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월호]

100세 원로 방지일 목사

생명 나눔 친선대사

운동본부, 전현직 장관 등 9명 위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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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본부장 박진탁 목사)129일 아침, ‘생명 나눔 친선대사’ 9명을 위촉했다. 운동본부는 매월 9일을 장기기증의 날로 지정, 대국민 홍보캠페인을 전개해 오면서 이날 각계 인사들을 친선대사로 위촉함으로써 새해부터 더욱 적극적인 생명나눔운동을 확대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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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계 유력인사 9명 친선대사

이날 아침 7시 조선호텔에서 가진 친선대사 위촉 식에는 진수희 보건복지부 장관이 참석하여 정부차원에서 민간 생명나눔운동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생명 나눔 친선대사로 위촉된 9명 가운데는 국회의원, 전현직 장관, 인기배우 뿐만 아니라 새해에 100세를 맞는 방지일(方之一) 목사가 친선대사로서 남은 생명을 나누겠다.”고 우렁차게 다짐하여 모두를 놀라게 감동시켰다.

생명 나눔 친선대사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장기기증운동에 참여해 온 경력을 지니고 있다.

김경한 KH 법률연구소장(전 법무부 장관)은 지난 20093월부터 사랑의 각막기증 캠페인을 벌여 법무부 직원 73%535명의 각막기증 등록을 기록했다. 박병석 의원()3선 의원으로 활약 중인 중진의원으로 지난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첫 세비(歲費)전액을 장기기증 운동본부에 후원금으로 기탁한 정치인이다.

방지일 영등포교회 원로목사는 국내 최고령 선교 경륜으로 사랑의 장기기증운동 후원회 고문을 맡고 있다. 배병휴 월간 경제풍월 발행인은 매일경제 주필 출신으로 운동본부 초대 법인이사를 지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사랑의 각막기증 캠페인으로 문체부 직원 55명의 등록을 이끌어 냈다. 이광자 서울여대 총장은 채플시간을 통해 장기기증 캠페인을 꾼준히 벌여오고 있다.

이귀남 법무부 장관은 지난 2009년 법무부 차관시절 각막기증 캠페인을 전개하면서 부부가 기증등록을 했다. 월남전 참전용사인 전도봉 한전KDN 사장은 제22대 해병대 사령관으로 전역한 후 한전KDN 경영을 맡아 장기기증 캠페인을 벌여오고 있다.

인기배우 최지우씨는 지난 99년부터 사랑의 장기기증 홍보모델로 활동해오면서 포스터 사진촬영 및 포스터 제작비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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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란 속에 21년간 선교

생명 나눔 친선대사 가운데 최고령 방지일 목사는 19115, 평북 선천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선천 신성중학교, 평양 숭실전문대 영문과, 평양 신학교를 나와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부터 일생 선교활동으로 오늘의 100수를 맞이했다.

방 목사는 중·일 전쟁이 일어난 1937년 중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다섯 차례나 정변을 거치면서도 철수하지 않고 21년간 중국인들의 영혼구원에 몸과 마음을 바쳐온 중국선교의 역사이다.

당시 방 목사가 중국으로 떠나기 위해 서울역으로 나오자 많은 교인들이 엄숙한 전별기도를 올렸다. 이때 김인서 장로가 준비해온 현수막에 적힌 글을 아직도 기억한다.

중국 가서 중국 사람이 되라, 거기서 죽고 돌아오지 마라, 죽어 곤륜산에 묻히라는 글귀였다.

방 목사가 중국에서의 사역 중에 수많은 위기와 고비를 겪었지만 굳세게 도전하고 극복한 신앙의 힘이 바로 이날의 전별기도 때문이었다고 믿어진다.

·일 전쟁 후 추방위기 극복

방 목사는 처음에 선친 방효원 선교사가 사역하던 중국의 배양 현에 도착했다가 전란의 영향으로 청도로 옮겼더니 동료 선교사가 귀국하여 논의할 상대마저 없었다. 2년이 지나서야 안식년으로 떠났던 선교사들이 돌아와 함께 선교활동을 펼쳤다.

방 목사는 전란 중에도 청도의 빈민지역인 중자와(仲家?)라는 곳에 처음으로 중자와 교회를 세웠다.

중국대륙을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지배할 때는 대륙선교활동이 순탄하여 미국인 선교사가 5,000명에 이르렀다. 해안에서 오지까지 비교적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벌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인들의 선교활동도 총회 창립을 계기로 10여년 만에 한국인 선교구역 만으로 노회가 조직되어 중화기독교 전국총회 산하 17대회 121개 노회 가운데 하나가 됐다. 그러다가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벌어지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미국인 선교사들은 귀국하거나 포로가 되고 한국인 교회도 일본목사들이 접수하려 들었다. 일본은 히비끼 소장을 중심으로 대동아 선교회를 조직하여 일본목사들을 통해 중국교회들을 장악코자 시도했다. 그렇지만 일본목사들의 선교에 교인들이 모이지 않았다. 반면에 방지일 선교사가 개척한 교회에는 수백 명이 모여들어 대조를 이뤘다.

이렇게 되자 일본목사가 내선일체’(內鮮一?)를 내세워 일본과 조선은 하나가 아니냐.”면서 끈질기게 접근해 왔지만 끝까지 거부했다. 방 목사는 중국으로 건너올 때 중국목사의 적()을 갖고 교회도 중국기독교를 세운 것이므로 목사와 교회의 적을 바꿀 수 없다.”고 맞서 투쟁했다.

중국 공산혁명 후 9년간 저항 선교

일본 군국주의와 선교투쟁이 처절했지만 일본이 항복하고 공산정권이 수립된 후 방 목사의 처지는 더욱 어려워졌다. 1949년 모택동 정권이 수립되자 공산당은 외국 선교사들에게 출국 령을 내리고 종교 활동을 금지시키고 종교관련 재산을 몰수했다.

이에 따라 미국 영사관이 철수하고 방 목사도 귀국하느냐, 남아있느냐의 기로에 빠졌다. 19536·25 전쟁이 정전됐을 무렵 중국대륙에는 한국인으로 방 목사가 혼자 남았다. 이때 본부 총회로부터 신변안전을 이유로 소환장이 도착했다. 그러나 방 목사는 그로부터 4년간이나 더욱 끈질기게 저항하며 버티었다.

공산정권의 추방령과 본부의 소환장에도 불구하고 현지인들을 생각하는 선교정신이었다. 뿐만 아니라 방 목사로서는 모택동 정부가 그를 북한으로 추방하려는 기도를 받아 들일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공산치하에서 9년간이나 저항 끝에 1957년 홍콩으로 퇴거되어 영등포교회에서 지금껏 원로목사로서 활약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196070년대 교단 총회 전도부장, 경기 노 회장, 56회 교단 총 회장 등을 역임했다. 또한 기독 공보사 사장(7375), 국민일보 주관 세계선교부문 대상(96.12), 국민훈장모란장(98.8), 연세대 제3회 언더우드 선교상(03.10) 등을 수상했다. 경제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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