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0월호]

정왈순의 전성시대

글 / 金性鎬(김성호) 편집위원 (언론인)

중앙일보 8월 13일자에 게재된 김성호 세상보기에 보니 연극에는 희극 비극 사기극의 세 가지 종류가 있고, 사기극의 대표작으로는 내각제전(內閣制傳))전이 손꼽힌다고 한다.

정치 연극 내각제전은 1997년 10월, 그러니까 DJ가 JP의 청구동 자택을 찾아가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대선 공동 전략을 마련할 때 그 화려한 막을 올렸다. 99년 말 까지 완전 내각제로 개헌한다는 이 정치극은 온 국민의 궁금증을 증폭시키면서 장장 1년 9개월의 롱런 끝에 99년 7월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런데 그 결말이 허무하게도 ‘내각제 연내 개헌 포기’였다.

내각제 개헌 공약을 국민들이 1백% 믿은 것은 아니었지만 의구심이 들 때마다 양 김이 거듭 거듭 장담했기 때문에 그런대로 내각제로 가나 보다 믿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연내 개헌을 포기한다고 선언했으니 정치권 일각에서 이 연극을 사기극으로 몰아치고 국민 대다수가 이에 공감한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내각제전에 못지 않은 인기를 끈 것이 바로 ‘옷 로비전(傳)’이다. 지난 8월 23일부터 사흘동안 인기 절찬리에 공연된 이 연극에 대해 혹자는 내각제전의 인기를 능가한다고 까지 말한다.

당초 이 연극은 여의도 민의의 전당에서 공연될 예정이었으나 ‘정치는 예술’이라는 금언(金言)을 존중하는 취지에서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서 막을 올렸다.

옷 로비전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재벌 기업과 재벌 회장을 살리기 위해 재벌 사모님이 고급 옷으로 로비를 벌였다는 얘기다.

하지만 로비를 하려는 쪽과 로비를 받는 쪽의 관점에 따라 이야기의 중심은 달라진다. 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장관 사모님과 검찰총장 사모님이 은근히 고급 옷을 뇌물로 바칠 것을 요구했다는 것이고, 후자의 입장에서 보면 재벌 사모님이 옷 뇌물을 제공하려다 거절당하자 스스로 사기극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번에는 삼척동자(三尺童子)라도 그 이름을 다 아는 패션 디자이너 김봉남(?!)이 우정 출연하지 않는다던가.

드디어 국회 청문회의 형식을 빌어 본 공연의 막이 오르자 기대대로 주연 여우 4명의 연기는 그야말로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앞서 거론된 내각제전의 연기와는 차원부터 달랐다.

내각제전에서는 주연 배우 2명이 이 연극은 사기극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으나 옷 로비전에서는 4명의 주연이 모두 이 연극은 사기극 이라고 목청을 높였던 것이다.

이 점은 주연 배우들이 부른 2곡의 주제가에 잘 압축돼 있다. 먼저 여성 4중창 ‘아리송해’

“아리송해 아리송해/어제 한 너의 말이 아리송해/옷값 대납 요구받았다는 /터무니없는 말이 아리송해/2천2백만원 옷값 내라는 전화 부인/앞 뒤 틀린 그 말이 아리송해.”

이 노래는 서로 상대방의 증언을 사기로 몰아 치는 심정을 잘 표현했다고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이 노래를 압도한 두 번째 주제곡이 바로 옷가게 사장 정왈순(鄭曰順)이 부른 ‘거짓말이야’였다.

