론을 위해 자신의 정치 생명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용감하게〉여론과 민심을 거스르는 정치를 한 감동적인 기록으로 돼 있다.

남북전쟁 11년 전인 1850년 다니엘 웹스터 상원의원은 노예제도를 절대 반대하는 동북부 매사추세츠주 출신이었다. 그런데도 남부의 노예제도 연장을 옹호하는 용감한 의회연설을 한사람으로 유명하다.

미연방을 깨지 않고 노예주들의 연방탈퇴를 막는다는 대의에서였다. 그러나 장장 3시간에 걸친 이 연설은 명 연설로 기록됐으나 출신 주의 여론을 완전히 거역하는 것이였다. 결국 선거에서 낙선했다. 또 유력하던 대통령후보의 꿈도 버려야하는 정치적 생명의 종말을 감수해야만 했다.

노예주의 미주리출신 상원의원 톰 벤튼은 웹스터와는 정반대의 경우이다. 당시 미국민의 자유라는 더 큰 대의를 위해 주 여론에 역행되는 노예해방을 주장했다. 벤튼은 결국 출신주의 배신자로 몰려 상원의원직을 빼앗기고 만다.

미주리 주는 그의 진의를 뒤늦게 깨닫고 노예 해방 주로 돌아섰다. 벤튼이 죽고 난 뒤였다.

1868년 앤드류 존슨 대통령의 탄핵안 표결 때 공화당의 에드민드 로스 상원의원은 당명과 출신 주의 여론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표를 던졌다. 단 한 표차로 탄핵안을 부결시키는 결정표가 됐다. 사실상의 여소야대라고 해서 대통령직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삼권분립정신에 위배된다는 대의에서였다.

그러나 그는 여론의 반역자로 낙인 찍혀 비참한 정치적 말로를 맞아야 했다. 비록 사후에 로스의 부표가 나라의 대 혼란을 막았다는 여론의 재평가를 받았지만 그는 들을 수 없었다.

여론정치보다 정론정치

더 큰 무엇을 위해 자신의 정치적 생명까지도 던진 이러한 사람들을 케네디는 〈용감한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당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57년 퓰리처상의 전기부문 상을 받게 된다.

케네디 대통령 스스로도 63년 11월 23일 델러스의 흉탄에 쓰러짐으로써 사실상〈용감한 사람들〉의 반열에 올랐다. 당시 미국정치와 사회의 주류를 거스르는 개혁을 하려다 좌절한 것이란 일반적 평가를 볼 때 그렇다.

따라서 아무리 민주정치가 여론정치라 하더라도 더 큰 대의와 정의와 정론의 정치를 위해서라면 여론을 거스르는 정치를 할 수 있다. 하물며 그 여론이란 것이 조작 된 것이거나 안이한 추종의 결과라고 할 때는 더 말할 것 없다.

다만 여론을 따라야 할 때와 거슬러야할 때를 잘 가려야 한다. 진실로 〈용감한 사람들〉나아가 〈위대한 사람들〉은 여기서 판가름 난다. 최근 우리의 IMF 사태, 햇볕정책, 옷로비 사건, 실업대책, 재벌개혁과 정치개혁 등을 다루는 과정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여론을 따라야 할 때 거스르고 거슬러야 할 때 따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론을 따라야 할 때 따르는 정치와 개혁은 쉽다. 그러나 여론을 거슬러야 할 때 거스르는 정치와 개혁은 어렵다.

그래서 〈용감한 사람들〉이다. 〈용감한 정치〉, 〈용감한 개혁〉도 바로 여기서 나온다. 그것은 내 스스로가 먼저 손해를 보고 희생할 각오로 할 때 제대로 성공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새 세기, 새 천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대통령에서부터 모든 정치권 그리고 온 국민이 다함께 〈용감한 사람들〉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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