정왈순은 이번 공연에서 잡아떼기 더듬기 눈물짜기 악쓰기와 같은 육체적 연기로 주목을 끈 배우.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부른 ‘거짓말이야’는 이번 공연에 엑스트라로 출연하기 위해 여의도 민의의 전당에서 온 신사들의 넋을 빼 놨다. 만당한 TV시청자들의 얼을 빼 논 것은 물론이고-.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맹세도 거짓말 성경도 거짓말/옷값 대신 내라고 전화했다는 증언도 거짓말/영부인 옷 만들었다는 질문도 거짓말/그렇게도 잊었나 세월 따라 잊었나/웃음 속에 만나고 눈물 속에 헤어져/다시 만나지 않으리 그대 잊으리/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정왈순은 노래도 출중했을 뿐만 아니라 고도의 두뇌 게임에서 장관 사모님 역 배청숙과 검찰총장 사모님 역 연청희 그리고 재벌 사모님 역 이홍자를 압도했다. 그는 연극 출연 하루를 빼먹고 그 동안 자신과 경쟁할 다른 여우의 연기에 무슨 허점이 있는 가를 철저히 연구했다.

사직동 팀의 축소 수사 혐의를 잡아내려는 여의도 신사들의 유도질문에는 “그 문제 때문에 사직동에서 아주 혼이 났다”고 미리 김을 빼기도 했다.

거기다 연극 공연 중간 중간 자신의 부티크에서는 값싸고 질 좋고 바느질 곰꼼한 옷을 만든다고 선전까지 했다. 그러니 가령 거기서 수백만원(혹설에는 수천만원)짜리 옷을 수십만원(혹설에는 수백만원)에 판다면 누가 사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로비전의 내막을 알고 있으리라는 기대를 이렇게 무참히 짓밟은 그의 고감도 감성 연기는 그야말로 ‘정왈순의 전성시대’를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연극 공연은 개막 때처럼 절찬리에 끝났다. 그렇지만 4명의 여우를 당황케 한 사건은 그 뒤에 일어났다. 기껏 잘 구경을 한 관객들이 우 일어서서 저질이라느니 코미디라느니 야유를 퍼붓는 것 아닌가.

이처럼 사기극의 본질을 심도있게 묘사한 탁월한 연극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 연극의 뒷 얘기는 무성하다. 장관 사모님들의 단체 자선행사는 금지됐다. 자선행사 끝에 무심코 벌인 옷가게 순례가 얼마나 사람들의 눈총을 받는가를 분명히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번 연극을 통해 얻은 교훈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나훈아 쇼도 개별적으로 혼자 가서 보게 됐다.

그런가하면 단역으로 출연했던 또 한 명의 장관 사모님은 낙향을 결심했다.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자연을 벗삼고 조용히 살기로 했다. 고위 공직자 가정의 분별없는 처신이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키는 가를 옆에서 똑똑히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문회 형식을 빌어 진행된 이번 연극이 과연 실제적 효과를 봤느냐에 대해서는 두고 두고 말이 많다. 좋은 작품을 감상하고도 왜 관객들은 감동하지 않는가. 어떻게 하면 청문회 형식의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는가.

특히 대질신문이라는 최후의 처방까지 썼는데도 왜 사람들은 이번 연극이 거짓말 경연장이 됐다고 매도(罵倒)하는가. 과연 이번 연극의 출연진 전체가 진실 규명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던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래서 다음 공연부터는 다음과 같은 제도적 개선점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우선 공연 기간이 너무 짧다. 얼키고 설킨 이야기를 차분히 풀어 가려면 사흘로는 어림도 없다. 적어도 몇 달, 또는 닉슨의 워터게이트 도청사건을 조사한 것처럼 1년 이상을 끌어야 한다.

둘째 질문자로 나서는 여의도 신사 분들의 조사 능력을 충분히 길러 줘야 한다. 탐정에 가까운, 예를 들면 형사 콜롬보 같은 추리 능력을 배양하도록 평소에 훈련을 쌓도록 한다.

그런데 한가지 고민은 이렇게 되면 관객들의 외면은 받지 않겠지만 정왈순의 전성시대는 끝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삭막한 세상에서 혀를 차고 허허 웃을 수 있는 일이 언제 또 있을 것인가. 이게 바로 옷 로비전을 감상하려는 관객들의 모순된 고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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